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차경현이 다리를 꼬으며 나를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더라고요,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집도 직장도 없는 상태라.”
내 말에 차경현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태도가 변하신거구나, 생각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
싱긋, 웃으며 일어난 차경현이 내 뒤로와 문을 열었다. 나가라는 뜻이었는데, 나는 오히려 성큼 걸어가 차경현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이 약 말고 또 만든 약 있어요?”
당연히 있겠지. 알면서 물어본거다. 차경현이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해서.
“있죠, 당연히. 저도 나름 영재 소리 들었거든요. 뭐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잘 해봐요.”
차경현이 웃으며 다시 문을 닫았다.
“차경현씨는 나한테 왜 들어오지 말라고한거에요?”
차경현이 여전히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훈이가 경계심이 심한 편이에요, 그리고 회장님께서도 워낙에 불같은 성격이시고... 세영씨가 들어오면 다시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서, 그래서 싫었어요.”
철저하게 자신은 배재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얘기해 봤자 기운만 빠질 것 같았다.
“약 만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네.”
차경현이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언제든지.”
“네. 먼저 차재훈 진료기록이랑 일지 좀 주세요.”
“잠시만요.”
차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한켠으로 연구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첨단 장비들이 보였다. 몰래 쳐다보다 두꺼운 파일 두 개를 들고 나오는 차경현을 보며 눈을 돌렸다.
“기록이 좀 되요, 10년치 분량이라.”
“확진을 9살 때 받은건가요? 그때부터 쭉, 차경현씨가 주치의였어요?”
“네.”
차경현의 말대로 분량이 꽤 많았다. 진료기록 보다 일지의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말이 일지였지 거의 차경현의 9살 때부터의 기록이었으니 육아일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경현씨가 거의 키웠네요.”
가볍게 파일을 들쳐보며 말하자 차경현이 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뭐.”
분량이 꽤 막막할 정도로 많아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계약서는 내일 김비서님이 가져다 드릴거고, 교복은 방에 있어요.”
“네? 교복이요?”
순간 무슨 소리인가했다. 교복이라니, 무슨 갑자기 교복이 왜 나오지?
“내일부터 재훈이랑 같이 학교 다니셔야하는데...”
“학교요?”
눈이 튀어나올뻔했다. 학교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놀라셨죠? 재훈이가 대학생만 되도 좋았을텐데.”
“아니, 무슨 소리에요?”
내가 잘못들었나 싶어서 목소리가 커졌다. 되묻는 나의 물음에 차경현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재훈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같은 반 학생이 제일 자연스럽게 재훈이 옆에서 케어할 수 있어서.”
“아니 무슨,”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학교라니, 학교를 다니라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아뇨, 저기요, 제가 주치의를 한다고 했지, 차재훈 학생 친구가 된다고는 말 안했는데요? 그리고 저, 스물여덟이에요.”
“알아요.”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내 마음과는 달리 차경현은 여전히 싱긋 웃고 있었다.
“아시면 더 못하죠, 저 고등학교 졸업한지 8년 됐어요. 무슨 교복을 말도 안돼요. 학생이라니 무슨 그게 말도 안되는, 학교가 우스워요? 졸업한지 8년 되고 이미 의사자격증까지 있는데...”
“우스워요.”
차경현이 눈까지 접어가며 웃음을 지었다.
“차회장님은.”
몇 글자 아닌 단어에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차회장은 하루 아침에 자신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에 학생을 넣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학생은 좀 심하잖아.
“아, 그래도 아닌 거 같아요.”
내가 질색하자 한번 더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못하겠다고 말하고 나가도 돼요.”
이게, 진짜... 속으로 이죽거리는 나를 보고 차경현이 웃음을 지었다.
“언제든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못하시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말을 이때 쓰는구나 싶었다.
“차라리 교사로 하죠.”
학교에 학생만 있는 건 아니니까. 교복만큼은 절대 입고 싶지 않았다.
“안돼요.”
“아, 뭐 다 안된데.”
차경현이 소리 내며 웃었다. 아주 재미있어 죽겠나보지? 아, 그냥 오지 말걸 그랬나보다.
“어떻게든 소문이 날거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연스러운 케어가 목적이기 때문에 같은 반 친구가 가장 좋아요.”
하, 미치겠다, 정말.
“내일부터 등교, 못 하시겠어요?”
차경현 일부러 등교에 힘주어서 말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까, 열받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합니다, 해요. 까라면 까는거지.”
내 말에 차경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파일은 좀 무거우실 것 같은데 제가 방까지 들어드릴게요.”
여태까지의 깐죽거림을 무마하려는 건지 친절을 베푸는 그가 어느때보다 더 얄미웠다.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그래요, 그럼. 나가서 오른쪽 방 쓰시면 됩니다.”
내 말에 차경현이 싱긋, 웃더니 내 손위로 파일을 올렸다. 무겁긴했지만 못들 정도는 아니었다. 차경현이 문을 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하세요. 내일 학교도 가야하는데.”
아주 끝까지, 제대로 얄밉다. 나도 모르게 차경현을 째려봤다. 문이 탁, 닫히고 바로 옆방으로 들어왔다.
방은 차경현의 방과 똑같은 구조였다. 널직한 침대와 바로 옆의 큰 창과 창 앞의 테이블까지. 불도 켜지 않은 채 걸어가 테이블 위에 파일을 올려뒀다.
“미친.”
뒤를 돌자 문 앞에 걸려둔 교복이 보였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교복으로 향했다. 교복 중앙에 자리 잡은 리본이 너무 컸다. 심지어 빨간색이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입으라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치마는 또 왜 이렇게 작아 안맞는거 아니야?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테이블 위에 가방까지 올려둔 걸 보니 나빼고 이 집안 사람들은 스물여덟인 내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게 될 거란걸 알고 있었나보다.
