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붙은 손바닥과 수정 사이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피어 올랐다. 소군악은 들뜬 마음으로 손을 떼어 봤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이 정도 열에는 끄떡도 없다는 건가?”
소군악은 심각히 고민했다.
이미 식량은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수정 속에 갇힌 흑룡대원들을 꺼낼 방법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군악은 차가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떠나야 하나?”
강기를 발출할 경지에 이르거나 열양장이 극성에 다다르면 수정을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식량의 부족이야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산을 내려가 준비하고 다시 올라오면 될 테니까.
크로크슈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혹시 숨겨 둔 식량이라도 있을까 싶어 성을 샅샅이 뒤지다가 크로크슈의 것으로 보이는 일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일기에는 시공간 이동 마법에 대해 빼곡히 기술되어 있었다.
제이미의 기억을 토대로 대강 이 세계의 풍습이나 사회상을 익힌 소군악이다.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지만, 주술과 비슷한 마법의 존재 또한 이제 이해하고 있었다.
‘이곳은 중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야.’
제이미의 기억이 있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일이었고, 어느 정도 공간이나 시간을 틀어지게 하는 주술적 진법에 대한 이해가 있던 소군악이기에 믿을 수 있었다.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지라 그렇게 이해했다.
이곳은 다른 차원의 세계다.
아마 자신의 예상대로 화이트 드래곤 크로크슈는 지금 중원에 있을 것이다.
만약 크로크슈가 또다시 시공간 이동 마법을 전개할 수도 있음을 가정하면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지만 예상컨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크로크슈에 대한 걱정을 접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은 의식을 차린 지 13일이 지나는 동안 수정 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50일이 더 지난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죽은 몸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얼어붙은 상태인지.
그것은 흑룡대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이 이미 죽은 것인지, 아니면 위급한 상황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봤으나 수정의 정체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소군악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죽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소군악은 지금 흑룡대원들은 일종의 가사상태에 빠졌을 거라 추측했다.
자신도 13일을 버텼으니 수정만 깰 수 있다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배화교에서 이르길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3일간 육신에 머물다 저승 세계로 간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13일을 머물러 있지 않았는가?
분명 살아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소군악은 100개의 수정이 있는 홀의 중심부로 걸어들어 갔다.
그리고 수정들의 모습을 일일이 하나하나 뚜렷이 머릿속에 새기다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수정 조각들을 발견했다.
확실히 얼음과는 달랐다. 차갑긴 했지만 그 자체에서 냉기 뿜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같은 크기의 얼음보다 조금 무거웠다.
팔뚝만 한 크기의 수정과 더 작은 수정 몇 개를 챙겨 식량이 들었던 가방에 꽉 채워 넣었다. 이것들을 녹일 방법을 찾아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떠날 채비를 마친 소군악은 홀의 입구에 서서 흑룡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흑룡대는 들으라.”
소군악의 목소리가 홀 안 가득 울리며 메아리쳤다.
“나 소군악은 이혼환체대법을 시행해 이 몸을 얻었노라. 내 반드시 형제들을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알아 오도록 하겠다.”
수정 안에 갇힌 채 미동도 않는 흑룡대원들. 그 모습을 눈에 새기고 마음에 새겼다. 그것은 결코 흑룡대원들을 잊지 않겠다는, 꼭 구해 내겠다는 소군악의 의지였다.
“그때까지 반드시 살아남아라! 나를 믿고 기다려라!”
비록 그 말이 저들에게 전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군악은 진심으로써 그 뜻을 전했다.
“금방…… 다녀오마.”
소군악은 수하들을 향해 절을 했다.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형제들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한목숨 내어 주겠다던 자들이었다.
500명의 추격대 앞에서도 이들을 살리고자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었건만, 뜻하지 않게 그들을 대신해 자신만이 이렇게 자유로이 살아 있었다.
안 될 일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이끌어야 하는, 꼭 자신이 지켜야 하는 소중한 이들이었다.
‘반드시 봉인을 깨고 자유를 주마.’
절대적 지침이었던 배화교의 교리도, 속박도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이 전장을 함께했던 수하들이자 우애를 나눴던 형제들이란 사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이들을 반드시 살려 내겠노라.
굳게 다짐한 소군악은 성을 나섰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방한복을 껴입은 소군악의 신형이 산 아래를 향해 내달렸다.
*
가니언 산맥의 지류엔 우뚝 솟은 서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까마득한 높이의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하늘산이라 부르기도 했고 크로크슈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너무도 험준한 그 하늘산에는 화이트 드래곤 크로크슈가 영역을 선포한 이후로 몬스터들 또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어 주던 야생 동물들의 개체 수가 증가했고, 그에 따라 인간 사냥꾼들은 하나 둘 크로크슈산을 찾았다.
