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나가라는 원장의 말에 억울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회장님 뜻대로 해. 그럼 없었던 일로 해줄테니...”
그놈의 회장, 자꾸 언급되는 그 양반과 더 더욱 엮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네, 이딴 병원 저도 마음에 안듭니다.”
“뭐?”
“지금 보고 있는 환자만 인계하고 바로 그만두겠습니다.”
“아니, 됐어. 당장 나가.”
원장이 침을 튀어가며 말했다. 적잖이 화가난것같은데 화낼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그럼에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환자 인계만 하겠습니다.”
“다 필요 없고 당장 나가라고!!”
더는 못 참겠다.
“뭐 이런 개 같은.”
“뭐?”
“의사로써 책임감 같은 건 없어요?”
“야!!”
“갑자기 담당의가 바뀌면 환자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원장의 눈에서 불이 나올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출세 욕심이요? 그게 원장님처럼 되는거라면 출세 안하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원장실 문을 열었다. 닫힌 문뒤로 원장의 분노의 절규가 들렸다. 괜히 그 소리 들으니까 이긴 기분이 들고 좋았다. 한발자국 걷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쩌면 허세는 교복을 입은 차재훈이 아니라 내가 부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됐어, 이딴 병원.”
떨리는 다리에 조금 더 힘을 주고 한발자국 걸었다. 내가 그만두는거다, 잘리는게 아니라 내가.
* * *
“김세영 결국 병원 나간다며.”
식당에 밥 먹으러 왔는데 이미 먹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내 이름이 들린다. 오늘 반찬은 나인가보다.
“김세영?”
아, 식판을 받고 자리에 앉아 이제 밥 한숟가락 떴는데 선배가 또 아는척을 해온다. 아까 그렇게 소리질렀으면 됐지, 왜 또 아는척이야. 무시하고 입에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너 잘렸다며?”
“잘린게 아니라, 그만 둔겁니다.”
“어휴, 꼴에 자존심은 있냐? 아니 그러게 왜 치기를 부려, 교수님이 너 예뻐해 준 건데 뺨은 왜 때리냐고.”
“선배는 저 왜 때렸습니까?”
“야 그야 네가 버릇없게.”
“제가 선배 좀 예뻐해 줄까요?”
선배의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야, 너 앞으로 의사 안할거야?”
“아뇨, 제 천직입니다만.”
“너 이 바닥에 소문 다 놨어. 너 받아주는 병원 있을 것 같아?”
“선배.”
“어?”
“숟가락으로 맞아 보셨습니까?”
순간 벙찐, 선배의 얼굴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이 숟가락을 그대로 얼굴에 박아버리고 싶었다. 물론 그냥 희망사항이었다. 실행에 옮기는 순간 나는 차회장과 똑같은 사람이 될테니까.
“밥이나 드십쇼.”
나는 놀라서 입을 벌린 선배의 입속으로 숟가락을 그대로 집어 넣었다. 짜증나서 좀 밀 듯이 넣었더니 이와 부딪혀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선배가 아파하며 인상을 구겼다.
그대로 식판을 들고 일어나는 내 뒤로 시끄럽게 중얼거리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실에 들어서자 후배가 울상이 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얘기 들었어? 괜찮아.”
“선배.”
“그만 두는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내 말에 후배가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바로 나가래요. 인계고 뭐고 필요없다고, 아, 진짜 너무 한거 아니에요?”
원장이 화가 단단히 나긴 했나보다.
“뭐 어쩔 수 없지, 한분한분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선배. 아, 지금이라도 어떻게 잘못했다고 하면.”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크게 질렀어.”
“아.”
후배의 탄식이 들렸다.
“그래도 속은 시원해 할말은 다해서, 내가 논개처럼 한교수를 데리고 떠났어야했는데 그게 좀 아쉽다.”
“아, 선배!”
“나중에 밥먹자 연정아.”
“네... 선배 조심히 가세요.”
여전히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연정이가 말했다. 날이 밝디 밝았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우울한 마음보다는 후련했다.
“이력서나 써야겠다.”
오늘 하루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 * *
징- 바지 뒷주머니에 둔 핸드폰이 울었다. 병원을 제외하고는 내게 연락할 곳이라고는 보험사나 각종 광고 스팸 전화 뿐이었다. 낯선 전화에 아무 망설임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끊겨지고 곧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차경현입니다.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언제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연락주세요.]
얼굴만큼이나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자였다. 보면서 한가지 든 의문은 왜 하필 나일까? 였다. 뉴스에서도 담벼락만 간신히 구경할 수 있었던 차회장의 집까지 들어갔고 여유롭게만 보이던 차회장의 가정폭력까지 봤다. 그런 치부들을 내게 보여준 차회장은 어째서 나를 이토록 필요로하는 걸까. 우리 엄마가 콜드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그게 차회장이 나를 필요로하는 이유일까?
“아, 몰라.”
생각들이 엉켜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앞으로의 날들이 조금 막막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웃기게도 나는 제법 평탄한 삶을 살았다. 물론 그 이유가 제이그룹의 차회장 덕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차회장이 마련해준 집이었다.
원한적 없는 호의. 그 중 하나가 집이었다.
현관문을 열면서 문득 그의 호의 중 하나인 이 집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살기에는 넘치도록 넓은 집 안은 정신없이 너부러진 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언제적거야.”
예전에 쓴 콜드병에 대한 보고서들이 보였다. 한쪽으로 쭉, 밀어놓고 쇼파에 앉았다. 아무리 바쁘게 살았다고해도 집이 엉망이었다. 대충 치우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액정 위로 집주인, 이라는 글자가 떴다. 나한테 전화할 일이 없는데.
