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날씨 진짜 뭐 이러냐.”
“그러게.”
제주공항 안. 캐리어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 내게 인용이가 투덜거렸다. 아침 8시. 수학여행 첫 날 제주도의 날씨는 우중충하다 못 해 약간이지만 보슬비까지 내렸다.
덕분에 나는 창가지리임에도 창문 밖의 구름 이외엔 그 무엇도 구경하지 못 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의 풍경이 그렇게 멋지다는데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살짝 투덜 거린 뒤 다음을 기약하며 나와 인용이. 그리고 한솔이는 각자 캐리어를 챙긴 뒤 집합 장소로 이동했다.
오싹.
“뭐야?”
방금 뭐였지?
친구들과 사담을 나누며 걸어가는 도중 마치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나를 칼로 찌를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예감이라기엔 너무 확정적인 감각이었다. 만약 반응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찔렸을 정도다.
“왜 그래?”
내가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자 인용이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차마 나의 천부적인 육감이 뭔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적당히 둘러댔다.
“아니. 벌레가 있어서.”
“어디? 어디?”
“이미 날아갔어.”
덩치에 비해 벌레를 무서워하는 인용이를 뒤로하고 나는 방금 전 느낀 감각을 한소윤에게 말하는 편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아니야. 내 착각일 수도 있지.’
요즘 들어 감각이 날카로워졌다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쉽게 착각한 걸 수도 있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만큼 나를 향한 적의가 아님에도 내가 포착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내가 제주도에서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적도 없고 말이다.
‘원한을 사긴. 와본 적도 없는데.’
나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강렬한 적의를 보냈다는 건 분명 상기할만한 사건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끼어드는 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뿐이니까.
“뭐해. 아직도 벌레가 있어?”
“없어. 벌레가 뭐가 무섭다고 그렇게 떨어져 있냐?”
“징그러운 거지 무서운 게 아니거든? 그리고 니가 늦게 온 거지 내가 빨리 간 게 아냐.”
“퍽이나.”
인용를 놀린 나는 괜한 생각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집합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일정은 별 거 없었다. 버스에 타서 여기저기 구경 다니다가 식당에 들려 밥을 먹고 또 구경 다니다가 저녁쯤 되니 숙소에 온 게 전부.
초여름의 제주도는 확실히 눈을 즐겁게 만드는 자연경관이 많았다. 만약 몸을 질척이게 만드는 비구름만 없었다면 3배는 더 신나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게스트 하우스 안에 있는 2층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인용이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차지한 승자의 자리인데 딱히 1층의 침대와 다를 건 없고, 오르락내리락하기 불편하기만 해서 내심 후회 중이었다.
“야. 내려와 봐.”
“귀찮게 왜 또.”
지금 날 부르는 인용이는 이미 한 번 창 밖에 바다가 보인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나를 이 침대에서 끌어내린 전적이 있다. 급박한 척 하는 연기만큼은 배우 뺨칠 정도다.
“이번에는 뭐가 보이는데. 별?”
벌써 잘 시간이다. 오늘의 일정은 전부 종료됐고 소액을 걸고 하는 포커 대회니 과자 파티니 하는 놀이시간도 끝났다. 깔끔하게 씻어 몸도 개운해졌기에 나는 이 상태로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2반이랑 6반 애들끼리 패싸움 났대.”
“···엥?”
이게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그게 뭔 소리야?”
“설명은 가면서 해줄게. 우리 건물 앞에서 싸움 났다니까? 빨리 구경 가자.”
나는 그 말에 주섬주섬 일어났다. 애들끼리의 싸우는 거야 일상다반사라지만 반끼리 패싸움이라니. 그것도 수학여행처럼 선생님의 감시가 엄중이 행해지는 곳에서 말이다.
인용이가 이런 걸로 거짓말 할 녀석은 아니니 사실이겠지만 역시 믿기 힘든 일이다.
우리학교 2학년은 총 7반까지 있다. 참고로 나와 한소윤 등이 있는 곳은 4반. 강성하는 7반이다.
뭐 넘어가고. 중요한 건 우리 학교의 구조상 2반과 6반은 그렇다할 접점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1,2,3,4반과 달리 5,6,7반은 한 건물 너머에 있는데다 선택과목 시간도 겹치지 않는다. 그건 이번 수학여행에서도 마찬가지. 2반과 6반의 게스트 하우스는 중간에 3,4반을 두고서 서로 떨어져있다.
그런데 걔네들이 우리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싸우고 있다고? 그것도 반 전체가?
“뭣 때문에 싸우는 건데?”
“몰라. 아까 2반이랑 6반이 여기 오기 전에 같이 들린 곳에서 뭔가 시비가 걸렸대.”
선생님들은 제주도 관광을 원활하게 즐기기 위해 반마다 일정을 다르게 짜놓았다. 오늘 우리들이 간 곳을 다른 반 애들은 내일 가고 다른 반 애들이 오늘 간 곳은 우리가 내일 가는 식이다. 그렇게 아직 우리가 들리지 않은 관광지 중 한 곳에서 2반과 6반이 서로 만났고,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우와아아아아!
으아악!
죽여 버려 개자식!
꺄악!
