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9.5//“내가 원하는 걸 너는 들어 줄 수 없을 것 같군.”//
그 말이 왠지 자신을 살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이크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소군악이 가까이 다가와 눈앞에 서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니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날 살려 주실 수 있소?”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
제이크도 바보가 아니다.
저자는 디엘 백작가의 후계자를 죽여 버렸으니 목격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사건을 감추려 하리라.
자신이 살아날 방법은 하나였다. 살려 준다 하더라도 소문을 내지 않을 거란 확신을 보여 주는 것.
“당신의 부하가 되겠습니다.”
“내겐 형제와 같은 수하들이 이미 있다.”
“몸종도 좋고, 노예라 불러도 좋습니다. 하인도 좋으니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절대 오늘의 사건이 외부에 발설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소군악은 흥미로운 눈으로 제이크를 보았다.
‘눈치 하나는 비상한 놈이군.’
제이크는 소군악이 무엇을 위해 살인멸구하려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문제는 제이크가 소군악에게 얼마만큼의 효용가치가 있는지 하는가였다.
괜한 혹을 달고 다닐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에 쓰던 전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광산의 탈주 노예가?”
“지금의 신세야 그렇지만 본래 포룬상단의 후계자였던 몸입니다. 당장 여건만 갖춰진다면 상단을 설립해 큰돈을 벌어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다.”
제이크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기회를 잡았음을 직감했다.
소군악이 자신의 말을 더 들어 보길 원하고 있었다.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자신이 가진 것 중에 무엇으로 소군악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재물에 욕심이 없다면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무력과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살인. 그 행동이 오래토록 전투를 전전한 군인과 같았다.
“부끄러우나 왕립아카데미를 5년 만에 수석 졸업한 저입니다. 그 지식이 남다르니 전쟁터의 모사로 쓰고자 하셔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제이크는 필사적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왕립 아카데미라…….”
조용히 자신의 말을 되뇌는 소군악을 보며 제이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소군악은 가만히 제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도 빠릿하게 잘 돌아가는 듯했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마당에 자신의 야망도 은근히 내비치는 자였다. 담이 크지 않고서야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단을 만들어 큰돈을 벌어? 전쟁터의 모사?’
자신의 원하는 바를 모르기에 막 쏟아 낸 말과 같았지만 이는 제이크의 바람이기도 했다.
제이크는 미래를 가정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소군악은 왜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필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명성이 널리 퍼질 것이 자명했다.
소군악을 내세운 채, 자신은 2인자로서 조력하는 것만으로도 라모스 상단에 대한 복수를 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 이 순간에도 제이크가 도박을 하듯 말을 내뱉은 진심이었다.
“말이 좋아 노예를 자청하고 있다마는, 네놈은 나를 이용하여 한을 풀려고 하는구나.”
제이크는 뜨끔했다. 그리고 속마음을 감추는 것을 포기했다. 모두 내보이고 운은 하늘에 맡기리라.
“맞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이루시려거든 저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소원이라면 내 가문, 내 가족들을 앗아 간 라모스 상단에 복수하는 겁니다. 그것만 허락해 주신다면 충견으로 따르겠습니다.”
이는 제이크의 본심이었다.
소군악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립 아카데미 출신이라면, 거기에 수석 졸업생이라면 그 지식이 남다를 것이다.
수정을 녹일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직접적으로 녹일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좋아. 살려 주지. 대신…….”
소군악의 그 한마디에 제이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소군악은 품에서 환약을 하나 꺼내 들었다.
‘고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제이크가 얼마나 진심을 말해던 신뢰할 수는 없다. 만약의 안전장치는 마련하는 편이 나았다.
살기 위해 충성을 구걸하는 노예보다 목적이 있어 열과 성을 다해 조력하는 노예가 더욱 쓸모 있는 법이었다.
“이걸 먹어라.”
“그게…… 무, 무엇입니까?”
“독이다.”
제이크는 꿀꺾 침을 삼켰다. 살려 준다 해 놓고 당장에 독약을 내밀다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고 절벽으로 밀어 넣는 기분이다.
“먹어라.”
“…….”
