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차경현은 돌아오자마자 내 방문을 두드렸다. 덕분에 지금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무슨 일이세요?”
“별일 없으셨죠?”
내 몰골에 웃음을 터트리곤 차경현이 물었다.
“네.”
아침부터 남의 방문을 두드리는 건 무슨 경우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차경현을 쳐다봤다.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는 그대로였다.
“재훈이한테 준 약이 아주 잘 맞나봐요.”
인상을 찡그리든 말든 차경현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한번도 늦잠을 잔적이 없는 애인데, 늦잠을 다 자네요.”
그걸 왜 굳이 이 아침에 나한테 말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할 일을 김선생이 줄여주고 있다는 거 아세요?”
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야, 이렇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면 눈치가 보여서 그만 말할 법도 한데 차경현은 좀처럼 떠날 생각을 안했다.
“근데 난 내가 할 일 뺐는거 별로거든요.”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고 말하던 차경현이 웃음을 거뒀다.
“우리 각자 할 일만 해요.”
알 수 없는 말을 다 뱉고 나서야 차경현이 뒤를 돌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차경현의 일방적인 대화였다.
이참에 나도 늦잠 한번 자보나 했더니, 병원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제대로 맞이한 주말이었다. 동시에 학교를 다니고 처음으로 맞는 주말이기도 했다.
똑똑-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이번엔 나도 할 말 해야지.
“놀자.”
단단히 마음을 먹고 문을 열었는데 차경현이 아니었다. 꽤 비장한 표정으로 전혀 안어울리는 말을 하는 차재훈이 내 앞에 있었다.
“뭐?”
“놀자고.”
황당해져 내가 되묻자 뭐가 그렇게 웃긴지 차재훈이 곧 숨겨둔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제 약을 다시 제조했어했다. 차재훈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감정 기복이 부작용 같았다.
“씻고 나와. 기다릴게.”
멍하니 차재훈을 쳐다보던 나를 방문으로 굳이 밀어 넣고는 친절하게 문을 닫았다. 대체 저게 왜 저래. 다시 문을 열려다가 내가 여태껏 봐온 차재훈의 고집으로는 내가 씻고 나올 때까지 앞의 상황을 반복할게 뻔했다.
* * *
준비하고 나오자 2층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차재훈이 몸을 일으켰다.
“가자.”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이 집은 자기 할 말만 하는게 집안 내력인가. 고개를 저으며 나도 차재훈을 따라 내려갔다.
“야, 어디 가는데?”
차재훈은 앞만 보고 걷는 중이었다. 오늘 차재훈은 예전보다 더 이상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걷던 걸음을 멈추고 차재훈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지금 갈 곳도 없이 그냥 걸었다는거야?
“야, 너 어디 갈지...”
“없으면 그냥 내가 가고 싶은데 가자.”
그러더니 다시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는다. 얼씨구 고개까지 숙였다. 누가 보면 딱 부끄러워서 어쩔줄 모르는 남자애 같았다.
“대신 운전은 네가 해줘.”
그러더니 차키를 내게 건넸다.
“그럼 네가 하게?”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차재훈을 스쳐 걸었다.
“내가 하면 좋겠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차재훈을 무시하고 차에 올라탔다.
“내가 준 약 일단, 먹지마.”
“왜? 먹으라고 난리더니.”
“부작용이 있는 거 같아, 감정 기복.”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내 말에 차재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약 안먹었어...”
말끝을 흘리며 말하는 차재훈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차피 잘 챙겨 먹을거라고 생각은 안했지만.
“근데 갑자기 왜 이래?”
약도 안먹었는데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미쳤나보지.”
차재훈의 대답에 묘하게 수긍이 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재훈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하지마.”
“너라면 인정 안하겠어?”
이번엔 차재훈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건 우리 둘 다 좀 이상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어디 갈 건데.”
“한강 가자.”
“한강?”
갑자기? 이 아침에 한강을 가? 내가 놀라며 묻자 차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안 가봤어.”
“안 가봤다고??”
놀라서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아홉 살에 한국을 떠난 나도 가본 한강이었는데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애가 한강을 안가봤다고?
“찬 바람은 안 좋다고 해서 밖에 잘 안 다녔어.”
차재훈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
“누가?”
“형이.”
순간 입에서 욕이 맴돌았다. 별 뭐 같은 이유를 다 들먹이며 차재훈을 가둬놨구나. 싶었다.
“찬바람 맞아도 돼, 여기가 시베리아도 아니고.”
“그래도 형이...”
“찬바람 그거 맞는다고 너 안 죽어.”
관찰하듯 느리게 차재훈을 훑어봤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지금도 느껴졌다. 차경현은 차재훈에게 단순히 형의 존재가 아니었다.
* * *
꽤 이른 시간이었는데 좋은 날씨 덕인지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돗자리 사 올게.”
각자 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재훈이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냥 저기 앉자.”
한강에서 꽤 떨어진 벤치를 가리키는 나를 보고 차재훈이 잠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뭐 어떤가 바람맞고 강보고 사람 구경하면 되는 거지.
벤치에 앉은 우리 둘 앞으로 커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연인의 모습이 보였다. 좋을 때다 싶다가도 나는 그런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재훈의 눈이 그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함께 노래를 듣거나,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연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차재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차재훈.”
“응?”
“약, 계속 안 먹을 거야?”
차재훈이 시선을 거두고 나를 쳐다봤다.
“아니, 먹을게.”
잔뜩 기죽은 목소리와 표정이라 더 이상 물어보기가 그랬다. 이상하게 이번엔 정말 먹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형은 언제부터 같이 살았어? 다섯 살 때?”
“응, 내가 콜드병인거 알게 됐을 때 그때부터.”
“그리고 그때부터 주치의였어?”
“응, 왜?”
“형이랑 많이 친하네. 보통 이복형제는 사이 안 좋은 거 아닌가?”
내 말에 차재훈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한테 형은.”
재훈이 잠시 경현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냥 따뜻한 사람이야.”
조용히 차재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알아?”
차재훈이 씁쓸한 듯 웃었다.
“너는 불량품이야.”
천천히 차재훈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씁쓸한 표정으로 차재훈이 말을 이었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섯 살 때, 정확히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몸이 이렇게 차가워졌어.”
차재훈의 시선이 왼쪽 손목시계로 향했다.
“엄마가 나한테 너 같은 걸 낳은 내가 혐오스럽다고 하더라, 나는 그래서 내가 싫었어.”
물끄러미 차재훈이 쳐다보고 있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조심스럽게 차재훈의 손목을 잡았다. 시계로 가려진 손목 언저리에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이제는 흐릿해질 때로 흐릿해진 상처에 차재훈이 다급하게 손을 빼며 뒤로 숨겼다.
“지금은 괜찮아.”
차재훈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나를 쳐다봤다.
“불쌍하게 보지마.”
차재훈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불쌍하게 보는 거 아니야, 그냥...”
머릿속에서 적당한 단어를 찾고 있었다, 아니라고 불쌍하게 쳐다본거 아니라고 말해야 했는데 지만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
나는 차재훈을 불쌍하게 쳐다본 게 맞았다.
“더 얘기 듣고 싶어.”
“싫어.”
차재훈이 여전히 아랫입술을 깨문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또 불쌍하게 볼 거잖아.”
투정 어린 말이 들렸다.
“듣고 나면 이해할 거 같아서 그래.”
나도 차재훈을 불쌍하게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세히 알아야했다. 차경현과 차재훈의 이야기를, 더 나아가 차재훈의 이야기를. 차재훈이 애꿎은 발을 바닥에 툭툭, 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