지금까지의 상황을 전해들은 근육질의 남자. 진고훈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은혈귀의 피를 먹게 된 경위는 잘 알았다.”
뜬금없이 내가 은혈귀의 피를 먹게 됐다는 진고훈. 당연하지만 저건 진실이 아니다. 한국본부 간부진들이 만든 ‘설정’이지.
본부장님은 다른 지역 순례자들과의 충동을 대비해 다른 사람들이 덜 부담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도록 하나의 거짓을 만들어냈다.
내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은혈귀의 피와 살점을 먹게 되었고, 덕분에 변이가 일어났다는 설정을.
이지인 누나의 말에 의하면 은혈귀의 습격을 받은 사람이 은혈귀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사람인 채로 은혈귀의 힘을 손에 넣었다는 거짓이 더 안정감이 있다고 한다.
어차피 둘 다 상식을 깨버리는 일이라면 ‘은혈귀의 습격을 받은 사람은 죽거나 은혈귀의 그 자식이 된다’는 기존의 상식을 보존하는 편이 더 받아드리기 쉽다나 뭐라나.
“하지만 네 녀석이 차후 그 힘에 휘둘려 은혈귀나 다른 위마가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 그래서 나는 이 사태를 간과할 수 없다.”
그거야 나도 불안하긴 하다. 내가 돌연변이인 만큼 뭘 하든지 ‘절대’란 말은 붙일 수 없으니까. 언젠가 뜬금없이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은 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뉴스 조금만 뒤져봐도 멀쩡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 때문에 홱 돌아서 총기난사 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구질구질한 변명을 이어가는 도중 한소윤이 내 말을 끊고 작게 핀잔을 줬다.
“바보야.”
“왜?”
뜬금 없는 매도에 의문을 띄우는 내게 진고훈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널 처리해야 한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아하.”
하긴. 총기난사범들이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바로 집중 관리에 들어갔겠지. 확실히 너무 생각 없이 말해버렸네.
“···됐다. 이초성 본부장님도 생각이 있으시니 너를 협회원으로 받아드리신 거겠지. 이번 일은 묵과하마.”
엥.
뭔 바람이 불었길래 이렇게 순식간이 태도를 전환하는지 모르겠지만 뭐. 잘 된 일인가?
나는 행여 진고훈의 태도가 바뀌기 전에 재빠르게 사건을 수습하고 도망가기로 결정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사건의 인수인계도 끝났으니 저희는···”
“웃기지 마! 저 녀석은 지금 당장 정화해야 된다고!”
죄 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컴퍼니 삼인방을 넘기고 이제 박물관에서 빠져나가려는 내 귓가에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아까 분신술을 쓰던 남자는 브로드 소드를 나한테 겨누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놓아준다고? 은혈귀 새끼를 지금 놓아줄 거라고? 제정신이냐?”
“태, 태성아 팀장님한테 무슨!”
30대의 남자가 고태성의 어깨를 잡고 말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고태성은 남자의 손을 뿌려 치고 더욱 목성을 높였다.
“씨발 놔! 은혈귀 새끼를 앞에 두고 뭐하는 짓거린데!”
‘뭐야? 왜 저래?’
왜 저렇게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듯이 발광하는 건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까 문답무용으로 싸운 것 때문에 그런가?
“저기. 말했듯이 아까는 제가 그쪽이 컴퍼니인 줄 알고···.”
“닥쳐! 은혈귀 새끼가 감히 입을 열어?!”
거참. 대화가 안 통하네.
나는 고태성과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거란 직감이 왔다. 이럴 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침묵은 금이라는 명언을 지키는 게 최선. 가만히 있자.
대꾸를 하지 않고 폭언을 꿋꿋하게 받아드리는 나. 이미 서유진으로 단련된 몸. 저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다.
내가 그렇게 잠자코 있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고훈이 끼어들었다.
“말이 좀 과하군. 고태성.”
“과해? 과하다고? 은혈귀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당신이, 우리 가문의 위세를 업고 있는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이 나오고 있군.”
