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어쩔 셈이지?”
우재는 이를 악물었다. 몸은 침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텅 빈 창고 같은 방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료카와 소우타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너희가 료카와 소우타겠군.”
아무런 대답이 없자 우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료카(涼花)는 서늘한 꽃이라는 뜻인가? 소우타(颯太)는 바람 소리?”
여전히 둘은 우재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세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진 않을 텐데.”
우재는 아예 혼잣말을 시작했다. 우재는 다른 할 말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우재는 그들 몰래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반드시 이곳에서 탈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곤란했다.
“됐어. 그 정도만 하지.”
완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재의 얼굴에 방금 전까지 있던 여유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완우를 향한 그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아, 그 정도 치료했으면 됐다고. 이거 봐, 더 이상 피도 안 나잖아?”
완우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허리만 숙여 우재의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재는 그런 완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궁금한 게 많겠지. 조금만 참아. 다 얘기해 줄 테니까.”
“뭐?”
생각하지 못했던 완우의 친절함에 우재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난 그렇게 앞뒤 꽉 막힌 사람이 아니야. 사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네 기억을 좀 읽었거든. 넌 왠지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생각을 좀 바꾼 것뿐이야. 너하고 이야기를 좀 나눠보기로 말이야.”
우재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일단, 네가 궁금해 하는 것부터 말해주지. 뭐였더라? 아, 맞아. 하도 많아서 말이야. 먼저 네 능력이 왜 통하지 않은지 궁금해 했었지? 그건 가여린 본부장 덕분이야. 그녀가 DNA를 제공해 주어서 중력지배능력에 대한 연구를 좀 할 수 있었지. 중력지배능력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그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 우연이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지.”
우재는 입을 다문 채 완우를 보고 있었다. 다만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이제야 내 말을 좀 이해하는 것 같군. 인심 쓰는 김에 좀 더 써 볼까? 그래, 또 궁금해 하던 게 뭐였더라?”
완우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흉내를 냈다.
“아, 맞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 했었지? 그래. 궁금하긴 할 거야. 이해가 잘 되지도 않겠지. 하지만 이 얘길 해줘야 네가 나와 함께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 설명해주지. 잘 들어보라고.”
완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이유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는 거지.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생각했지. 과연 나의 역할은 뭘까? 이 세상은 나에게 뭘 원할까? 궁금했지. 나름대로 알아내려고 애도 많이 썼어. 사람들의 기억을 읽는 능력이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리했지.”
완우는 두 눈을 감았다. 과거의 추억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많이도 읽어댔지. 정말 닥치는 대로 읽었어.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정말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 거야. 모두들 나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려 했어. 그리고 그제야 난 내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지.”
완우가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우재를 쳐다보았다.
“바로 돈이야! 크흐흐흐, 재밌군. 설마 다른 건 기대한 건 아니지? 하하하”
완우는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뒤로 꺾어가며 웃기 시작했다. 우재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진심을 읽으려 애쓰고 있었다.
“정말 세계정복이니, 유토피아 건설이니 이런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 응?”
겨우 웃음을 멈춘 완우는 우재에게 놀리듯 말했다.
“그렇다면 실망인데? 그렇게까지 순진할 줄은 몰랐거든. 크흐흐흐”
완우의 웃음소리와 함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우재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는 생각을 했다.
“어때? 난 복잡한 건 질색이야. 돈! 명료하잖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세계정복? 돈만 많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어. 힘으로 세계정복해서 뭐할 건데? 안 그래? 너도 네 아내가 너보다 돈이 더 많다는 게 계속 불만이었잖아. 응?”
예상하지 못했던 완우의 말에 우재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완우는 그런 우재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아무래도 여자가 자기보다 돈이 많으면 어떤 남자라도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야. 그게 바로 남자란 동물의 본능이거든.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항상 우위에 있고 싶어 하지. 어때? 나와 함께 하면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잊고, 꿈도 꾸지 못할 만큼의 돈을 갖게 해주지.”
말을 마친 완우는 우재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우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어.”
우재가 입을 열었다. 침묵이 이 이상으로 길어지면 자칫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뭐지?”
다행히 완우는 아직 우재에게 기회를 더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돈이 목적이라면 왜 권력까지 노리는 거지? 네 능력정도면 굳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돈을 모을 수 있을 텐데.”
“하하하. 마음에 드는 질문이군. 좋아. 설명해주지. 역사를 보면 말이야 상업이 번창한 도시국가들은 항상 도적들의 먹잇감이 되었지. 돈만 많아서는 안 돼. 그걸 지킬 힘도 필요한 거야. 그래서 용병들이 생겨난 거지. 그런데 이 용병들이란 게 또 돈에 따라 편을 바꾸거든.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나는 내 재산을 지켜줄 군대가 필요한 거야. 그런데 군대를 소유하려면 나라를 세워야 하잖아? 현대 사회에서 나라를 새로 만든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일단 국민을 만들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이 나라를 접수하기로 한 것뿐이야. 어때 대답이 됐나?”