‘아비규환이 따로 없네.’
나와 인용이가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남녀 가라지 않고 총 60명의 인원이 서로를 물고 뜯고 때리고 밀치고 밟고 있다.
큰 소란에 몇몇 선생님들이 나와서 애들을 말려봤으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아직 애들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몸은 이미 다 자라 성인이나 마찬가지인 고등학생 60명을 고작 어른 몇 명이서 막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싸움은 점점 더 격해지고 이윽고 유혈사태로 번져나갔다. 이 싸움판은 동물들이 싸울 때 왜 이빨과 손톱을 무기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흥미본위로 구경 온 아이들도 그 험악한 싸움판에 질려버렸는지 눈을 돌리거나 행여 휩쓸릴까봐 도망쳤다.
“야. 가. 가자.”
인용이 또한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광기에 침식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겁먹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쩌지? 이대로 그냥 돌아가도 되나?’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어떤 애는 이미 기절까지 갔는지 꼼작도 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 있다. 그럼에도 다른 애들은 그 아이를 짓밟고 다니고 있는 상태. 여기서 막지 않는다면 후에 더 큰 일이 벌어지리란 건 명백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갑옷을 입지 않는 나는 요즘 운동에 취미를 붙인 평범한 학생이니까.
“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나는 저 판에 끼어드는 것 대신 소시민적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행동에 나섰다.
내가 신고한 게 밝혀지면 선생님들은 학교의 망신을 대대적으로 소문 낼 거냐며 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태를 막는 게 우선이니 어쩔 수 없다.
‘물론 신고자를 특정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
그렇게 내가 경찰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얘들아! 쟤네 좀 진정시키게 도와줘!”
누군가가 광장을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다.
큰 소동이기에 거의 전교생이 모여 있어 엄청 소란스러운데도 그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
“쟤네 때문에 우리의 한 번뿐인 수학여행 망칠 수는 없잖아?! 힘을 모아서 쟤네 좀 때어놓자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도 잘 아는 소년이었는데, 바로 현장 제 2팀 소속 황옥의 순례자. 강성하였다.
성하의 간결한 말에는 이상할 정도로 호소력이 있었고, 그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무언가가 잠재되어 있었다.
그 힘을 자신도 잘 알고 있는지 강성하는 다시 한 번 모두가 들릴 정도로 크게 외치며 훌륭하게 지휘통제를 시작했다.
“1반 뒤에 도로로 돌아가서 싸우는 애들한테 두 명씩 붙어서 끌어내고! 거기 4반! 앞에 있는 선생님들 도와드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한테 붙어! 잡을 때 팔 위주로 잡아야 돼! 7반은 가서 5반 애들 좀 불러와! 1반 옆에 의자에 있는 애들! 앞에 쓰러진 남자애 좀 끌고 나와! 2반 애들은 2반 게스트 하우스에 몰아넣고! 6반은 6반으로 가! 모르면 선생님한테! 선생님들은 걔네 몇 반인지 확인해 주시고요!”
강성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학생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몇몇 가만히 지켜보던 애들도 자신이 지목 당하자 뜨끔했는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이게 바로 리더십인가? 크게 될 녀석이네.’
나는 이게 혼란만 더 부추기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더 지켜봤지만 다행히도 2반과 6반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만 적의를 내뿜을 뿐 자신을 말리는 애들한테까진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우리도 거들자.”
인용이도 그 모습을 보고 안전하다 느꼈는지 발 벗고 나섰다. 이대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 나도 인용이의 말에 동의하며 가장 가까운 아이에게 다가갔다.
“멈춰!”
상대방한테 주먹을 휘두르려는 아이의 손을 강하게 잡은 나와 인용이는 그대로 몸부림치는 녀석의 팔을 하나씩 굳게 잡아 질질 끌며 뒤로 뺐다. 이 녀석과 싸우던 녀석은 다른 애들이 데려갔다.
“너흰 6반으로!”
국어 선생님이 우리에게 붙들린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목적지를 알려줬다. 6반 아이인 것을 확인한 우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싸움판에서 멀어졌다.
어느 정도 싸움판과 멀어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버둥거리던 녀석이 급격히 진정하기 시작하더니 축 늘어졌다. 온 몸에 힘이 빠진 고등학생 한 명을 팔만 잡고 끌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잠시 녀석을 땅에 눕혔고, 그때 되서야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후 무겁네. 잠시 자세 좀···. 뭐야. 세찬이잖아?”
“진짜로?”
내 말에 인용이가 깜짝 놀라며 다시 얼굴을 확인했다. 박세찬. 인용이와 내가 1학년일 때 자주 어울려 다니던 녀석이다. 마음 씀씀이가 넓고 웬만한 걸로는 화도 잘 안 내는 쿨한 성격의 친구였다.
요즘 학년이 바뀌고 교실 건물이 떨어져 자주 못 만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인용이는 뒷말을 잇지 못 했다. 나도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세찬이를 옮겼다.
이런 녀석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관광지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여기 눕히면 돼. 고맙다 얘들아.”
세계사 선생님이 이제 완전히 기절한 세찬이에게 이불을 덮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2반과 6반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좀 더 데려올게요.’라고만 말하며 다시 싸움판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