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킬링필드에서는 등을 보이지 마라
*** < 신세계 > 부르봉 왕국 서북부 푸르밀 마을 ***
푸르른 밀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집 마당에서 누나와 내가 밤하늘을 보고 있다. 그 모습을 꿈꾸고 있는 내가 한편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
“크리스, 무슨 생각해?”
누나가 물었다. 꿈속이라 실제로 물은 건 아니지만 왠지 현실에서도 일어날 것만 같아 불길하다.
“아무 생각 안 해. 그냥 별 보는 중이야.”
꿈속의 내가 대답했다. 꿈속의 나는 밤하늘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별 멋있지?“
“어.”
“저기 저 밝게 빛나는 북극성을 따라 쭉 가다보면 아빠가 계시는 신성의 사탑이 나온데.”
누나가 손을 뻗어 북극성을 가리켰다. 누나 옆에 앉아있는 꿈속의 나는 밤하늘의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꿈을 꾸고 있는 나는 누나가 가리킨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북극성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신성의 사탑. 그곳에 계신 아버지...
“아빠 언제쯤 돌아오실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툭, 툭, 무심히 내뱉는 내 말투에 누나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꿈꾸고 있는 나도 꿈속의 나를 쳐다봤다. 저 새끼 누나에게 말 좀 예쁘게 하지...
“크리스, 너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아니면 누나한테 불만 있거나.”
“없어. 왜.”
꿈속의 나는 누나의 물음에 건성건성 답하며 계속 하늘만 봤다. 밤하늘을 보고 있는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그것을 꿈속의 내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크리스 너 요즘 누나에게 되게 쌀쌀맞아졌어. 신경도 예민해진 것 같고... 밤마다 꾸는 그 악몽 때문에 그런거ㅇㅑ...”
“잠깐만!”
내가 누나의 말을 끊으며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누나가 나를 따라 일어났다. 그러고는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누나도 쳐다보았다. 검은 도화지에 반짝이는 금싸라기를 무수히 뿌려놓은 것 같은 밤하늘에 돌연 불청객들이 나타났다.
“어! 별똥별 떨어지네.”
누나가 불청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붉은 별똥별은 처음 본다. 그치?”
32개의 붉은 별똥별. 그것들이 하늘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며 떨어지고 있었다.
“올 거야...”
꿈속의 내가 그 별똥별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뭐가? 뭐가 올 거야?”
누나가 내 말을 듣고는 물었다.
“그놈이...”
꿈속의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꿈을 꾸고 있는 나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누나를 지켜야 한다. 이 꿈이 현실이 된다면 누나가 위험하다. 아버지가 신성의 사탑으로 가는 꿈도 현실이 되었듯, 이 꿈도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반드시 누나를 지켜야 해!’
꿈은 또다시 장면을 바꾸며 나를 다음 장소로 데려갔다. 아직 내 꿈은 끝나지 않았다.
*** < 현실과 신세계의 중간지점 > 게임의 방 ***
[‘만찬장으로 가라’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블러드 포인트가 10 증가합니다.]
“왔다. 왔어.”
“겁나 늦게 오네.”
태조가 불의 문을 통과하고 도착한 곳은 만찬장이었다. 온갖 종류의 산해진미가 한상 거하게 차려져 있는 만찬장. 그 만찬장에 32명의 테스터들이 태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자식 뭐하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도우미랑 떡이라도 쳤나보지.”
“새끼, 다 너 같은 줄 아냐.”
삼삼오오 모여 있는 테스터들은 태조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빨리 게임을 하고 싶은데 태조가 늦게 오는 바람에 불만이 쌓인 것이다.
‘마지막에 와서 첫인상만 안 좋아졌네.’
태조는 만찬장에 있는 테스터들을 쭉 둘러보았다. 개성이 철철 넘치는 외모부터 경국지색의 외모까지 선남선녀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만찬장에 와서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레 어울린 것이리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태조가 웃으며 테스터들에게 인사했다. 모든 테스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가운데 자신 있게 한 인사, 현실에서라면 꿈도 못 꾸었을 행동이다. 하지만 여기는 가상현실이다. 게다가 위장 가면으로 또 한 번 모습까지 변했다.
‘가상현실이야. 내가 꿈꾸던 외모고.’
저들은 태조를 알지 못한다. 태조가 어떠한 행동을 하든 거부감 없이 그걸 태조의 모습으로 인식한다. 원고지에 쓰는 첫 글자, 첫 문장, 이게 가상현실에서 태조의 위치다. 어떤 글자를 쓸지는 태조가 결정하면 된다. 그 후에 따라오는 문장들은 첫 글자, 첫 문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이제 내가 상상해오던 나를 실현하면 되는 거야!’
태조는 현실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할 수 있다. 환경과 외모가 따라주지 않아 현실에서 주저했을 뿐이다. 지금은 외모도 출중하고 자존감도 충만하다. 꿀릴 게 없다. 다른 테스터와 태조의 출발선상도 동일하다. 출생부터 불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지는 현실과는 다르다.
‘내가 먼저 다가가자.’
테스터들과 어울리기 위해 근처에 있는 무리로 향했다. 태조가 향하는 곳에는 남자 2명, 여자 2명이 있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둥그런 번호표가 붙어있었다.
