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레메게톤
*** < 현실과 신세계의 중간지점 > 선택의 방 ***
“72악마의 지배자 레메게톤?”
“그렇습니다.”
“레메게톤이 뭔데? 악마를 지배하는 직업인 거야?”
토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탁자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레메게톤이 뭐야? 괜히 차 마시지 말고 자세히 말해줘 봐.”
태조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토군을 재촉했다.
“목 좀 축이겠습니다. 계속 말하다 보니 목이 말라서.”
“그 속도면 목 축이는데 하루 종일 걸리겠다.”
토군은 계속된 재촉에 못 이기는 척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머~언 옛날, 신세계에 솔로몬이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토군이 입을 열었다.
“그 황제는 레메게톤, 즉 최상위 악마 72위를 사령하는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악마를 사령한다고?”
“예. 악마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악마라고 불리지만 그들도 한때 신세계에서 신으로 군림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포르투나라는 유일신을 믿는 자들이 유저들의 힘을 빌려 솔로몬 황제가 건국한 아라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솔로몬 황제의 후계자들에 의해 사령되고 있던 신들을 악마로 규정하기 전까지는 신이었던 겁니다. 악마들은 성격이 좀 괴팍한 놈들이긴 합니다만 능력 면에서는 신이라 불려도 무방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아~, 그럼 레메게톤이 그놈들을 지배하는 직업이네.”
토군이 화등잔만한 눈을 떴다.
“그렇습니다.”
“악마들을 어떻게 지배하는데?”
“솔로몬 황제는 악마들을 솔로몬의 작은 열쇠, 반지에 봉인했습니다. 아라한 제국의 후계자들도 자신의 능력을 물려받아 대대손손 제국을 유지하기를 바랐던 겁니다.”
“반지에 악마를 봉하고 솔로몬의 능력을 담았다는 거야? 악마를 사령하는 그 능력?”
“흠~. 언뜻 듣기에는 그렇게 들리지만 엄연히 다른 의미입니다.”
“뭐가 달라?”
태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로몬 황제의 능력은 악마를 사령하는 능력입니다.”
“어.”
“반지에 봉한 건 솔로몬 황제가 사령하는 악마입니다.”
“어. 그니까 솔로몬 황제가 자신이 사령하는 악마들을 반지에 봉했으니 반지를 가지면 반지의 소유자가 악마를 사령한다는 말 아니야?”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반지에는 악마만 봉한 겁니다. 악마를 사령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게티아라는 책에 적어놓았습니다. 사령하는 능력까지 반지에 부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따라서 반지는 악마를 부르는 소환 도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소환한 악마를 사령하는 건 게티아에 적힌 사령술을 이용해야 합니다.”
토군의 말은 한마디로 반지에는 72악마들이 봉인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반지만으로 악마를 사령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뭐야, 그럼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하면 반지하고 게티아를 주는 거야?”
“이 반지는 드립니다만 게티아는 사라졌습니다.”
어느새 토군의 복슬복슬한 손에 반지가 있었다. 빛바랜 붉은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였다.
“게티아가 사라졌다면 그 반지로 악마를 불러내도 악마가 내 말을 안 따른다는 말이네?”
“태조님 능력이 악마를 능가하면 위압적으로 악마를 사령할 수 있습니다만 최상위 악마들의 능력치가 평균 90 이상이니... 태조님 현재 능력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태조는 토군의 말에 깊이 수긍했다. 태조의 현재 능력치, [근력 10] [민첩 10] [지력 10] [체력 10] [매력 10.7] [행운 13]을 고려하면 악마를 지배한다는 건 택도 없는 소리였다.
“커다란 대가를 주고도 얻게 되는 능력이 불확실하다고 했던 게 이걸 말하는 거였네.”
“아직 대가는 말씀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대가가 뭔데?”
토군이 레메게톤 카드를 뒤집었다. 카드 뒷장에는 3가지가 적혀있었다.
[ 1. 악명
설명: 레메게톤은 신세계에서 공포, 두려움, 분노, 혐오를 상징합니다. 악마의 지배자라는 단어와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레메게톤이라고 알려질 경우 대부분의 NPC들에게 강한 반감을 얻습니다.
2.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설명: 악마를 부를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는 소환한 악마가 원하는 만큼 돈, 제물 등으로 주어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못할 시 악마가 소환자의 목숨을 원합니다. 생명 -1
3. 위대한 솔로몬의 후계자
설명: 신세계를 천하 통일한 유일한 황제 솔로몬의 후계자임으로 레벨업 시 능력치 포인트 +6 ]
카드 뒷면 내용을 읽던 태조의 눈이 맨 마지막 문구에 멈추었다.
“안 좋은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3번째는 좋은 거네.”
“예. 게티아가 사라진 점을 보충하기 위해 이점을 부여했습니다.”
능력치 포인트 +6,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보통은 레벨업 시 5 포인트가 지급되는데 무려 1포인트나 더 지급되는 것이었다. 이는 초반에는 별 차이가 없겠지만 후반에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주는 이점이었다.
“고렙이 될수록 확실히 강한 직업이네.”
“그렇습니다. 게임의 방에서 탈락하지 않고, 생명도 0이 되지 않으며, 퀘스트도 차근차근 진행해 고렙까지 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고렙까지 갈 수 있다면...”
“그때서야 빛을 발하는 직업이 됩니다. 악마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다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마음대로 사령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토군이 잘근잘근 전제조건을 씹어주었다.
“레메게톤에 대한 자잘한 설명이 더 있긴 하지만 이정도만 설명해 드려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어. 충분해.”