“쯧. 너무 흥분했어. 자고 있어라.”
진고훈은 아직 해제하지 않고 들고 있던 자신의 대검을 땅에 떨궜다. 그리고 바닥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기도 전. 고태성의 명치를 주먹으로 강하게 가격했다.
보는 사람이 아플 정도의 어퍼컷. 순간 호흡을 못 하던 고태성은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지 몸을 가누지 못 하고 휘청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힘을 짜내며 말했다.
“내가 반드시···. 정화해버리···.”
그 끈질긴 태도에 나는 허를 내둘렀다.
마지막까지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구만.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며 지켜보던 30대 남자에게 고태성을 챙기라 명한 진고훈은 찝찝한 기분이 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례가 많았군. 사정이 있어 은혈귀라면 눈이 뒤집히는 녀석이다.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예. 전 괜찮아요.”
괜찮지 않고 기분 더럽지만 더 이상 엮이기 싫기 때문에 나는 억지로 타협했다. 진고훈은 그걸 눈치 챘는지 씩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래. 나중에 내가 잘 타이르도록 하지. 더 이상 이 건을 크게 번질 생각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굳은살이 잔득 박혀있는 진고훈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 내 손을 뻗어 맞잡았다. 괜한 분란을 더 만들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빈정상했지만 웬만해선 다시 볼 일도 없을 텐데 욕먹었었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품고 있어봤자 나만 손해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박물관에서 나온 내게 한소윤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잘하면 큰일로 번질 지도 몰라.”
“왜? 저 사람이 약속을 어길 거 같지는 않던데?”
진고훈은 겉모습도 겉모습이지만 행동이나 말투에서 남자다움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사람이 치졸하게 약속을 어기거나 사람을 속이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긴 하지만 막상 그리 행동하는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저 고태성이란 남자. 과격파를 이끄는 제주지부장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어.”
“음···.”
한소윤의 말에 나는 침음을 삼켰다. 그냥 평범한 협회원인 줄 알았는데, 뒷배가 있었을 줄이야.
협회원의 성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민간인의 피해를 다소 감수하더라도 위마의 정화를 우선시하는 급진파와 인명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온건파.
여기서 급진파를 또 몇 가지 분파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과격파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위마와 은혈귀를 정화하기위해선 그 어떠한 일도 주저 없이 이행한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를 희생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과격파는 그 정도로 위마에 대한 집착이 강한 단체다. 나를 은혈귀로 판단 내린다면 아마 주저하지 않고 공격하겠지.
물론 내가 제주도에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모레면 돌아가는 만큼 직접적인 위해에 대한 걱정은 일절 하지 않는다.
지부와 본부가 수평에 가까운 관계라고는 해도 분명 지부는 지부. 본부의 입김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상 본부 산하에 있는 내게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인력도 없을 테고.
지금 걱정 되는 건 그들이 내 문제를 한국 대위마 정화협회 정례회의 때 완전히 공론화시켜버리는 거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협회원의 대다수가 온건파라지만 위험하다며 격리조치가 내려지거나 모르모트가 될 지도 모른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가도 이미 내 자신이 문제화 된 이상 협회는 날 골치 덩어리로 볼 거다.
"그게 아니라도 저 사람의 태도는···."
한소윤은 뒷말을 삼켰다. 확실히 고태성이 내보인 감정의 파동은 예사롭지 않았다.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탄을 보는 느낌이다.
“방법이 없으려나.”
“일단 본부장님한테 보고해둘게.”
“···끙. 뭔가 사고치고 부모님한테 보고하는 기분이라 별론데.”
하지만 한소윤은 그런 날 상관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열어 멋대로 보고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순간 잠깐! 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힘없으면 얌전히 빌붙어 있어야지 어쩌겠어. 돌아가서 잠이나 자고 내일 여행이 취소되지 않기를 빌면서 잠이나 자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연달아 뇌리에 인스톨 한 나는 때때로 한소윤의 보고문을 훔쳐보고 첨언하는 등의 뻘짓을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