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하하하하, 흐흐흐흐흐.”
다가오는 우재를 보며 두려움에 떨던 완우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는 모습이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뭐가 우스운 거지?”
완우 앞에 멈춘 우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은 얼음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우재의 뒤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채 벽에 박혀 있는 한조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졌다. 그래, 인정하지. 크하하하하.”
완우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비실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
“안 그래도 고민 중이다.”
우재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따라 매서운 바람이 완우의 귀를 찔러댔다.
“그래, 나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우재를 쏘아보는 완우의 눈빛이 매섭게 느껴졌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우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소리에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녀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서 있는 주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오대산에 곧 도착할 가미카제 부대는 어떻게 막을 작정이지?”
“가미카제 부대?”
“흥, 설마 우리가 한조를 한 명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설마…….”
“멍청하긴, 선발대가 서울을 장악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뭐?”
“저 한조가 부대로 온다면 말이야. 크하하하하!”
“말도 안 돼!”
주선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서희도 눈동자가 흔들렸다.
“컥!”
완우와 마주 서 있던 우재가 돌아섰다. 그의 뒤로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완우의 모습이 서희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미간 사이에는 여린이 선물한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
우재가 서희와 주선의 손을 잡았다.
“할 수 있는데 까진 해봐야지.”
우재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지만 체념을 담은 눈빛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의 말에 주선과 서희도 고개만 끄덕일 뿐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주선이 우재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그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칼바람이 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서희는 몸을 관통당한 것 같은 추위를 느꼈다.
“나, 다녀왔어!”
“태욱아!”
우재가 먼저 태욱의 이름을 불렀다. 태욱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먼저 차오른 서희는 나오는 소리를 거꾸로 삼켰다.
“나, 늦지 않았지?”
서희는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태욱에게 다가가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이것이 모두 꿈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는 듯 태욱의 등을 몇 번이고 쓸고 또 쓸었다.
“그럼, 이제 오대산으로 가 볼까?”
태욱은 서희를 마주보았다.
“그래.”
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자욱이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서희는 태욱을 안고 있는 사이 옥상에서 있었던 한조와의 대결을 그에게 모두 보여주었다. 그리고 태욱이 어떻게 소우타를 제압하고 이곳에 왔는지도 보았다. 서희는 태욱의 등을 토닥였다. 새삼 그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뽀득.’
공간에서 가장 먼저 나온 서희는 발밑에서 눈이 뭉쳐지며 나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그만큼 그녀는 잔뜩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달빛을 머금은 눈이 어두운 숲 속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서희는 하늘로 길게 뻗어 있는 전나무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흐린 입김이 그녀의 눈앞을 가렸다.
‘포드드’
낯선 인기척에 놀란 새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그 소리에 놀란 전나무의 가지가 몸을 떨고, 그 위에 하얗게 핀 눈꽃들이 떨어지며 바람에 흩날렸다.
“예쁘다.”
서희는 달 아래 비친 전나무 숲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너도 참 대단하다.”
주선이 농담처럼 서희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말하는 주선도 전나무 숲에 반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깐!”
주선이 일행을 향해 손짓을 했다. 태욱의 부축을 받으며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우재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12시 방향이야.”
‘쉭!’
주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기를 찢으며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우재야!”
우재는 힘들이지 않고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잠깐’이라는 주선의 신호와 함께 서희는 주선의 시선을 모두와 공유하고 있었다. 태욱은 일행에서 좀 떨어진 곳에 공간을 만들었다.
“우재야, 부탁해!”
태욱의 말에 우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재는 육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적에게 수십 개의 나뭇가지를 날렸다.
“윽!”
우재가 날린 수십 개의 나뭇가지 중 하나가 그의 몸에 꽂혔다. 우재는 염력이 통하지 않는 한조를 그 나뭇가지를 이용해 태욱을 향해 던지듯 날려 보냈다. 태욱은 날아오는 검은 형체를 몸으로 받아내듯 껴안고 그대로 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태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그 공간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혼자였다.