500년의 세월은 드래곤의 공포가 잊히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간 사냥꾼들은 야생 동물을 사냥해도 되는 곳과 절대 들어서서는 안 되는 땅을 구분했다.
수많은 선조 사냥꾼들의 죽음으로 얻게 된 정보였다.
진하게//서른 개의 봉우리 중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높은 7개의 봉우리는 절대 들어서지 말라. 드래곤의 이빨 맛을 보고 싶은 용감한 자가 아니라면.
그 외의 변두리에서는 조심만 한다면 한두 마리의 야생 동물을 사냥해 가는 것은 가능하리라.//
사실 중심부 7개 봉우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봉우리들도 그리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도망친 채 하늘산에 숨어들어 화전을 일군 농노들과 죄인들이 모두 드래곤의 먹이가 된 적도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에 인간들이든 몬스터든 상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이 없으니 사냥꾼에게는 매력적이 사냥터였다. 크로크슈의 절대 영역에만 발을 들이지 않고, 여럿이서 몰려다니며 소란스럽게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더는 위험한데…….”
하늘산에 오른 랄프가 사슴을 쫓은 지 벌써 2주째였다. 사슴이 살자고 계속 도망쳤던 탓에 벌써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버렸다.
“도, 돌아갈까?”
랄프는 고심했다. 여기서부터는 동물들도 잘 출몰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놈을 쫓는 것에 신경이 팔려 너무 높이까지 올라와 버린 것이다.
아마 사슴도 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느라 목숨을 걸고 예까지 왔으리라.
“하지만 놈만 잡아가면 20골드가…….”
하지만 쉬이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영주성에서 나온 관리가 마을마다 방을 붙였는데, 뿔이 멋진 사슴의 머리 장식을 가져오는 자에게 20골드의 포상금을 내린다고 하였다.
20골드면 10년을 놀고먹을 수도 있고, 지미를 검술 학교에 입학시킬 수도 있는 돈이었다.
아들 지미를 생각하자 랄프는 용기가 솟구쳤다.
랄프는 눈 위의 흔적을 따라 사슴을 쫓았다.
얼마나 날랜지 호락호락 잡힐 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나마 무려 2주를 쉬지 않고 추격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쫓았으니, 자신만큼이나 사슴도 지쳐 있으리라.
랄프는 눈밭을 헤치며 산의 능선을 따라 걸은 지 한 시간 만에, 드디어 사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옳지. 올해 내 운이 좋구나.”
랄프는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 화살을 하나 꺼내 활에 재고는 시위를 당겼다.
지이이이익.
롱보우가 비명을 지르며 휘어졌다.
하나 그 소리를 듣고 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사슴이 귀를 쫑긋하더니 휙 돌아봤다.
투웅!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과 사슴이 펄쩍 뛰어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턱.
화살이 사슴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바닥에 꽂혀 버렸다.
“젠장!”
그사이 사슴이 펄쩍 뛰어 산의 비탈을 내려갔다. 사람이 내려가기에는 너무 가팔라 추격이 쉽지 않은 지형이다. 랄프는 서둘러 화살을 한 발 더 장전했다.
하지만, 표적이 움직이는 데다 성급하게 발사하느라 정확도가 낮았다.
투웅!
아니나 다를까, 또 화살이 빗나가 나무에 꽂혀 버렸다.
더 쏘아 봤자 나무가 빽빽이 자란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사슴을 맞추기는 요원했다.
또다시 인내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제기랄!”
놈을 쫓은 2주간 가장 가까이 접근했었다.
첫 발에 맞췄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착잡한 눈으로 멀어지는 사슴을 쳐다보는 랄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슈아아아아아앙! 털썩.
바람을 찢는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사슴이 튕겨져 나갔다.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보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창이 사슴의 목을 관통해 그대로 나무에 박혀 있었다.
꿀꺽.
놀라운 광경에 절로 침이 삼켜졌다. 랄프는 절로 뻣뻣해지는 목을 돌려 창이 날아온 산비탈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털썩, 털썩.
부드득. 부드득.
꾀죄죄한 외투를 입은 적발의 사내가 눈을 해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얼음성을 나선 소군악이었다.
본래 제이미의 머리칼은 옅은 금발이었는데 양의 속성이 강한 대천자마존공을 익힌 영향인지 머리카락이 붉은빛을 띠게 되었다.
본래의 몸이었을 때는 열양기공을 익혀도 머리색이 변하지는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변한 것을 보면 색목인인 제이미의 몸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저, 저…….”
랄프는 너무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 그를 봤는지 못 봤는지, 소군악은 곧장 산비탈을 내려가 창대를 뽑아냈다.
사슴은 목을 그대로 관통당해 이미 절명한 뒤였다.
‘사슴 생긴 건 중원과 똑같군.’
