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했나?”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미치셨소?”
진 황실 황궁의로 십 수 년을 근무한 명도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지금껏 황제를 비롯하여 황궁의 주요 인사들을 진찰하며 목이 달아날 뻔했던 때야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과거의 일이라 희석되어 기억 속에 희매하진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이 가장 무섭다는 소리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앞에 앉거나 선 세 사람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침상 위에는 진 제국에는 흔치 않은, 아니 세상에 저런 색이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로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헤드보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마치 병자를 위한 병상처럼 꾸며진 것과 달리 얼굴색은 맑고 희었고 눈은 범처럼 형형했다.
여인은 침상 한 편에 조금 편중되어 누워있었는데 그건 의원인 명도준에게 진찰을 받기 위함이었다.
침상의 반대쪽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키가 매우 컸다. 그는 말끔한 외양의 여인과 달리 행색이 영 초라했다. 옷은 멀쩡하니 새것 같았지만 여기저기 붕대를 두른 것이며 멍든 자국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저 매서운 눈길로 명의원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듣기로 여인의 수석 보좌관이면서 기사라 했다. 특히나 서대륙인 특유의 기골이 장대한 체격에 눈빛이 형형하여 순식간에 명의원의 간을 콩 알 만하게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숫제 검이라도 뽑을 것처럼 한 손이 검대 위에 얹혀 져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 검은 없었다. 황궁 내에서는 함부로 검을 패용할 수 없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 옆의 사내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바로 제가 모시는 제국의 황자 중 한 분이시기 때문이었기에 그 공포는 더했다. 그는 옆에 선 남자와 달리 차가운 낯빛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황실에 종사해 온 명의원은 그가 매우 대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제국 황제의 이복동생이자 황자인 겸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보좌관이자 검사인 것이 분명한 옆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가 타국 황자의 명령에 굳이 따를 까닭은 없었으나 제 주인인 침상 위의 여인이 지켜보고 있는 까닭이었다.
황자 겸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되물었다.
“명의원, 자네 지금 진정으로 하는 말인가?”
“소신이 어찌 감히 황자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하오리까.”
명도준은 번개처럼 빠른 동작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목소리가 심히 떨려나오고 있었다.
겸은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자는 한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쓰다듬었다. 차마 침상 위의 여인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다시 질문을 하는 그의 목소리 역시 조금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네. 다른 방도가 없는 겐가?”
추상과도 같은 물음에 명도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거의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그는 이를 꽉 물고 말을 내뱉었다.
“주희(朱姬)께오선 앞으로 1년여 정도밖에 살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주희, 아니 원래 이름은 이슬로즈 카리아 폰 펜도람. 그녀는 펜도람 가의 적녀이고 장녀이며 제국과 신전의 제1기사이고 서대륙 예르덴바드 제국 황태자의 약혼자이다.
주희란 칭호는 서대륙의 패자인 예르덴바드와 동대륙의 지배자인 진 제국이 화친하여 그 대사로 발령받아 왔을 때 진 제국 황태자에게 받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칭찬하며 그는 그녀에게 화친의 의미로 희(姬)의 칭호를 내렸다.
주희, 그러니까 이슬로즈는 의원을 포함한 세 사람 전부를 자신의 내실에서 내쫓았다. 보좌관은 아예 일거리를 떠얹어 멀리 보내버렸다.
잠시라도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침대 옆에는 아침에 받았던 귀한 차며 약탕, 죽과 같은 아침식사거리들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몇 개쯤 뚜껑을 열어보았다가 도로 닫았다. 식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입맛이 없었다. 굳이 식은 것을 부러 먹을 만큼 험한 입맛도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위해 진 제국에서 마련해준 입식 경대 앞에 앉았다. 예르덴바드 황실의 유행을 적절히 차용하면서도 진제국의 기풍에 거슬리지 않는 대단한 예술품이었다. 처음 받았을 때는 예술이나 아름다운 물건에 흥미 없는 그녀조차 감탄했었다.
