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여운이가 또 사고 쳤어!”
“또?”
“몰라. 주선 이모한테 전화 좀 해봐.”
“그래.”
여울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인 서희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하는 고3이었다. 그런데 엄마 친구인 주선 이모의 아들, 여운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오늘 공부를 모두 망쳐버렸다.
주선 이모는 자신의 아들을 여울과 남매처럼 키우고 싶다며 이름도 비슷하게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순했던 여운은 작년까지만 해도 얌전했었다. 그런데 중3이 되더니 사춘기적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물!”
“안 그래도 물 올려놨어.”
“그냥 찬물 주면 안 돼?”
“안 돼!”
서희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전기포트에서 딸깍하는 소리가 났다. 서희는 컵에 뜨거운 물을 반쯤 따르고 그 위에 찬물을 따랐다.
“천천히 마셔!”
여울이는 서희에게 컵을 건네받자마자 보란 듯이 벌컥대며 입안에 물을 들이 부었다.
“아, 보리차 맛있다.”
여울은 서희를 닮아 보리차를 좋아했다.
‘띵동!’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서희는 혼잣말을 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던 그녀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서희의 시선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뭐 봤어?”
여울이 현실로 돌아온 서희에게 물었다. 곧 있을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본 서희는 여울을 보며 말없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뭔데 그래?”
여울은 궁금한 듯 서희를 졸랐다.
“너도 금방 알거야. 문부터 열어주자.”
“참! 누가 왔지? 누구야?”
“그것도 곧 알게 돼!”
서희는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닫히는 문 사이로 마당을 가로지르는 서희의 뒷모습이 유난히 즐거워보였다.
“여울아!”
“어? 주선 이모!”
여울은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를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주선은 그런 여울을 놓치지 않고 품에 가득 안았다.
“야, 우리 여울이 예뻐진 것 봐! 이제 정말 다 컸네.”
“그럼, 나도 내년이면 성인인데!”
“와! 정말? 시간 참 빠르다.”
“걱정 마, 이모도 아직 30대 같아.”
주선은 남편인 우재의 도움으로 30대의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우재 자신과 태욱, 그리고 서희도 마찬가지였다. 태욱과 서희는 원하지 않았지만 만날 때마다 늙은이들과 놀기 싫다며 억지를 부리는 주선 때문에 어쩔 수없이 함께 그녀가 주도하는 안티에이징 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우리 여울이, 못 본 사이에 거짓말도 많이 늘었네.”
“진짜야. 이모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결혼한 지도 모를걸?”
“얘, 이모 결혼한 사실은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안다.”
“하긴, 그렇긴 해.”
글로벌 기업인 WS그룹의 유일한 상속녀 주선과 천재외과의사 우재의 일상은 결혼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매스컴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지고 있었다.
“자, 인사는 그 쯤 하고, 이제 들어와서 좀 앉아.”
서희의 말에 주선과 여울은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서희는 차를 준비했다.
“우리 여운이가 또 사고 쳤다며?”
자리에 앉은 주선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여울의 눈치를 봤다.
“여운이가 얘기했어?”
“응,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쳤다니?”
주선이 여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여운이가 자세한 얘기는 안했구나?”
여울이 이모를 흘겨보는 시늉을 했다.
“응.”
“이번에는 좀 심했어.”
“뭔데?”
여울의 말에 주선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희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 듯 이야기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세계지도가 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지.”
“뭐?”
주선이 기겁을 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 이 자식을 그냥!”
주선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이모, 진정해!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을 물에 가라앉히고 중국대륙을 반으로 쪼개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떨어뜨려 놓고, 또 뭐였더라, 맞다! 유럽을 갈기갈기 조각내 놨더라고.”
“이게 미쳤나!”
“아직 안 끝났는데?”
“또 있어?”
주선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평소에 있지도 않은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게, 달을……”
“달? 하늘에 있는 그 달 말이야?”
“응, 달을 태평양에 띄워 놓았더라고.”
“헉!”
주선은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일을 듣는 내내 할 말이 없었다.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시간을 되돌리면서 보니까 여운은 달만 가져온 것 같았어. 나머지는 그 파장으로 생긴 일이고.”
“엎어 치나 매치나.”
주선은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았다.