소군악의 재촉에 제이크가 흔들리는 눈망울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굳셌다. 딱 그 표현이 맞았다. 흔들림 없이 깊은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시험이야.’
제이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죽이자고 마음먹었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죽일 리가 없다. 손속이 잔인한 데다 살인에 대한 망설임이 없는 자였지, 그렇다고 변태적 취미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귀찮은 방법으로 살인을 즐기지는 않으리라.
제이크가 느끼는 소군악은 그랬다.
꿀꺽.
제이크는 소군악이 주는 환약을 받아먹었다. 고약이라 하였지만 사실상 소군악이 이곳의 약초를 실험해 보며 만든 환단이었다.
내공의 증진 효과는 없지만 몸의 독기를 씻어내고 약간의 피로감을 씻어 주는 정도다.
“네가 먹은 것은 고약이다.”
“고약이 무엇입니까?”
“한 달간 잠복기를 거친 후에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맞이할 것이다. 고통은 3일간 지속된 후 마지막 날 죽게 될 것이다.”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소군악이었다. 당사자인 제이크는 다시 환약을 토해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약효를 빨리 돌게 해 보지.”
탁, 탓.
소군악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제이크의 요혈을 두드렸다.
“으흡!”
제이크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는 사지를 벌벌 떨었다.
“으어어어어.”
침을 질질 흘리며 괴로워하는 제이크는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혀를 깨물고만 싶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사실 소군악의 꾀에 당한 것일 뿐이었다. 현재 소군악에게는 독도, 고독도 없었다.
지금도 그저 혈을 짚었을 뿐이었다.
제이크가 언제 분근착골을 당해 봤겠는가?
“끄어어어억. 주, 죽여 주시오. 차라리 죽여 주시오!”
뼈가 뒤틀리는 그 충격과 고통에 제이크가 정신을 못 차리는데 다시금 소군악이 품에서 환약을 하나 꺼냈다. 제이크의 입에 넣어 주고는 다시 혈자리를 두드리자 고통이 금세 사라졌다.
“으어어억. 으허억.”
제이크는 몸을 여전히 바들바들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근육이 저마다 스스로 움직이며 뼈를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지옥에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까? 제이크는 두려움에 차마 소군악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네가 방금 먹은 것은 약효를 다시 한 달 뒤로 늦추는 약이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절대 배신하는 일은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역시 이해가 빨랐다.
“다시 이 고통을 겪고싶지 않다면 그러는게 좋을게야.”
일이 이렇게 되자 제이크는 소군악을 도우며 자신의 바람도 겸사겸사 이루려던 생각을 버려야 했다.
소군악은 악독한 자였다. 이제 한 달마다 해독약을 구하려면 꼼짝없이 소군악의 곁에 있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좋다. 그럼 시체를 한데 모아, 화장할 준비를 하라.”
“네, 네!”
제이크가 시체를 한곳으로 모으는 사이 소군악은 한편에 비켜서 가부좌를 틀고는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열다섯이나 되는 기사들과의 싸움이 소군악으로서는 부담이 되었다.
‘더 강한 놈들이 몰려오면 필시 목숨이 위험해질 날이 올게야.’
중원을 제집처럼 활개를 친 것도 소군악의 그 일신의 무력이 대단해서이기도 했지만 곁에는 언제나 흑룡대와 함께였기에, 천년신교라는 단체를 등에 업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런 배경도 없는 소군악으로서는 믿을 건 자신의 실력뿐이다.
괜히 오늘의 사건이 밖으로 새어 나가 디엘 백작가의 추격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했습니다.”
제이크는 소군악이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아 있자 물끄러미 소군악을 관찰했다. 이렇게 보니 소군악의 얼굴은 꽤나 젊다. 보이기야 20대 초반? 아무리 많이 먹었어도 서른은 되지 않았을 듯싶었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실력을 갖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왕 따르기로 했으니 그가 대륙을 휘젓는 악당만 되지 않았으면 싶었다.
부우우웅.
제이크가 소군악을 관찰하듯 살펴보자 취아가 제이크의 앞에 나타나 양손을 쫙 펼쳤다. 그 정령의 표정을 보니 마치 더 이상 접근하면 용서치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아, 정령이라니…….”