거울 속에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이 비췄다. 홍옥과 루비를 고스란히 녹여 물들인 것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과 중심에서부터 은빛이 새어나오는 연한 청색의 눈동자. 매일같이 봐 온 탓에 별 감흥 없는 그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슬로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짧게 되뇌어 보았다.
이 이름을 얻고 22년. 열심히 살았고 그 누구보다 노력하여 얻은 성취가 낮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타고난 신성력 덕에 남자들 못지않게 검을 다뤘다. 물론 그 노력 또한 모자라지 않아, 성황 예하께 직접 신성기사로 임명 받기까지 했었다.
딱히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황태자의 약혼녀로 차기 황후 자리까지 약속받은 몸이기도 했다. 황태자인 마티아스나 저나 사랑에 죽고 못 살아 맺어진 인연은 아니고 그냥 정략이었다. 어릴 때부터 놀이동무로 함께 자랐던 사이라 어색할 법도 했으나 고위귀족과 제국 유일한 황자로 자란 두 사람에겐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정략 아닌가. 다만 함께 자란 릴리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마치 세 사람을 이간질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경합까지 벌여 떨어트렸으니 말이다. 물론 그 천사 같은 아이는 황태자와 그녀에게 타박은커녕 함박 웃는 얼굴로 축하해주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1년여 정도라니.
“시발, 사람 인생 참 별 것 없네.”
이슬로즈는 가볍게 욕설을 섞어 중얼거렸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온갖 기사들과 검을 맞대며 살다보니 사실 입이 꽤 험한 편이었다. 릴리에 의해 교화된 것뿐이지.
딱히 아프지도 않고 거울에 비춰 본 낯빛도 멀쩡하기만 한데 시한부란다.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지금도 자신의 몸속에서는 신성력과 마물의 독이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스스로는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설마, 싶었다.
예르덴바드에 있을 때는 주에 꼬박꼬박 대신전에 들르고 성황 예하께서 직접 신성력으로 퍼부어 거의 샤워를 시켜주다시피 했던 몸이다. 비록 진 제국으로 건너오고 난 후 근 반년의 시간이 비긴 했어도 그렇게 약할 리 없었다. 스스로 수련하여 축적한 신성력도 무시 못 할 양이었다.
하지만 마물의 피는 이미 그녀의 심장에 단단히 똬리를 틀었다. 이것은 생명체도 아닌 주제에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오로지 단 하나, 그녀의 심장을 파괴하기 위해서.
한참을 멍하니 거울만 바라보다가 가슴 한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는 단추를 하나 둘 풀어 내렸다. 서대륙식 나이트 드레스는 레이스가 화려하니 아름다운 것이었다. 톡톡 풀어지는 단추 사이로 뽀얀 앙가슴이 드러났다.
그리고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 아래에 먹물처럼 검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일그러진 곡선이 뭉쳐진 것도 같아 얼핏 보면 장미처럼도 보였다.
엄지로 그 자리를 살살 문질렀다. 제 본연의 살갗 느낌 그대로 보드랍기만 하던 자리에서 순간 은빛 스파크가 작게 일었다. 살짝 손을 떼어냈던 그녀는 이를 드러내어 실소했다.
“이 개새끼가. 좋아, 기어코 나를 죽여야겠다는 거지?”
이슬로즈의 눈에 한기가 서렸다. 그녀는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신성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발화하는 것처럼 은빛 기화열이 빛을 발했다. 피부 위에 번쩍거리는 빛의 섬광이 흘러내리는 땀마저 태워버릴 정도로 맹렬했다.
“큭....”
하지만 고통이 심했다. 심장에서부터 뿌리내린 마물의 피가 전신에서 들끓었다. 사지 말단에까지 침투한 그것을 신성력으로 태워도 심장 한가운데의 그것은 웅크릴지언정 죽지 않았다. 몇 시간을 고통스럽게 스스로를 태우던 이슬로즈는 결국 지쳐 바닥에 드러누웠다.