갑자기 잠을 자기가 두려웠다. 내일이 되면 나는 이 빨간색 리본이 커다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야했다. 이게 무슨일이냐고 대체. 머리는 지끈거리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 * *
큰 창으로 햇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쓸데없이 너무 많은 햇빛이었다. 잠을 잘 자긴 했는데 저절로 문에 걸린 교복으로 눈이 돌아갔다.
“진짜 입어야하는건가.”
다시 벌러덩 누워 잠이 들고 싶었다.
“안깼으면 좋겠다.”
이불을 다시 덮었다. 그냥 이대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 교복을 입고 학교를 어떻게 가냐고.
똑똑-
정신차리라는 듯 타이밍 좋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일어나셨어요?”
처음 듣는 메이드의 목소리였다. 일어나서 문을 열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메이드 김은영입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시길래 나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김세영입니다.”
“앞으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다른 메이드들과는 다르게 명찰까지 달고 있었다.
“네.”
“아침 식사하시러 내려오세요.”
“지금요?”
“식사를 일찍 하는 편이라서요. 씻고 내려오시면 됩니다.”
김은영씨가 고개를 가볍게 다시 숙이며 뒤돌았다. 아침이라니, 몇 년만에 먹는 아침식사였다. 대충 세수를 하고 내려가니 이미 1층에 모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부엌의 중심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식탁에 빽빽하게 놓인 반찬들을 보고 입이 헉, 하고 벌어 질 뻔했다. 이 시간에 이만큼 준비하려면 대체 몇시에 일어나야하는거야.
나도 모르게 식탁 옆에 서 있는 메이드분들을 쳐다봤다.
“아침 잘 안 먹어요. 내일부터는 제 건 안 차리셔도 돼요.”
내 말에 한가운데에 앉은 차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어야지. 이제 다 한 가족 아니니?”
‘가족은 무슨.’
회장의 말에 숟가락도 들지 않고 표정을 잔뜩 이죽거리고 있는데 내 앞에 앉은 차재훈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교복은 마음에 드니?”
“아....”
경악으로 변한 내 얼굴을 보고 차재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재훈이 잘 부탁해요, 세영씨.”
으, 소름돋았다. 도저히 표정을 숨길수가 없어서 일단 고개를 쳐박고 밥을 한숟가락 떴다.
“역겹네 진짜.”
차재훈의 옆에 앉은 여자가 작게 혼잣말을 뱉었지만 정적의 틈에서 꽤 크게 들렸다. 고개를 들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아랫입술을 짓누르며 깨물고 있었다.
“어? 속 안 좋으세요? 이따 약 챙겨드릴게요.”
차경현이 싱긋, 웃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저 웃음에 여자의 속이 더 뒤집었을 것 같았다. 내가 안다 저 웃음을 보면 얼마나 열이 받는지.
“됐다.”
싱긋, 웃는 경현을 보며 미정이 깨물던 입술에서 힘을 빼고 대답했다. 딱딱하게 굳은 여자가 경멸의 눈빛으로 차경현을 쳐다봤다.
“언제든 말씀하세요.”
정말 지치지도 않고 여러 사람 속 긁는다.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아침을 챙겨먹어서 그런가 속이얹힌 기분이 들었다.
“야.”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나를 차재훈이 불렀다.
“너 이 방 쓰냐?”
이게 지난번부터 반말이네.
“어.”
살짝 열린 문을 다시 닫더니 내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차경현의 맞은 편 방을 가리켰다.
“저 방 써.”
“왜?”
미간을 찡그린 차재훈을 올려다 봤다. 쓸데없이 키가 컸다. 나를 내려다보더니 팔짱을 끼고 아예 문앞을 막아섰다.
“이 방 내 방이야.”
“네 물건 하나도 없던데? 내 방이라고 설명 들었고.”
“됐고, 저 방 안 쓸거면 나가.”
헛웃음이 나왔다.
“야, 이미 너희 아버지랑 다 끝낸 얘기야.”
차재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문을 막고 선 차재훈이 더 커보였다. 제 딴에는 위협을 하겠다고 무서운 표정을 지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냥 이 모든 것도 다 허세처럼 느껴졌다.
“너나 나나 선택권 없는데, 괜히 힘쓰지 말자.”
차재훈을 밀었다. 살짝 밀어서는 꿈쩍도 안할 것 같아서 있는 힘을 다해 세게 밀었다. 차재훈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너, 자꾸 반말하지마라.”
어이없는 듯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차재훈을 한번 째려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교복에 다시 한숨이 나왔다.
* * *
결국 입었다. 교복, 몇 년만에 입는 치마도 불편했고 상의로 입은 셔츠도 불편했다. 그리고 가장 불편한 건 이 커다란 빨간색 리본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못 나가, 절대 못 나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절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게 어딜봐서 고등학생이냐고, 머리라도 묶으면 좀 고등학생처럼 보이려나... 하나로 묶은 머리가 달랑달랑 거리며 등에 닿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출발하려고하는데.”
곧이어 들리는 차경현의 목소리에 질끈 눈을 감았다. 아,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걸까. 한숨을 푹, 내쉬고 가방을 둘러맸다.
문을 열고 나오자 방문 바로 앞에 차경현이 서 있었다. 동그란 뒷통수의 차재훈도 보였다.
두 사람을 보자마자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아니, 그냥 쥐가 되고싶었다. 나라는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차재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 돌아보지마, 보지마, 속으로 다급하게 외쳐도 차재훈은 뒤를 돌아봤다. 곧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차재훈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