제이크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설마 소군악이 정령마저 부릴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만한 무력을 지니고도 그것도 모자라 정령까지 부린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레드 로즈 기사단과의 싸움에서 굳이 정령을 내보이지 않았던 것도 굳이 정령의 도움은 필요없을 정도로 그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정령의 도움 없이도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지.’
레드 로즈 기사단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전멸시켜 버린 소군악이었다. 굳이 정령의 힘까지 동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새삼 소군악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했다.
“후우우우…….”
소군악이 긴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그때까지 제이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소군악이 산처럼 쌓인 시체를 보며 말했다.
“화랑. 태워 버려라.”
화르륵.
소군악의 말 한마디에 불로 된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시체산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시체 바닥에 깔린 나무들이 금세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취아. 연기를 감추어라”
취아가 맡겨만 두라는 야무진 표정으로 불 위를 매캐하게 매운 연기를 휘감았다. 하늘로 뻗어가야 할 연기가 차츰 흐려지더니 공기 중으로 아예 퍼져 버렸다.
매캐한 연기가 바닥으로 자욱하게 깔렸으나 혹시나 모를 사람들의 시선은 피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영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제이크는 새삼 시체들의 화장까지 해 주는 소군악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 사그라지자 재와 백골로 변해 버린 뼈다귀만 남았다.
소군악과 제이크는 구덩이를 파고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도록 뼈다귀들을 한데 묻었다.
‘화골산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시체를 녹여 없앨 수도 있지만 지금은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매장해 볼까 생각했지만 누군가 땅을 팠을 때 의복이라든가, 이들의 신분을 나타낼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아 화장했다.
밸골의 매장을 모두 끝내자 남은 것은 그들이 쓰던 병장기들뿐이었다.
사람 수가 많았던지라 칼이며 도끼며 그 양이 상당했다.
“화랑. 녹일 수 있겠느냐?”
쇠를 녹일 정도면 아주 고열이 필요하다.
혹시나 싶어 물었으나 화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병장기를 녹여 내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둥글게 파고 쇠붙이를 모두 던져놓고 녹이자 반구형의 쇠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 병장기를 던져 넣었던 제이크가 벨트를 들고는 물었다.
“저, 이 매직 수트는 어찌하는지요? 녹여 없애기에는 너무 아까운 물건입니다.”
“그건 들고 가지.”
코모라가 입던 갑옷이다.
아주 애를 먹었기에 연구해 볼 심산이었다. 쇠붙이가 모두 녹자 그대로 흙을 덮어 버렸다. 대장간에라도 가져가면 아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겠으나 괜히 가져가 의심을 살 바에야 버리는 것이 나았다.
“이제 마을로 내려가자.”
“네에. 하온데…….”
“말하여라.”
“저는 탈주 노예입니다. 지금 잠비 자작의 사병들이 저를 찾기 위해 토둔시를 뒤집고 있을 것입니다. 이대로 토둔시로 향해도 될는지요?”
“으음.”
소군악은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의뢰한 병기가 완성되지 않았으니 토둔시를 떠날 수는 없다. 제이크는 혹이 되어 버린 자신을 죽이지나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리 와 보아라.”
타탓.
소군악은 가타부타 말없이 제이크의 마혈을 제압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당해 본 수법이지만 제이크는 정말 귀신같다 생각했다.
“인위적으로 네 뼈와 근육을 뒤틀 테니 고통이 조금 있을 것이다.”
소군악은 그리 말하고는 당황하는 제이크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내력을 불어넣은 그의 손이 움직이며 마치 찰흙을 만져 조형하듯 제이크의 머리를 만졌다.
툭 튀어나온 그의 광대가 들어가고 눈매가 변했다.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던 뾰족한 턱도 둥글게 변해 버렸다. 벨트의 반짝이는 부위에 얼굴을 비춰 주었다.
“어떠하냐? 그들이 너를 알아보겠느냐?”
제이크는 아혈까지 제압당해 말할 수 없어 그저 눈만 끔뻑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어찌 사람이 마음대로 얼굴마저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악마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제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