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FK 국제공항.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큰 유리창에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미국 특유의 분위기가 선사하는 상쾌함을, 유지현은 두 팔 벌려 맞이했다.
"미국이다!"
이미 두번, 미국에 간 경험이 있었기에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본래 사전준비가 철저했기에 지금은 근처 숙박시설, 맛집 등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유지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발걸음을 옯겼다. 평소에 가던 루트는 분명 아니었다. 할로윈 데이에 맞는 장소를 찾기 위해 미리 조사를 해둔 참이었다. 위치, 그에 맞는 지도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으니 새로운 장소로의 여정은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우선 배를 채워야겠지."
유지현은 무심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방금 기내식을 먹은 참인데도 배가 뱃고동을 울렸다.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잠시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걸어나온 그녀의 손에는 막 한 입 먹은 수제버거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려 그것을 물었다. 양배추는 싱싱했고, 고기는 맛깔났다. 치즈, 토마토 등의 부가적인 재료와 소스가 어우러지니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다. 미국에 도착해 출출하다 싶으면 항상 사먹었던 음식이었다.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의 맛을 보여주는 수제버거에 그녀는 행복해졌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향한 곳은 0.2km 거리의 아이스크림 가게. 초콜릿 시럽이 듬뿍 뿌려진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일정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햇살이 따스하고, 바람이 선선했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세련되었고, 공원의 강가는 푸르게 빛났다.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 걸어가는 모든 길이 노란색으로 물들어갔다. 유지현은 개나리마냥 만개한 듯 환한 길을 즐겁게 걸어갈 따름이었다.
그녀가 향하는 장소는 지금의 활기참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철을 타고 2시간, 버스를 타고 1시간.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검은빛으로 가득하게 된 것은 이때쯤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끝없는 어둠이었다. 금방이라도 고장날 듯한 가로등의 빛이 깜박였다. 아침인데도 이질적인 암담함이었다. 마치 이 곳만 외계에서 뚝 떨어진 듯.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슬럼가는 아니었다. 창녀촌도 아니었다. 그저 이 그치지 않는 어둠이 걷히는 곳에 한 마을이 있다고 전해질 뿐이었다.
아무도 모를법한 미지의 장소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마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정보를 얻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할로윈 데이 기사에 어울릴 법한 장소인 만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유지현은 겁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두려움을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어깨에 사선으로 걸친 카메라 가방끈을 세게 쥔 뒤, 눈 앞의 어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음산한 분위기의 무채색으로 그녀의 몸이 완전히 녹아들었다.
*
한 걸음, 두 걸음.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른다 해도 끝이 없는 듯한 검정색에 파묻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 같았다. 괜히 불안한 마음에 그녀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하얀 화면이 눈 부시다. 그러나 그 위로 나타난 메시지는 그 빛만큼 희망적인 것이 아니었다.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여기, 괜찮은 거 맞아?"
분명 지인이 소개해준 장소다. 그만큼 그녀에게 해가 될 만한 곳을 소개해주지는 않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오던 사람이 나오던 무엇인가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 것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작동한다 생각되는 기계는 이제 카메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는 사진을 찍어도 노이즈가 심할 것 같은데. 어느곳에서도 빛이 보이지 않는 풍경에 유지현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언제까지 가야 마을이란 것이 나오는지. 마을임을 보여주는 푯말, 하다못해 사람이 사는 것을 알리는 미약한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지현은 한껏 떨리는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마치 끝없는 미궁 속 출구를 찾아가는 것과 같은 막막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할로윈 데이의 기사를 작성해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기자의 사명감과도 같았다.
"...불빛이다."
걷기를 오랜 시간, 이제는 시간 감각마저 희미해진 그때, 그녀의 시야에 하얀 빛줄기가 들어왔다. 사막 속 오아시스를 찾은 느낌이라, 그녀는 반색하며 달려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저 빛이, 사라질 신기루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행스럽게도, 빛은 끊기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로 이어져 그 범위를 키워가고 있었다.
빛이 인도해주는 곳으로 유지현은 홀린 듯 다리를 움직였다. 새하얀 빛이 이내 따뜻한 노란색에 물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그토록 찾고 있었던 마을의 표지판이 세워져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녀는 빠르게 걸어갔다.
어둠이 걷히고, 빛의 세상이 도래했다. 붉은 빛이 도는 하늘 아래로 노란빛깔의 지붕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중심에는 커다란 구조물이 세워져있었고, 그 주위로 상가가 들어서있었다. 마치 시골의 마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익숙한 느낌에 유지현은 눈을 깜박였다. 끝없는 어둠 속 이러한 따뜻한 화롯불 같은 곳이 있으리라곤는 생각지도 못했다. 기본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 상황에 그녀는 그저 두 눈을 꿈벅일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남색의 물결이 하늘을 물들였다.
"일단 묵을 곳을 찾아야겠다."
사방팔방으로 걸어다닌 끝에, 그녀는 자그마한 2층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우렁찬 사내의 목소리였다.
"어서 옵쇼!"
그녀를 맞이해준 이는 목소리만큼이나 듬직한 풍채의 사나이였다. 민소매 조끼를 입어 한껏 드러난 어깨에는 하트와 영문 문신이 뒤섞여있었다. 수염이 채 깎이지 않은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억양이 센 미국식 발음, 그가 구사하는 것은 영어였다. 미국 내에 위치한 마을이라 그런 것이겠지.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유지현 역시 영어로 답했다.
"3일 정도 묵을 수 있을까요?"
"마침 한 사람이 묵을 만한 방이 남아있소. 따라 오슈!"
사내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일사천리.
그녀는 중얼거렸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이런 기세라면 기사 역시 어렵지 않게 작성할 수 있었다. 잘 쓴 기사라 사장님에게 칭찬받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유지현은 입을 벌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한 방문 앞에 도착한 사내가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요, 여기."
"아, 하하. 감사합니다."
사내의 다소 머뭇거리는 기색을 무시하고, 그녀는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의 창피함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피할 요량으로 금방 들어간 것이지만, 눈 앞에 보이는 방의 모습에 그녀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넓은 방에 커다란 침대, 책상, 식탁, 소파까지. 웬만한 원룸 집 뺨칠 정도였다.
"편하게 쉬쇼. 요금은 내일 받겠소."
"배려 감사합니다."
멍하니 서있는 그녀 뒤로 사내는 조용히 나갔다. 쿵.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윽고 그녀는 제대로 감탄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던 집보다 더 좋아. 세상에, 세상에."
이런 곳이라면 평생 살고 싶다. 그녀는 행복감에 밝게 미소지었다. 밥까지 맛있다면 평생 여기서 살까. 같은 생각을 하며. 곧 씻고 짐을 풀어, 그녀는 개운한 기분으로 노트북 앞에 엎드렸다. 푹신한 침대가 몸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현재의 상황에 잠시 취해있다가, 그녀는 손을 들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10월 28일의 기사 작성이었다.
[10월 28일]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할로윈 데이를 위한 장소는 마치 나를 위한 곳 같다. 마을의 분위기는 따스하고, 풍경은 아름답다. 묵을 방을 처음보고 평생 여기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어쩌면 진심이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할로윈 데이를 위한 장소인 만큼, 제대로 주제를 잡고 취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일기 수준인데?"
유지현은 타자 치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러나 곧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럼 뭐 어때. 수필 형식의 기사를 작성하는 거니까."
10월 28일의 글에 '제대로 된 기사는 내일부터!' 라는 말을 적어넣었다가 곧 지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는 노트북을 닫았다.
10월 28일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