“그럼 레메게톤을 직업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
태조는 고뇌에 빠졌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리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능력치 포인트가 +6이라는 것만 빼면 고렙이 되기 전까지 무직이나 다름없었다. 악마를 불러도 부릴 수가 없지 않은가. 설령 부린다 하더라도 악마가 원하는 대가를 지불해 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악마가 터무니없는 대가를 요구하면 영락없이 모가지를 내밀어야 했다.
“레메게톤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다른 직업을 설명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다른 직업들도 좋은 게 많습니다.”
“어...”
미련은 남았지만 일단 다른 직업을 들어보기로 했다. 더 좋은 직업이 있을 테니까.
*** < 현실과 신세계의 중간지점 > 선택의 방 ***
“이제 선택하실 시간입니다.”
“......”
“태조님은 적합도 70% 이상의 직업 25개를 모두 들으셨습니다.”
“하~.”
태조는 한숨만 나왔다. 레메게톤 직업을 들은 후 오히려 다른 직업에 대한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메게톤 카드가 태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도박을 하면 돈을 잃는다는 걸 알면서도 도박을 하기 위해 이유를 지어내듯이,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담배를 필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만들어내듯이, 레메게톤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러지... 저 직업이 대체 뭐길래...’
태조가 선택을 안 하고 있자 토군이 태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직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선택하자니 걱정되고 고민스러우시겠습니다.”
“어.”
“왜 그 직업에 끌리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토군이 태조의 찻잔을 가리키며 차를 권했다. 태조는 무심결에 찻잔에 남은 차를 다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이 카드를 본 후로 뭐에 홀린 것처럼 이 직업에 끌려. 너 방에 있던 문에서도 이 문양을 봤거든. 그 문양이 이 카드의 문양을 볼 때마다 떠올라. 이유를 모르겠어. 직업하나 고르는데 왜 이러는지...”
“흠. 제 방에 있던 문에서도 이 문양을 보셨다 이 말씀입니까?”
“어.”
문에서 문양을 봤다는 말에 토군이 팔짱을 끼었다. 입은 씰룩쌜룩였다. 뭔가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태조님과 이 직업의 적합도는 100%입니다.”
토군이 고민하던 말을 꺼냈다.
“100%? 아까는 얼마 안 된다며?”
“이 직업 말고 다른 걸 추천해 드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태조님의 우승을 위해. 하지만 제 방에 있던 문에서 이 문양이 나왔다면 그 끌림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문에서 나온 문양이 어쨌는데?”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던 불길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그 문은 신세계로 처음 발을 들여놓는 유저의 과거, 현재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미래 상황을 종합해 문양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신세계: 혁명의 시작> 이전 버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 중 일부는 그 문양을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 문양은 레메게톤 직업 카드 문양하고 일치하는 거네.”
“예. 태조님은 레메게톤으로 플레이할 운명인 것 같습니다.”
운명이라는 말에 태조가 피식 웃었다. 게임에서 운명이라니.
“운명이란 말을 너무 거창하게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해 행동합니다. 그 끌림을 감정이라 하기도 하고, 운명이라 하기도 하고, 팔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부르는 용어 중 하나를 쓴 것뿐입니다. 다만, 그 끌림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태조님도 어쩔 수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레메게톤보다 더 좋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성적으로 선택해야지 옳은 거잖아. 100억이 달린 게임인데...”
“인간의 이성이란 끌림에 의해 행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은 그 도구를 쓸 시간입니다. 태조님은 결국 레메게톤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지금 선택을 안 한다면 나중에라도 운명처럼 만나게 됩니다.”
“나중에 만난다...”
“예. 만약 지금이 아닌 나중에 만나면 비극적인 상황에서 만나게 될 겁니다.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토군이 반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태조가 반지를 바라보았다.
“기왕 피할 수 없으니 지금 선택하라는 말이야?”
“예. 신세계 시스템이 현실을 모티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레메게톤 문양을 제 방, 문에서 봤다면 말입니다.”
태조와 토군의 눈이 마주쳤다.
“정말, 이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거야?”
“예.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태조님을 위해 제가 저렙 때도 악마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보겠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을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입니다.”
“그 길의 끝이 낭떠러지면?”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제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낭떠러지면?”
“떨어지면서 저를 욕하시면 됩니다. 합리화할 핑계거리가 필요할 테니 말입니다.”
토군이 자신감 있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에 태조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인한 선택, 그 선택에 대한 합리화가 필요했는데 토군이 나서줬다. 악마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태조는 탁자 위에 있던 솔로몬의 작은 열쇠, 반지를 과감히 움켜쥐었다.
“좋아 토군. 도우미인 너를 믿고 가보지.”
“예. 그런 의미에서 바지를 좀 벗어도 되겠습니까?”
“개수작 부리지 마라.”
“안타깝습니다.”
태조가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었다. 신세계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갈팡질팡하던 불안한 마음은 사라졌다. 적합도 100% 직업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효과인 듯싶었다.
[‘백수 탈출’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블러드 포인트가 10 증가합니다.]
퀘스트도 깼다.
“자, 이제 만찬장으로 가볼까? 32명의 경쟁자들 만나봐야지.”
태조가 자신 있게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지를 벗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은 토군이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럼 만찬장으로 가는 문......”
태조는 막상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망설였다. 선택의 방을 빠져나가는 출입구를 모르니까.
“토군.”
“예?”
“근데 어디로 나가는 거냐?”
토군이 태조를 쓰윽 훑어보았다. 당연히 태조의 물건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
“일단 옷부터 입고 나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도 만찬장에 갈 때는 격식을 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풀려져 있던 토군의 허리띠가 어느새 단정히 묶여있었다.
“문명인으로서 예의는 갖춰야 한다 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변태 취급 받습니다. 우리 둘만 있는 시간에는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이, 이건 뭐지... 내가 갑자기 변태가 된 기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