얼음성에서 50일간 겨우 목숨만 연명할 정도의 음식을 섭취해 온 소군악이었다.
산을 내려오며 풀뿌리라도 캐 먹을까 싶었지만, 온통 눈밭인 데다 중원의 식물들과는 다른 것이 많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무작정 산을 내려온 지 나흘이었다.
내력이라도 충만하다면 경신법을 발휘해 단숨에 하산했겠건만, 지금 그의 내력은 몸속에서 추위를 막기에도 벅찼다.
서컥!
창을 휘둘러 단번에 사슴의 목을 쳐 버린 소군악은 몸통을 뒤집어 적당한 나뭇가지에 걸었다.
핏물이 빠질 동안 소군악이 그나마 덜 젖은 나뭇가지들을 모을 때, 산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온 랄프가 말을 붙여 왔다.
“이, 이보시오.”
“…….”
소군악이 멀뚱히 랄프를 보았다. 랄프는 바닥을 뒹구는 사슴의 머리를 힐끔거리며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그 사슴은 내가 보름이나 밤잠 줄여 가며 쫓은 놈이라오.”
“내가 잡았소.”
랄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이오. 혹, 목적이 고기라면 사슴 머리는 필요 없을 테니 내게 파실 수는 없겠소?”
랄프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소군악이 잘라 낸 사슴 머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리 물은 것이었다.
소군악은 바닥을 뒹구는 사슴 머리를 보았다.
이곳에서도 녹용을 약재로 쓰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소군악에게 필요한 것은 고기였다.
“필요 없으니 가져가시오.”
소군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랄프는 환히 웃다가 소군악의 눈치를 살폈다.
‘이자는 이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르나 보군.’
랄프는 사슴의 머리를 집어 들어 가져온 천으로 둘둘 싸맸다. 그러다가 문득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주저하다가 소군악에게 말했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아무래도 찔려서 안 되겠소.”
소군악은 그새 사슴의 가죽을 벗기고 뒷다리 하나를 손질해 내고 있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들어 랄프를 돌아보았다.
“실은 얼마 전 영주님이 사슴 머리 장식을 구하며 20골드의 포상금을 걸었소. 이 정도 사슴의 뿔이면 분명 영주님의 마음에 들 것이오.”
소군악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도 사실대로 말하는 랄프가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내 욕심이 나지만 그대를 속일 수는 없겠구려. 놓고 갈 테니 솜씨 좋은 무두장이한테 맡겨 박제로 만들어 영주성에 가져가 보시오.”
랄프는 정말 아쉬운 표정으로 사슴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사슴의 뿔은 길이도 길었지만 여기저기 갈라지며 뻗은 모양이 예뻤다. 장식품으로 쓰면 훌륭한 것이 탄생할 듯했다.
소군악은 고기 손질을 계속하며 물었다.
“술 가진 것 있소?”
랄프는 소군악의 뜬금없는 말에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가져온 술이 있었다.
“있소.”
“그럼 일단 이리 와 한잔합시다.”
랄프도 온 힘을 다해 추격하느라 끼니를 대강 해결한 게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손질된 고기를 보니 시장기가 돌았다.
“좋소! 내가 불을 준비하리다.”
소군악이 등 뒤에 배낭을 메긴 했지만, 좀처럼 사냥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랄프가 서둘러 가방에서 부싯돌을 꺼내 나무껍질에 불을 붙였다.
그사이 소군악은 랄프의 몫으로 뒷다리 하나를 더 잘라 손질했다.
타닥. 타닥.
모닥불 위에 지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사슴 다리를 얹어 놓았다.
“보아하니 사냥꾼은 아닌 듯한데 예까지는 어인 일이시오?”
랄프는 조심스레 물었다.
크로크슈산이 대외적으로는 인간의 출입을 금하고 있지만 몬스터들이 없는지라 마음먹고 숨기로 작정하면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산 언저리에서 사냥하는 사냥꾼들 외에도 쫓기는 죄수들이나 포로들이 크로크슈산에 숨어들기도 했다.
랄프는 소군악이 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군악은 곰곰이 생각했다.
크로크슈의 성에서 내려왔다고 할 수는 없었다. 크로크슈가 없어진 걸 알면 욕심 많은 인간들이 그의 보물을 탐내 얼음성을 찾을 것이다.
적어도 수하들을 정체불명의 수정에서 구출해 낼 때까지는 숨겨야 할 일이었다.
“뭐, 누구나 말 못할 사정은 있는 게지요.”
소군악이 대답하지 않자 랄프는 지레 짐작으로 얼버무렸다.
상대가 죄인이든 아니든, 사슴을 한 방에 요절낸 투창술을 본 뒤다. 여기서 더 추궁을 한다면 혹여 상대가 입막음을 이유로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랄프의 생각은 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