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접속(2)
*** < 현실과 신세계의 중간지점 > 도우미의 방과 욕망의 복도 ***
유태조는 칵테일바 후문을 열고 여인을 따라갔다. 현실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여인이 자신과 섹스를 하자고 하는 바람에 몸과 마음이 잔뜩 달아오른 상태였다. 물론 바텐더가 한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엔젤스 키스를 마시고 천사 같은 여인이 키스를 했던 것으로 보아 데블스 섹스의 의미도 맞을 것 같았다. NPC에 불과한 바텐더가 칵테일 의미를 지어낼 리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데블스 섹스도 뭐, 악마 같이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더욱이 이곳은 가상현실이니까.
‘밤일은 악마 같은 게 좋다고 하던데.’
경험은 없지만 감방 수감자들이 음담패설로 지껄이던 영웅담을 자주 엿들은 유태조의 머릿속에 그녀와 화끈하게 놀아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한 잔 더 마시고 마음의 준비 다 되면 따라와. 모두 오빠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인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도 떠올랐다. 모두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보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되면이란 말이 왠지 모르게 깊숙이 와 닿았다.
‘마음의 준비 다 됐으니, 할 수 있어!’
유태조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여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흥분한 유태조가 칵테일바 후문을 열고 나가 처음 마주한 건, 작은 방과 들어온 문 맞은편에 있는 또 다른 문이었다. 작은 방에는 한쪽 벽면에 큼지막한 액자가 걸려있었다. 액자에는 그림이 있었다. 중절모를 쓴 토끼가 은빛 회중시계를 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액자 밑으로는 조그마한 서랍장도 있었다. 그것 말고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방이었다. 맞은편에 있는 문 역시 평범하게 생긴 나무문이었다. 문 테두리에 기괴한 글씨들이 잔뜩 적혀있다는 것만 빼면...
‘그녀가 저 문으로 나갔겠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문이 하나뿐인지라 유태조는 기괴한 글씨들이 잔뜩 적혀있는 문으로 곧장 향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유태조가 문고리를 잡자, 문 테두리의 오른쪽 상단 글자부터 차례대로 파도타기 하듯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에 새겨진 모든 글자가 붉은빛을 전부 발하자, 붉은빛이 소용돌이치듯 문 중앙으로 모이며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냈다. 붉은빛이 만들어낸 문양은 뒤집어진 오각별과 그 별 안에 있는 성난 염소 얼굴이었다.
“철컥!”
문양이 다 완성되자 곧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신기하고도 좀 괴상한 광경이었지만 유태조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서둘러 문을 열었다. 어차피 스타팅 포인트는 캐릭터를 만드는 곳이라 위험요소도 없을 테고, 그녀와 한바탕 놀아나고 싶기에 이런저런 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태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긴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다.’
그 복도 끝에 있는 문에 유태조가 찾던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문 안으로 반쯤 몸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어~! 오빠 왔네.”
여인은 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유태조가 따라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는 유태조와 얼마간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번들번들 빛을 냈다. 멀리 있었지만 유태조는 그녀의 눈빛에 흠뻑 빨려 들어가는 착각 속에 빠졌다.
그렇게 유태조를 한없이 빨아들이던 그녀의 눈빛이 유태조에게 윙크를 보냈다. 유태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미 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후였다.
유태조는 그녀가 들어간 문으로 걸어갔다. 그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복도 쪽으로 그녀의 손이 무언가를 들고 불쑥 튀어 나왔다. 그녀의 손은 이내 그 무언가를 휙 던졌다. 유태조는 그녀가 던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원피스!’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원피스가 하늘하늘 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빠~ 빨리 와~.”
문밖으로 얼굴만 내민 그녀가 유태조에게 손 키스를 보내며 말했다. 열린 문틈으로 얼굴만 내밀고 있는 지라 그녀의 가려진 몸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태조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녀의 S라인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바텐더 말이 사실인가 봐!’
그녀의 아찔한 유혹에 확신에 찬 유태조는 성큼성큼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 키스를 날린 후 반대편 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저 문 너머에 그녀가 있어.’
유태조는 그녀만을 생각하며 기나긴 복도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복도 양 옆 벽에 중절모를 쓴 토끼가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부하는 기기괴괴한 그림들이 걸려있었지만 유태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들어간 문으로 향할수록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고, 시선이 높아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까슬까슬하던 수감복의 감촉도 말끔히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 홀가분했다.
‘기분 탓이겠지.’
이상했지만 기분 탓이라 여기며 반대편 문까지 곧장 걸어갔다.
*** < 현실과 신세계의 중간지점 > 거울의 방 ***
문 앞에 도착한 유태조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 안은 어두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있다는 생각에 서슴없이 들어갔다. 유태조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왔다.
유태조는 어둠이 가져다가 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명 스위치 누르는 소리와 함께 하얀 빛이 나타나 어둠을 일순간에 몰아냈다.
유태조는 갑작스런 밝은 빛에 눈을 찌푸리며 적응시간을 가졌다. 빛에 적응하는 시간에도 욕망에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그녀를 찾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다.
