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 나는 털을 가진 백마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윌리스 남작성을 향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마차의 사방으로 붉은 제복을 입은 기마가 열다섯이나 되었는데 하나같이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통일된 그들의 기사 제복으로 미루어 볼 때 디엘 가문의 자랑스러운 레드 로즈 기사단이 분명했다.
그들의 뒤로 궤짝을 실은 짐마차 세대와 그를 수행하는 기마병 스물, 보병 50명이 뒤따랐다.
거기에 여행 중 수발들 짐꾼들과 마부 등의 하인까지 포함하면 전체 인원만 120명이 훌쩍 넘어가는 대행렬이었다.
윌리스 남작의 가솔들 전원이 성문 앞에 나와 마중하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기세로 언덕을 오르는 그들을 보며 윌리스 남작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디엘 가문의 성세가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윌리스 남작으로선 엄두도 못 내 볼 규모의 행렬이었다. 저런 대단한 가문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자신의 딸을 얻기 위해 이곳으로 향한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마차가 멈춰 서고 수행원 하나가 달려가 문을 열었다. 문 안에서 말끔한 인상의 20대 청년이 내려섰다. 준수한 외모의 사내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위상에 비해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 정겹게 느껴졌다.
“어찌 이리 서 계십니까? 안에서 기다리시지 않고요.”
디엘 백작가의 차기 후계자이자 기사로서도 이름 높은 코모라의 환대에 윌리스 남작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허허허, 그래 오시는 길 힘들지는 않으셨는가?”
“하하하, 물론이지요. 레드 로즈 기사단이 호위하는데 어떤 불한당이 달려들겠습니까?”
“허허헛, 내 괜한 걱정을 했구만. 자자, 들어가세나.”
호탕하게 웃으며 둘은 윌리스 남작성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꾸며진 정원과 말끔한 저택은 시골 남작답지 않은 품위를 느끼게 했다.
달리 말하면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시골 촌놈이 욕심이 대단하군.’
코모라는 이리저리 장단을 맞춰 주는 모습과는 달리 속으로 한껏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이곳으로 온 목적은 하나다.
“저, 그런데 레이디 소피아는 어디 있는지요?”
“하하하, 이 사람 보게. 조금 있다 파티에서 볼 것이니 여독이나 풀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코모라는 싱긋 웃으며 안내된 방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털썩 앉은 코모라는 앉기가 무섭게 일어섰다.
침대를 발로 쾅 찼다.
“뭐, 이딴 싸구려 천을 이불로 써.”
함께 따라 들어온 레드 로즈의 부기사단장 라트가 맞장구쳤다.
“시골 남작가가 다 그렇지요.”
코모라는 한껏 입을 내밀었다.
“쳇, 이딴 돼지우리 같은 곳에 일주일이나 있어야 한다니…….”
일주일을 신부집에서 보내고 약식으로 결혼식을 치른 다음, 소피아를 데리고 디엘 백작가로 돌아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다.
“젠장. 첩 하나 데려가는데 이 지랄을 해야 된다니!”
코모라의 말에 라트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누가 들을까 염려됩니다.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쳇.”
귀족가의 여식들이 그러하듯 귀족가의 남자들 또한 정략 결혼을 통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인을 맞이한다.
본래 코모라는 후작가의 여식과 약혼까지 한 상태였다.
소피아의 미모에 반한 코모라가 윌리스 가문에 좋은 말로 설득해 부인으로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실상은 첩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일단 디엘 백작가로 데려가기만 한다면 시골 남작가에 불과한 윌리스 가문이 어찌 나온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아, 그 계집은 어디에 있는 거지? 어서 맛을 보고 싶은데 말이야.”
코모라는 눈앞에 소피아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라트는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코모라 공자는 모든 것이 후계자로서 적합했다.
기사들에 비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검술 실력이 그러했고 누구와 상대하던지 친숙하게 대하는 그의 언변과 친화력이 그러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라면 지독히도 여자를 밝힌다는 점이었다.
디엘 백작가는 쉬쉬하고 있지만 벌써 첩실로 들인 여자만 넷이었다. 하룻밤 노리개로 삼은 여자를 다 합치면 100명이 훨씬 넘을 것이다.
코모라는 예뻐 보이는 여자만 보면 함께 잠자리에 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
한편 윌리스 남작은 초조한 속을 남몰래 태우고 있었다. 토둔 도시로 떠난 소피아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였다.
“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냐?”
며칠 사이에 침대에서 떨치고 일어난 마일드가 윌리스 남작을 안심시켰다.
“발드롱이 따라갔으니 무사하실 것이옵니다.”
“아, 제발 별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초조하게 기다리며 수없이 올린 기도 덕분일까?
소피아를 태운 발드롱의 마차는 외견상 별탈없이 윌리스 남작성에 도착하였다.
“오오, 내 딸 소피아. 무사했느냐?”
윌리스 남작은 마차에서 내리는 소피아를 잰걸음으로 마중 나가 환대했다. 와락 껴안기까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별반 반응이 없었다.
“으응? 소피아?”
소피아를 살펴본 윌리스 남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희미하게 풀린 눈동자며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는지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곧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그가 왔나요?”
“그래. 예상보다 일찍 왔다. 공자가 너를 보고 싶어 아주 몸이 닳은 듯하구나.”
윌리스 남작은 자랑스레 말했다. 소피아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작을 지나쳐 걸었다.
“저는 좀 씻을게요.”