‘8번, 19번, 26번, 31번이네.’
태조의 가슴에는 33번 번호표가 어느새 붙어있었다.
‘들어온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지는구나.’
태조는 자신의 번호표를 흘끔 확인한 후 당당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갔다. 그런데 태조의 앞길을 자그마한 테스터가 대뜸 막아섰다. 키도 그렇고 외모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 녀석이었다.
‘4번. 일부로 캐릭터를 어리게 만들었나보네.’
외모는 개인취향에 맞게 만드는 거니까 뭐라 할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린 걸 좋아하는 녀석인 것 같았다. 초등학생을 테스터로 뽑았을 리는 없으니까.
“33번 행님, 늦은 부분 인정하는 클라스가 지리고요. 오지고요. 내 마음에 쏙 드는 부분이고요~.”
4번 번호표를 달고 있는 녀석이 십수 년 전 유행했던 급식체를 쓰며 깝쳤다. 지금은 급식아재들이나 쓰는 말이다.
“내 1호 부하로 들어오는 게 어떠심? 내가 우승하기 위해서는 행님 같은 린성 쌍타치 클라스가 오지게 필요한 부분.”
태조는 대놓고 무시할까 하다가 다른 테스터들의 이목도 있고 해서 젊잖게 대꾸하기로 마음먹었다.
“하하. 저에 대해 좋게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아직 누구 부하를 하거나 그럴 상황은 아닌 거 같아서요.”
“겸손까지 한 걸보니 레알 내 부하각. ㅃㅂㅋㅌ! 33번 행님을 내 부하로 삼는 부분~.”
“......”
눈치코치를 쌈 싸먹었는지 에둘러 거절하는 걸 못 알아 처먹는 4번 테스터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태조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하하하. 근데 닉네임이 특이하시네요. 아기모띠 주는 리모... 어? 아기모띠가 아니라 아낌없이 아닌가요? 아낌없이 주는 이모.”
4번 테스터의 번호표 밑에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아기모띠 주는 리모’라고 적혀있는 것을 가리키며 태조가 물었다. 태조의 말에 4번 테스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행님, 아낌없이가 아니라 아기모띠라는 부분. 아기모띠 주는 리모! 아기모띠! 아끼모띠! 앙기모띠~! 앙~!”
‘...... 병신이다. 어울리면 안 되겠어.’
4번 테스터의 위중한 상태를 확인한 태조는 가볍게 목례하고 원래 가려던 테스터 무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33번 행님. 어디 가는 부분?”
4번 테스터가 태조를 불렀지만 못 들은 척했다. 더 이상 말 섞고 싶지 않았다.
“이거 배신각? 컹스, 이거 실화냐?”
‘배신은 무슨. 내가 지 부하도 아닌데.’
애써 무시하며 걸었다.
‘무시가 답이야. 저 테스터들하고나 자연스레 어울려보자.’
태조는 이내 4명의 테스터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안녕하세... 윽!”
밝은 표정으로 테스터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던 태조에게 불의의 일격이 덮쳐왔다. 45각도로 비좁은 관을 파고드는 예리한 무언가. 익숙하다. 초등학교 때 당했던 추억의 그 맛... 아련한 추억의 맛과 함께 기분이 몹시 더럽다.
“으... 씨...발...”
태조가 무지막지한 고통에 녹다운됐다.
“후~~.”
4번 테스터가 손가락으로 만든 권총의 총구에 입바람을 불었다. 황야의 무법자를 보는 듯했다.
“배신자에겐 참교육이 필요한 부분. 린정? 어 린정.”
나름의 참교육을 끝낸 4번 테스터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4번 저 새끼 또 저런다.”
“미리 알려줄걸 그랬나? 조심하라고.”
“됐어. 늦게 왔으니 당해도 싸.”
“야, 넌 안 당해봐서 몰라. 저 4번 새끼 얼마나 깊숙이 집어넣는데. 목구멍까지 뚫고나올 기세로 넣는다고.”
4번 테스터의 똥침 행각이 처음이 아닌 듯 삼삼오오 모여 있는 테스터들끼리 수군수군거렸다.
“아... 하... 핳...”
고통에 신음만 내뱉고 있던 태조는 분노가 차올랐다. 이건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다. 넘어가서도 안 된다. 무반응으로 대응하면 테스터들이 호구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는 고통을 참고 일어나 4번 테스터와 대거리를 하려고 했다.
“이 미친ㅅㅐ....”
쌍소리가 막 입에서 나오고 있던 그때, 만찬장 입구가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간드러진 목소리. 태조는 익숙한 멜로디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녀다!’
칵테일바에서 만났던 그녀.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검은 파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을 때와는 또다른 농염한 매력이 느껴졌다.
그녀의 옆에는 2m가 넘는 거구의 사내가 보디가드처럼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거구의 사내는 독사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와 사내의 등장에 테스터들은 모두 그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다리는 동안 배들 좀 채우고 계셨나요?”
그녀는 테스터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치며 만찬장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공교롭게도 태조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태조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여기 마지막 테스터 분까지 오셨으니 이제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살포시 얹혀 있던 그녀의 손이 태조의 어깨를 보드랍게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