“어? 아무도 없잖아.”
적응을 마친 눈에 들어온 것은 첫 번째 방보다 약간 넓은 방이었다. 이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흔하디 흔한 의자와 책상도 없었다. 들어온 문 맞은편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나무문만 달랑 있었다.
‘하~. 저 너머에는 있겠지.’
얌전히 기다리지 않고 어디론가 자신을 계속 이끄는 그녀의 행동에 애를 태우며 문으로 향했다.
‘뭐지?’
문으로 향하던 유태조 앞으로 무언가가 바닥에서 불쑥 솟아났다. 바닥에서 솟아난 무언가는 타원형 모양의 전신 거울이었다. 뜬금없이 솟아나 조금 놀라긴 했지만 거울이 바닥에서 솟아난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거울에 비친 유태조의 모습이었다.
29년 동안 보았지만 적응하기 힘들었던 추한 외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꽃미남이라 불러도 무방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남성이 대신하고 있었다. 키도 185cm는 훌쩍 뛰어넘었다. 곰보 투성이였던 피부는 잘 익은 앵두같이 탱탱했다. 몸에는 오밀조밀한 잔근육이 있었다. 유태조가 꿈꿔왔던 외모 그 이상이었다.
- 테스터 유태조의 캐릭터를 생성합니다. -
거울에 비친 수려한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던 유태조의 귓가에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유태조는 기계음이 들려오는 곳을 찾아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어느 샌가 아무것도 없던 방은 거울들로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벽마저 통째로 거울로 변해 있었다.
- 현재의 모습은 유태조씨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외모를 그대로 구현한 것입니다. 이 외모로 신세계에서 플레이 하시겠습니까? -
기계음이 물어왔다. 유태조는 모든 거울이 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전 처음으로 외모에 대해 만족했다. 그녀와 이 모습으로 하는 생각까지 들자 괜스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당연하지.”
- 신세계에서 쓰실 가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
“태조?”
여인이 태조 오빠라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지라 성만 빼고 태조로 지었다.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괜히 거창하게 지으면 유치하니까.
- 기초적인 사항을 결정하였으므로 테스터 태조의 상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기계음이 끝나자 전신 거울에 파란 글자들이 나타났다.
[ 태조 ]
-. 레벨: 1 (0/100 EXP)
-. 생명: 10 / 10
-. HP: 30 / 30
-. MP: 20 / 20
-. 공격력: 10
-. 방어력: 0
-. 회피력: 5
-. 능력치: [근력 10] [민첩 10] [지력 10] [체력 10] [매력 10.7] [행운 13]
‣ 잔여 능력치 포인트: 0
-. 블러드 포인트: 0
생명이 10개 생기고, 매력과 행운이 증가한 게 눈에 띄었다. 나머지 부분은 가이드북에서 봤던 기본적인 내용들이라 태조는 대충 훑어보았다. 그저 빨리 이 과정을 끝내고 여인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 붙잡지 못하면 영원히 달아나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레벨 올리는 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원하십니까? -
“아니.”
- 생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원하십니까? -
“아니.”
- 각 능력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원하십니까? -
“아니.”
- 잔여 능력치 포인ㅌㅡ...-
“아니.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끝내.”
그래서 기계음이 친절히 설명해주려는 내용들을 모두 건너뛰었다.
- 신세계를 플레이함에 있어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설명이 남아 있는데 모두 생략하시겠습니까? -
“응. 다 필요 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태조는 외모도 변하고 게임처럼 능력치도 보이자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에 와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며 왠지 모를 근자감을 얻었다.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인터넷공간에서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는 키보드 워리어들이 느끼는 근자감 같은 것이랄까.
- 정말이십니까? -
“어. 바쁘니까 빨리 끝내.”
태조는 자신감이 붙은 말투로 기계음에게 명령했다. 방이 온통 거울로 변해버린 상황이라 나가고 싶어도 나갈 문이 없었다.
- 정말로 끝내시겠습니까? 아직 남은 과저ㅇ.... -
“아 진짜, 끝내라고 몇 번을 말해? 말귀 못 알아먹어?”
- ...... 알겠습니다. -
기계음은 끝까지 상투적인 친절함이 묻은 말투로 답했다.
- 거울의 방을 종료합니다. -
이윽고 전신 거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 크기만하던 금은 나뭇가지 크기만큼 벌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전신 거울은 이내 산산조각 났다. 뒤따라 방 안에 있던 거울들도 깨졌다. 벽을 덮고 있던 거울도 깨졌다. 한 번 깨지기 시작한 거울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원자 단위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깨졌다.
“요란스럽게도 만들었네.”
태조는 투덜투덜 거리며 원래대로 돌아온 방을 가로질러 그녀가 들어갔음직한 문으로 향했다.
“이 문 밖에도 없어봐. 잡히면 혼내줄 거야.”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태조는 문을 열고 나갔다. 상상 그 이상을 기대하며.
태조가 나가자 방 안은 익숙한 어둠으로 둘러싸였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며 한줄기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 태조를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