“다녀왔어.”
태욱은 서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서희는 칭찬하듯이 태욱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곳에 오기 전, SA본사 옥상에서 태욱의 기억을 읽은 서희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공간 안에서의 태욱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이인 서희조차 소름을 돋게 할 정도로 두려운 존재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태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살아났다. 그냥 살아난 게 아니라 몸에 났던 모든 상처를 스스로 회복했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공간 안에서 태욱은 절대신이었다. 자신을 공격하는 소우타를 태욱은 생각만으로 그 자리에 얼게 만들었다. 서희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태욱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태욱이 공간 안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 마치 공간이 태욱을 주인으로 인정한 것 같았다. 태욱은 눈짓 하나로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우타를 지워버렸다.
“얘들아!”
주선의 긴장된 목소리에 서희는 다시 주선의 시선을 공유했다.
“헉!”
그들의 주변이 온통 검은색이었다. 마치 블랙홀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한조부대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그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천 명은 되겠는데?”
태욱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미카제라고 했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무슨 말이야?”
우재의 말에 주선이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때 활동한 가미카제 특공대가 대략 천 명이었거든.”
우재의 설명에 주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료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본 그들은 태욱 일행을 향한 살기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아까처럼 한 명씩 상대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주선이 그림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우재와 태욱은 말이 없었다. 늘 그렇듯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한조가 이렇게까지 많을 줄 몰랐다. 우재는 ‘선발대’라는 완우의 말에 기껏해야 열 명 정도 내외를 생각했었다. 사실, 그 정도도 그들이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예상이 빗나간 또 다른 하나는 그 많은 인원이 한 번에 공격해 들어오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사실, 우재는 어떻게든 이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어쨌든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인 건 분명했다. 우재는 체념에 가까운 각오를 다짐했다.
“괜찮아.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우재의 생각을 읽은 서희가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태욱과 서희, 그리고 우재와 주선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자신들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무리에서 떨어져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가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혹시, 일본어 할 줄 알아?”
“조금은?”
태욱의 말에 우재가 바로 대답했다.
“왜?”
“쟤가 뭐라고 할 것 같은데?”
주선과 태욱의 대화를 듣던 서희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총공격을 명령하려는 거야.”
“뭐?”
서희는 한조부대의 우두머리의 마음을 읽었다.
‘죽인다.’
그에게선 오직 이 한 단어만 읽혔다. 우두머리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간단한 동작 하나에 천 명의 한조가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주선만 바람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서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서희의 눈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벌어질 미래의 모습 같았다. 서희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한계는 내가 정한다!”
태욱은 여린에게 들었던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내내 마음속에 간직하던 말이었다. 그들 하나하나를 공간으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 간 것 같았다. 태욱은 자기도 모르게 공간의 입구를 더 넓게 펼치는 상상을 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 크기로만 만들던 입구였다. 태욱은 항공모함만한 크기의 공간을 이곳에 만들고 싶었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던 일이어서 자신이 없었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 명의 한조부대를 보자마자 태욱은 그들이 있는 공간 전부를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태욱은 지금까지 공간을 넓힌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됐다!”
태욱은 공간을 펼쳤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스스로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재와 주선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태욱의 공간 속에 갇힌 천 명의 한조들은 움직임을 멈춘 채 당황해하고 있었다. 태욱은 그들의 작은 동작 하나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여유를 찾은 태욱은 우두머리를 향해 인사를 했다. 우두머리 역시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우두머리였다. 곧 냉정을 되찾은 표정의 그는 다시 부하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그의 손짓에 멈춰 있던 천 명의 한조들이 다시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만!”
단 한마디였다. 태욱의 그 한 마디에 천 명의 한조들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멈춰 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의지로 멈춘 게 아니었다.
‘두려움’
천 명의 한조는 일제히 한 단어를 떠올렸다. 그들에게는 낯선 말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은 서희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