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겠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또 누구인가. 왜 이러고 있는가.
머릿속에서 삶에 대한 철학적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이렇게 고단한 삶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내 삶의 방향은 옳은 것인가.
나는 그 질문에 억지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지 못 할 정도로 정신이 몰려있었다.
“와! 이것도 좋다. 그치 엄마.”
“그러네. 넣어놓을까?”
화목해 보이는 두 모녀의 뒤.
나는 다른 이상향을 원하는 외다리 병정처럼 탈출하지도 못 한 채 쓸쓸하게 서있다.
괜히 좀이 쑤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백화점 여성의류코너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의류 코너도 불편해하는 이런 사고를 겪게 된 계기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와 진짜? 이거 진짜 맞아?”
하린이가 호들갑 떨며 내가 준 선물을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봤다.
나는 그 모습에 절로 흐뭇한 감정이 넘실거렸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선물을 사오면서 우리보다 더 좋아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개척하는 내게 하린이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와. 뒤로 넘어져도 얼굴이 무너지던 오빠가 이게 웬일이야?”
“네 몫 안 준다?”
“아. 농담이지 농담.”
언제나 내가 한수 접어줘야 했던 동생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동생이 알아서 자신을 낮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준 선물이란 바로 100만원 한도의 백화점상품권이었으니까.
활동지원금을 명목으로 받은 월급을 어떻게 가족에 전해야 될지 고심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라는 핑계를 이용해 하린이에게 백화점상품권을 넘겨주었다.
사실 엄마가 있을 때 보여 주고 싶었지만 동생이 기뻐하는 반응을 보고 싶어 먼저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하린이의 반응은 나를 크게 흡족하게 했다.
최대한 유용하게, 최대한 호화롭게 사용하고 싶어서 요 며칠간 근방 백화점을 모조리 순회하며 조사하고 가장 평이 좋은 곳을 선택해 상품권 교환처에 가서 냅다 100만원짜리 상품권을 산 한 보람이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200만원 300만원 어치로 바꾸고 싶지만 금액이 커지면 추궁할 지도 모른다는 내 소심함이 발목을 잡았다.
추궁해도 합법적으로 손에 얻은 거라 털어도 먼지 날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우리 가족이 생각하는 ‘이 정도라면 있을 수 있지’의 범주 안에 드는 금액으로 책정했다.
“엄마한테는 말했어?”
“아직. 엄마 놀라게 할 거거든? 스포일러 하지 마라.”
하린이는 내 말에 같이 공모를 하는 범죄자의 얼굴이 되었다.
“오케이. 알았어. 언제 갈까? 엄마 토요일 날 쉴 텐데 오빠는? 연구소 가?”
“쉬는데. 왜 내 일정을 묻는 거지? 뭐지? 자기과시?”
“뭐래. 같이 가야 될 거 아냐.”
“…내가 왜?”
농담하며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던 나는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정색하며 물었다.
나는 현재 주말마다 서유진에게 불려나가서 훈련을 빙자한 지옥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
저번 전투로 나도 어느 정도 실력 상승이 필요하다 느꼈고, 시간 외 수당이 나왔기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슬슬 피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어서 이번 주말은 완전한 충전을 위해 서유진에게 사정사정해 휴식을 받아냈다.
그 시간을 쇼핑 같은 허튼 곳에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안 가게?”
“당연하지.”
“아 왜! 오빠 옷도 살 건데 안 오면 의미가 없잖아!”
“내 옷? 왜?”
“곧 수학여행 간다면서. 설마 그런 옷들 챙겨가려는 건 아니지?”
하린이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정신이냐는 듯이 물었다.
그래. 얼마 후면 곧 고등학교 2학년 최대의 이벤트인 수학여행이 시작된다. 3박 4일. 갈아입을 옷은 필수불가결이다. 그런데 옷을 새로 사는 거랑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 옷이 뭐가 어때서?”
오래 되지도 않았고 헤지지도 않았고 깔끔하고 편한 내 옷들이 뭐가 어때서?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나는 뭐가 문젠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하린이의 그 경멸어린 시선에 이번에는 차마 ‘응’이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사이즈 알려줄 테니까 대충 사와.”
하린이는 그런 내 모습에도 끈질기게 권유했다.