“그래. 그러려무나.”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고는 하나 며칠 간의 여정으로 지친 소피아다. 이대로의 모습으로 코모라를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깨끗이 목욕을 마친 소피아는 저녁만찬에 나섰다. 윌리스 가문의 가족들과 코모라 공자만이 함께한 자리였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식사만 하는 소피아를 보며 코모라 공자는 애가 탔다. 자신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 모습이 전에 보았을때와는 영 딴판인 것이 아닌가.
“레이디 소피아, 뭔가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시오?”
코모라의 정중한 물음에 소피아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애처로운 목소리가 더없이 가엾게 느껴진다. 고민이 있음에도 억지로 말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지 말고 말해 보시오.”
소피아는 코모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가에 촉촉한 눈물이 고인 그녀의 얼굴이 더없이 가여우면서도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코모라는 당장에라도 소피아를 침실로 들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니에요. 어차피 별수 없는 일인걸요.”
소피아의 말에 코모라 공자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게 별수 없는 일 같은 건 없소. 고민을 말해 보시오. 내가 해결해 드리리다.”
소피아는 우물쭈물 망설였다.
“공자님은 그의 상대가 안 될 거예요.”
소피아의 말에 윌리스 남작과 코모라 공자가 동시에 흠칫 몸을 떨었다. 윌리스 남작은 그라는 단어를 언급한 소피아의 행동에 불안함을 느꼈고, 코모라 공자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에 몸을 떤 것이었다.
“하하하, 더 궁금하구려. 상대가 안 된다니? 무슨 말이오?”
윌리스 남작은 숨을 죽이며 소피아의 입에서 나올 말을 주시했다. 여기서 제이미를 언급하면 이 결혼이 어찌 되겠는가?
“제이미라는 기사가 있어요. 저희 가문의 기사였죠.”
“흐음. 계속 말해 보시오.”
윌리스 남작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소피아가 이 결혼을 포기한 것인가? 결국 제이미를 잊지 못하는 것인가?
“오래토록 저를 좋아했나 봐요. 저와 코모라 공자님과 결혼 소식을 전해 듣더니 얼마 전 기사의 맹세를 저버리고 성을 나갔어요.”
“배은망덕한 놈이군.”
코모라 공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윌리스 남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있던 기사단장 마일드는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채 침묵했다.
“그가 저와 코모라 공자를 죽이겠다며 떠들고 다니고 있어요. 저는 그게 걱정이 되어서…….”
코모라 공자는 물론 레드 로즈의 부기사단장 라트도 안색이 굳었다. 살해할 것이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닌다니, 그저 걱정만 하고 끝낼 일은 아니었다.
코모라가 이내 표정을 바꾸더니 크게 웃었다.
“파하하하, 겨우 그깟 기사 놈 하나가 뭐가 무섭단 말이오? 그는 결코 내 적수가 되지 못하오.”
“그는 정말 강한 자예요.”
“나는 더 세지.”
코모라 공자와 소피아의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코모라는 소피아의 불안감에 변화가 없는 듯하자 한발 물러나 설명했다.
“좋소.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내게는 이 라트 경이 있소.”
라트는 레드 로즈의 부기사단장으로, 그의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라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성의 기사들은 물론 병사들이 모두 덤벼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오.”
윌리스 남작가로서는 매우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뭐라 항변하지를 못했다.
마일드만이 모욕감에 조용히 주먹을 떨 뿐이다.
“공자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소.”
자신을 한껏 치켜세우는 코모라의 말에도 일말의 부끄럼 없이 대답하는 라트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백작가로 가기 전 그가 죽었음을 확인해야겠어요. 그렇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거예요.”
소피아의 당돌한 말에 코모라는 크게 웃었다. 거침없는 말을 쏟아 내는 저 붉은 입술이 침대에서는 또 어떤 자극적인 소리를 내어 줄지를 생각하니 몸이 달아올랐다.
“그가 그렇게 두렵소?”
소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의 목을 가져와 드리리다. 안내인을 붙여 주시구려. 라트!”
“네, 공자!”
“그의 목을 가져와라. 실패는 없다.”
“명을 받듭니다.”
식사 자리에서 오고가는 살벌한 말에 윌리스 남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실 입을 열어 말을 꺼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적막 속에서, 소피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죽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코모라가 흥미롭다는 듯이 소피아를 보았다. 이토록 적극적인 여자였던가? 피를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라니…… 잠자리에서는 어떻게 나올까 재미있는 상상이 이어지니 흥에 겨웠다.
“좋소. 나도 따라가지. 우리 레이디의 부군이 될 이 몸의 실력을 보여 드리리다.”
코모라 공자의 즉흥적인 결정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파티의 일정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는 대로 토둔 도시로 출정을 나가는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찬의 자리가 파하고 윌리스 남작은 불안하여 소피아를 따로 불러 물었다.
“도대체 어찌하려고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이냐? 발드롱 경의 말을 들어 보니 그는 결혼을 방해할 생각이 없다고 하던데…….”
소피아는 아까의 식사 자리에서 보여 줬던 가련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를 꼭 죽여야겠어요.”
“소피아!”
“절 막지 마세요. 그를 죽이지 않고는 분해서 못 살 것 같다구요!”
윌리스 남작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단순히 제이미를 못 잊어서 하는 발악이 아니었다.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했건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이미 자신의 딸은 제이미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왜 그토록 그의 형의 죽음에 집착하는지가 궁금해질 참이었다. 남작은 이제 소피아가 두렵게 보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