완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우재를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꽤 괜찮은 대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일본은 왜 끌어들인 거지? 너라면 일본의 도움 없이도 이 나라를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흠, 그래. 그것도 궁금할 수 있겠어.”
완우는 슬슬 지겨워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오래 끌어보려는 우재의 속셈을 아직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우재는 긴장을 너무 오래한 나머지 그대로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전부 설명해주지. 나도 처음부터 일본을 끌어들이려 했던 건 아니야. 원래는 그냥 우리나라부터 시작하려고 했지. 소박하게 말이야. 그런데 3년 전, 촛불집회를 보고 갑자기 깨달은 게 있었어. 이 민족은 애초에 정복이 불가능하구나.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같은 역사를 봐도 그래. 소위 지도자라는 것들이 모두 도망가도 민중들은 버텨냈어.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말이야. 사실, 그게 가장 무서운 거야.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목숨까지 바친다는 것 말이야. 부러지지 않는 꿋꿋함, 더디더라도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려는 그 고지식함에 질려버렸어. 정말 이들의 민족성은 어떻게 할 수 없겠구나. 그런데 말이야. 고쳐서 쓸 수 없는 물건은 어떻게 할까? 당연히 버리지. 안 그래? 고쳐서 쓸 수 없으면 버릴 수밖에. 그래서 그냥 버리기로 한 거야. 그리고 대신 쓸 수 있는 걸 찾아야지. 그래서 나도 대신 쓸 수 있는 걸 찾은 것뿐이야. 의외로 쉽게 찾았지. 멀지도 않은 곳에 있더군. 바로 일본 말이야. 가치판단을 벗어난 맹목적인 충성, 개인행동을 억압하는 사회문화, 모든 게 완벽했지.”
열변을 토한 완우는 자신의 대답에 심취해 있었다. 자신이 한 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본총리는 어떻게 설득했지?”
우재는 그의 기분이 변하기 전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건 어렵지 않았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문에 새로운 영토가 필요한 참이었거든.”
“군인은 그렇다쳐도 일본 국민 전체를 옮기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래서 4대 산맥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한반도 곳곳에 공간이동장치를 만들고 있잖아.”
완우의 대답을 듣는 우재의 머릿속에 4대산맥 사업이 일본침략의 발판이라고 주장하던 여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린을 믿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처음 들었을 땐 어쩐지 너무 허황된 얘기 같았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범하면 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북한까지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우재는 마치 질문을 준비해온 사람 같았다.
“그야 당연하겠지.”
완우는 우재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읊은 대사를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어.”
완우는 우재의 말을 듣고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설마, 그걸 노린 거냐?”
“아니지. 내가 원하는 건 전쟁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전쟁을 통해 얻게 될 부와 권력이야.”
완우는 우재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우재의 표정을 천천히 관찰한 후 입을 열었다.
“정말 돈이 목적인거냐?”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당연히 돈이지.”
완우의 말투에서 대답하기 귀찮아 한다는 게 느껴졌다.
“돈으로 뭘 할 생각이지?”
“질문이 잘못 됐군. 돈으로 뭘 할 건지가 아니라 뭘 하지 않을 건지를 물어 봐야지.”
“그럼……”
“그만. 시간낭비는 이제 그만하지.”
완우가 우재의 말을 끊었다. 그는 우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너는 내 편이 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괜찮아.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우재는 다시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가 있어.”
완우의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료카와 소우타가 모습을 감췄다. 방 안에는 우재와 완우와 둘만 남아 있었다.
“내가 비밀 하나만 얘기해주지. 너는 지금부터 아무 생각 없는 로봇처럼 내 명령대로만 움직이게 될 거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내릴 첫 번째 명령은……”
완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재를 쳐다보았다. 우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완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태욱과 서희의 딸, 여울이를 납치해 오는 것이다.”
“뭐?”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네 기억을 전부 읽었다고 말해 줬잖아. 공간지배자와 예언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니. 정말 좋은 실험재료가 되겠어. 크흐흐흐.”
우재는 얼굴을 찡그렸다. 완우의 가래 끓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긁고 지나갔다. 완우는 우재의 표정을 무시한 채, 두 손을 들어 우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아아악!”
우재가 평생 동안 한 번도 내지 않던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우재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완우의 입에서 음침한 느낌의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에서 솟은 식은땀이 바닥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능력자들이 모인 집단인 SA그룹에서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읽는 능력만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완우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숨겨진 능력은 그와 함께하고 있는 료카와 소우타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완우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었다. 기억을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체력소모가 있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는 기억 조작을 통해 없는 사실도 있었던 것처럼 만들고, 반대로 있었던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기도 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을 자신의 말이라면 자살도 마다하지 않을 충직한 부하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의 기억조작 능력을 아는 사람은 SA그룹 수뇌부 내에서도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직속 부하였던 여린도 그의 조작능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기관리에도 철저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지금 그를 이 자리까지 오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