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여자의 쇼핑을 경험해 본 적은 없으나 그 악명은 익히 알고 있다. 그곳으로 내 몸을 던지는 위험한 행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자. 응? 가서 두 시간만 같이 둘러보자. 맛있는 것도 먹고. 응? 응?”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대다수의 남자가 넘어갈 만한 애교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는 입장.
나는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외치곤 소파에 누워 얼굴을 파묻었다.
“아. 몰라. 아무튼 안 가. 못 가. 쉴 거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두고 봐.”
두고 보자는 사람 안 무섭다더라.
나는 콧방귀를 끼며 승리자의 기분을 만끽했다.
만끽. 했었다.
회상을 마친 나는 가슴으로 울었다.
현대 사회는 다수결의, 다수결에 의한, 다수결을 위한 사회다. 소수의 의견도 무시해선 안 된다지만 그게 통용 되는 상황은 적다.
하린이는 비겁하게도 엄마를 끌어들였다. 엄마는 그대로 연구소에 취직해 사회인이 되면 사적인 만남도 많아질 텐데 그런 옷을 입고 만나선 안 된다며 훈계했다.
도대체 왜?
이 옷이랑 원래 옷이랑 뭐가 차이인 건데?
지금 입은 옷을 내려다봤다.
가장 시급한 문제라 말하면서 아까 엄마와 하린이가 골라준 이 옷은 지금까지 입던 옷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심심한 편이지.’
어찌되었든 내 옷을 산다는 과제는 선결되었을 텐데도 나는 아직도 여기에 발을 묶여있다.
집에 가려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보았지만 저 두 모녀는 내 계획을 모조리 차단해 무위로 돌렸다.
몰래 튈까도 생각했지만 그 경우엔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
쁴쁴븽 쁴쁴삉븽~
사면초가에 빠진 내게 익숙한 벨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짧지만 이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수단이다.
“무슨 일이세요?”
-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전화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대위마 정화협회 사원지원팀장. 이지인 누나였다.
“네. 괜찮아요.”
지금 같은 시간이라면 마음껏 퍼줄 수도 있었던 나는 신속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이지인 누나는 작게 쿡쿡거리며 웃더니 용건을 말했다.
- 그 백화점 5층에 성지가 발생했어요. 등급은 하급이지만 성지 구축 속도가 최상위에 속하네요. 다른 팀이 맡기에는 늦을 수도 있어서 그런데, 혹시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아무런 백업이 없이 홀로 행하는 성지순례지만 나는 부담 없이 수락했다.
첫 성지순례 이후 벌써 3주가 지났다. 그동안 난 이런 저런 곳을 끌려 다니며 많은 위마와 합을 겨뤄봤다.
겨뤄봤다 해도 대다수는 저급의 위마라 내가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크게 약화되서 손쉽게 쓰러트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첫 성지순례 때 느꼈던 불안감은 어느 정도 점칠 된 상태다.
- 그럼 부탁 좀 할 게요. 쉬는 날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후딱 끝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를 때라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하는 거보단 낫다.
어차피 수당도 나오고.
“나 잠깐 20분만 어디 들렸다올게.”
“왜?”
“친구가 근처래. 잠깐 만나고 오려고.”
“알았어. 다른데 가있을지도 모르니까 없으면 전화 하고.”
“그냥 집에 가면 안 될까?”
“안 돼.”
젠장.
하린이의 단호한 선언을 뒤로하고 나는 여성의류코너에서 빠져나왔다.
현재 위치는 3층. 나는 주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스포츠, 아웃도어 의류 코너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열면 되려나?’
나는 5층에 에 도착하자마자 5층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구석에서 몰래 스마트워치에 부속되어 있는 사람막이 결계를 펼쳤다.
그러자 용무를 마친 사람들은 뭔가에 홀린 듯 화장실을 잽싸게 나갔고,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 결국 화장실 안에는 나만 남게 되었다.
사람막이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아무리 급해도 이곳을 인지하지 못 하고 저 멀리 있는 반대쪽 화장실로 돌아가야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이게 더 급하니까 어쩔 수 없다며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항시 챙겨 다니는 사원증 케이스를 꺼내 언젠가 서민아가 했던 것처럼 금속 플레이트의 중앙 버튼을 누르고 허공에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