레이디는 바닥에 누우면 안 돼, 라는 릴리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무시했다.
“설마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걸 걔가 지금 어떻게 알겠어.”
릴리를 떠올리니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떠올랐다. 순간 암담해져서 드러누운 융단 위를 떼굴떼굴 굴렀다.
“아아, 젠장.”
작위 승계부터 시작해서 시급히 처리해야 할 가문의 온갖 대소사들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심지어 황태자의 약혼자로서 해야 할 황궁의 일들까지 떠올리니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나 어차피 이제 황태자의 약혼자 안 해도 되지 않아?”
그녀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스윽 떠올랐다. 핑계가 생겼으니 약혼자 때려 쳐도 된다. 어차피 곧 죽을 여자를 황후로 올릴 것도 아니고 말이지. 이참에 릴리와 황태자를 엮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 악마와도 같은 심술궂은 미소가 걸렸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자신이 아니어도 릴리라면 아주 훌륭한 황후가 되어줄 것이다. 어차피 자신과도 정략이었으니 황태자인 마티아스도 릴리를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 인간은 간택전 때도 두 사람 중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지 않았던가?
“아. 아아아아.... 아, 잠깐... 내가 죽는 거 알면 둘이 과연 결혼 할까?”
아니, 절대 아니다. 세 사람 사이에 애정은 없었어도 우정은 있었다. 무려 십년을 훌쩍 넘기는, 세 사람의 내면에 단단히 뿌리내린 우정이었다. 이 와중에 자신이 곧 죽을 것이니 파혼하고 둘이 잘 살아! 라고 말한다고 곱게 들어먹을 턱이 없다.
“릴리는 울고 마티는 치료법을 찾겠다고 난리를 치겠지. 나를 아예 황궁 안에 가둬둘지도 몰라...”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마티아스 황태자라면 정말로 그녀를 제압해서 황궁 내실의 어느 침대 위에 꽁꽁 묶어놓을지도 모른다. 이슬로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새끼는 또라이라 정말로 그렇게 할지도....”
마티아스는 현재 검술로만 따지면 제국 제 1의 검사였다. 비록 그 칭호가 그녀에게 와 있기는 해도 서대륙 전부를 통틀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는 그 한 명 뿐이었다. 신성력으로 보완을 해도 그와 대련할 때면 힘에 부쳤다.
“안 돼, 안 돼. 그러면 내가 약혼자를 못 때려 치잖아. 그러면, 어쩌지?”
솔직히 이슬로즈는 이런 방면으로 머리 쓰는데 쥐약이었다. 공작가의 업무도 아버지를 대행해서 처리하고 기사단을 이끌고 마수 토벌을 하러 나가 행정 업무를 보는 것은 척척 해냈지만 이런 식의 머리싸움엔 약한 편이었다. 정치싸움엔 릴리가 훨씬 유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했다. 어떻게든 파혼하고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
못하면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피곤해진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어디 갇혀서 병자처럼 보내는 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지금까지 못했던 일을 하다가 즐겁게 떠나고 싶다.
기왕이면 전 대륙 여행이라던가, 서대륙 크루즈라던가.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즐거워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종이와 펜을 꺼내 이것저것 써 내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종이를 구겨서 화톳불 안에 집어 던지기도 수십 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작전은 개뿔. 그냥 그때 그때 상황 봐서 닥치는 대로 하자.
인생은 무조건 직구다.
대신 서신을 몇 통 작성했다. 하나는 황태자에게 보내는 파혼 요청서, 또 다른 하나는 영지에 내려가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간략한 경위서, 마지막은 릴리에게 보내는 안부편지였다. 물론 릴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죽을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어쩐지 조금 무료해졌다. 펜대를 입술 위에 올려서 장난을 치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편지지 한 장을 새로 꺼냈다. 그리고 바르게 자세를 잡고 앉아 조심스럽게 펜을 놀렸다.
- 너의 수호천사가 되어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