“여보세요?”
-“어~! 705호 오랜만이야~”
“아, 네, 무슨일이세요?”
-“아, 그게.”
집주인 아주머니가 머뭇거리며 입을 뗀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왜지? 왜 또 이렇게 불안하지?
-“방을 좀 빼야할 것 같은데?”
“네? 갑자기 무슨 소리....”
-“아, 사실 그게 원래 집주인이 따로 있거든, 나는 그냥 대리인이야. 아, 근데 진짜 집주인이 갑자기 방을 빼라고...”
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다. 타이밍도 참 귀신같았다. 병원에서 잘린, 아니 그만두고 바로 집까지 잃게되다니.
“알겠어요.”
-“어? 그래? 괜찮아?”
“네.”
의문 섞인 집주인의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정말 미안한데, 이틀안으로...”
“네?”
아무리 그래도 이틀은 너무하지 싶었다. 짐 싸는데만 이틀은 거릴 것 같았는데 무슨.
-“미안해, 정말.”
“이틀은 안돼요. 짐이 좀 있어서.”
-“그래, 그래, 알지. 아가씨~ 정말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넋놓은 채 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징- 다시 핸드폰이 울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한번 봤다고 낯이 익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김선생님?”
“네.”
-“저 차경현입니다. 놀라셨죠?”
“그런데요? 제가 지금 바빠서요.”
-“회장님 제안 아직 유효합니다.”
또 시작이다. 기가 차서 웃음이 났다
“회장님께서 미리 집을 빼셨나봐요. 원래 계획은 세영씨가 저택에서 상주할 예정이었거든요.”
차경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지금이라도 들어오셔서...”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 들을까.
“아니요, 안합니다.”
내 말에 차경현의 웃음소리가 살짝 들렸다. 기분이 너무 나빠져서 전화를 끊었다. 회장이 화가 났으니 들어오란 소리는 뭐야, 나만 빼고 모두가 여유로운 것 같은 상황이 싫었다.
* * *
집을 치우겠다는 계획은 짜증이 났다는 이유로 미루고 잠을 잤다. 오랜만에 늦잠이나 실컷 자보자하고 누웠는데 심란해서 잠이 안왔다. 멀뚱 멀뚱 어두운 천장만 보고 있었는데 아까 만졌던 차재훈의 차가운 볼의 감촉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엄마의 느낌이었다.
나는 괜히 내 손을 쳐다봤다. 우리 엄마도 손이라도 따뜻했으면 좋았을텐데. 괜히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의 몸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눈빛만큼은 따뜻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났다. 청승맞게 눈물이 났다. 흐릿하게 떠오른 엄마의 얼굴이 흐릿해서, 더 눈물이 났다.
“보고싶어.”
엄마가 보고싶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 잔뜩 어질러 놓은 방안에서 나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아무도 듣지 않을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더 크게, 더 서럽게 눈물이 쏟아졌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났는데, 아침부터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뻑뻑해진 눈으로 일어났다.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을만큼 퉁퉁 부은 것 같았다.
반쯤 뜬 눈으로 인터폰을 확인해 보니 단정한 니트를 입은 차경현이 안경을 올리며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띵동- 하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없는 척할까 싶었는데 그런다고 순순히 갈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어제 오늘 귀찮고 지치는 일이 많은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차경현이 싱긋, 웃으며 손에 쥔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어 보였다.
“저 이사갈건데요?”
“네~ 이사가셔야죠. 그래도 선물이에요. 보통 남의 집 올 때 들고 가잖아요?”
여전히 싱긋, 잘도 웃었다. 어쩐지 속이 꼬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어나신지 얼마 안됐나봐요.”
차경현이 순식간에 내 얼굴을 훑어보는게 느껴졌다.
“네.”
그다지 창피하거나 민망하진 않았다.
“회장님께서 꼭 세영씨 데려오라고 하셨거든요.”
차경현이 두루마리화장지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대체 몇번을 말해야 되죠? 안 간다고요.”
멀뚱히 두루마지 화장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짐 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집들이 선물의 대명사인 두루마리 화장지를 가져오는 건 대체 무슨 상황인가.
“대체 왜 하필 나에요? 나보다 더 경력있고 유능한 전문의들 많은 거 알잖아요.”
말이 짜증스럽게 나갔다. 그런 나를 보며 차경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는데 그 모습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쉽게 호감을 살 외모였다. 살가운 성격과 다정스러운 목소리는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짜증나는 얼굴일 뿐이었다.
“유능한 전문의는 많지만 그들은 콜드병에 관심이 없죠. 워낙 환자가 적은 희귀한 병이니까요. 이 병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고, 돈도 안되고, 그러니까 당연히 다는 다른 연구에 집중하는데, 김세영씨는 아니잖아요.”
탁, 문이 닫히고 차경현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들어오라고 안했는데요?”
“들어오지 말라고도 안하셔서.”
그가 들어온것과 동시에 현관 조명등이 반짝 빛이났다 다시 꺼졌다. 그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왔다.
“학부 때부터 유명하셨다면서요. 콜드병만 죽자살자 파서.”
“저에 대해 모르는게 없으시네요?”
“없을 리가 없으니까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차경현을 보면서 찝찝하고 불안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나에 대해 모르는게 없었다. 이 모든게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설계 같았고 나는 그 설계에 맞춰 움직이는 부속품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