우재와 주선의 아들인 여운은 아빠와 엄마의 능력을 모두 갖고 태어났다. 옛날 여린의 말처럼 그는 앉아서 세상만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여운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됐을 때 중력지배능력과 염력은 이미 아버지인 우재를 넘어서 있었다. 이제 여운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태욱과 여울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욱도 여운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그가 만든 공간 안에서만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아무 조건 없이 여운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오직 여울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만이 여운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고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태욱과 서희의 딸인 여울은 시간지배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는 여운이 사고를 칠 때마다 시간을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그 사이의 일들은 오직 그녀만 알고 있었다.
“자, 차 마셔.”
“고마워.”
“여운이가 달을 왜 태평양에 띄었을까?”
서희가 주선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을 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여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차를 입게 가져갔다.
“여울아, 너 뭐 짚이는 거 없어?”
서희가 여울을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 아니? 없는데.”
여울은 생각하지도 않고 잡아떼기부터 했다.
“잘 생각해 봐.”
서희는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입에 댔다.
“뭐야? 뭔데 그래?”
주선은 서희와 여울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내일이 네 생일이지?”
서희의 말에 여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올려 떴다. 그리고 곧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막았다.
“설마?”
엄마를 닮아 투명한 여울의 양 볼이 별안간 발그레해지며 분홍빛을 띠였다.
일 년 전, 두 가족이 함께 캠핑을 갔었다. 캠핑 장소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사하라 사막 어디쯤이었다. 태욱의 능력 덕분에 그들은 세계 어디든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누나, 뭐 해?”
우재는 염력으로 텐트를 치고 있었고, 태욱은 가져온 땔감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서희와 주선은 저녁 먹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아침 일찍 가기로 했었는데 우재가 이번에도 응급으로 들어온 환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해가 진 다음에나 온 우재 덕분에 섬으로 가서 물놀이도 하고 낚시도 하려던 계획을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별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여울은 그 목적에 맞게 돗자리를 깔고 누운 채, 하늘 가득 박혀있는 별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눈썹같이 얇은 초승달 덕분에 별들이 더 빛나 보였다. 그런 여울의 옆으로 여운이 다가왔다.
“별 봐.”
“예쁘다. 그치?”
여운이 여울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여울은 옆으로 몸을 움직여 여운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래. 정말 예쁘다.”
“누나!”
“왜?”
한참을 나란히 누워 별을 바라보던 여운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여울을 불렀다. 여울의 대답을 듣고서도 여운은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왜 불렀어?”
여울이 여운을 재촉했다.
“이거.”
여운이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여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여울은 몸을 일으켜 여운이 내민 상자를 받아들었다.
“생일 축하해.”
여울을 따라 몸을 일으킨 여운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생일은 내일인데?”
“알아. 가장 먼저 축하해주고 싶어서.”
“그래, 고마워.”
여울은 여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옆에서 지켜보았던 여울에게 여운은 그저 귀여운 동생일 뿐이었다.
“이게 뭐야?”
여운이 준 상자 안에는 고양이 모양의 펜던트가 들어 있었다. 목 부위에는 작은 보석도 박혀 있었다. 여운은 길고양이를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던 여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생이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샀어?”
“나, 돈은 좀 있어.”
“하긴.”
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WS그룹 회장인 외할아버지와 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외과의 아버지를 둔 여운이 돈이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거 사지마.”
여울은 정색을 하며 여운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중학생에게 받기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안 들어?”
여운이 풀 죽은 목소리로 여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 이런 금붙이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뭐 좋아해?”
여운의 질문에 여울은 대답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을 좋아해’라고 말을 하려 했다가 생각을 바꿨다. 여운이라면 진짜 별을 따다 줄지도 몰랐다. 머리를 굴리던 그녀의 눈에 초승달이 들어왔다. 그녀는 초승달보다 보름달을 더 좋아했다. 서희는 넉넉한 보름달의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보름달.”
“보름달?”
“그래, 보름달. 난 보름달 보는 게 좋아.”
“아, 보름달!”
여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름달’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겼다.
“얘들아, 밥 먹자!”
저녁 먹으라는 서희의 부름에 일어서던 여울은 초승달을 쳐다보는 여운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다.
사막 한가운데 태욱과 서희, 그리고 우재와 주선이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향기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서희와 주선은 즐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태욱과 우재의 손에는 차가운 캔 맥주가 들려져 있었다.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여울은 서희와 주선 사이에 있는 빈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모닥불에 비친 여울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로 길게 그려졌다. 여운은 그런 여울의 뒷모습을 별을 닮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두 다른 크기와 모양의 별들이 저마다의 빛을 자유롭게 밝히는 조용한 밤이었다. 한낮의 뜨거웠던 사막의 모래를 식히는 바람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일 뿐, 까만 밤하늘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