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서희는 이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서희야!”
주선은 쓰러지는 서희를 부축해 한 쪽에 마련된 간병인 침대에 눕혔다. 그들이 있는 곳은 우신종합병원의 VVIP실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권경현이 누워 있었다. 태욱과 여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니!”
건물에서 떨어진 여린은 태욱과 서희, 그리고 정신을 잃은 주선까지 모두 안전한 걸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태욱과 서희는 여린의 몸 여기저기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을 그제야 발견했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다.
“으…….”
일행과 떨어진 곳에서 낯선 신음소리가 들렸다. 태욱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권경현이었다. 주차된 차의 지붕위로 떨어진 그는 놀랍게도 숨이 붙어 있었다. 주선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급하게 공간을 만든 태욱은 서희와 함께 경현을 포함한 그곳의 모두를 데리고 사라졌다.
경호의 도움으로 경계가 삼엄한 우신종합병원 VVIP실에 도착한 태욱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권경현을 의료진에게 부탁하고 서희와 함께 주선과 여린을 돌보았다. 주선과 여린은 거의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우재는?”
정신을 차린 주선은 우재부터 찾았다. 서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태욱과 여린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야? 왜 그래?”
주선은 애써 모르는 척 했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그들의 행동과 표정이 이미 주선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야. 그치? 우리 우재 어딨어?”
서희가 울먹이며 주선을 끌어안았다. 주선은 가만히 있었다.
“뭐야, 장난이지?”
주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태욱아, 우리 우재 좀 불러 줘.”
태욱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선생님, 아니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린의 눈에서도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니야. 난 안 믿어! 아니, 못 믿어!”
주선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사람 같았다.
“주선아.”
주선을 끌어안은 서희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아니야.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절대 못 믿어!”
“주선아.”
여린이 주선을 불렀다.
“선생님이죠?”
여린을 보는 주선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무언가를 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성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분노와 경멸만 남은 눈빛이었다.
“주선아!”
주선을 부르는 여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어!”
“주선아!”
서희가 주선을 말리고 나섰다.
“너도 속은 거야!”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주선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렇게 매서운 눈빛을 한 주선을 처음 보았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서 이성이 마비된 사람 같았다.
“주선아!”
이번엔 태욱이 나섰다.
“너는 뭐했어? 지금이라도 우리 우재 데리고 와! 그래! 태욱아! 너라면 할 수 있잖아. 그치? 할 수 있지? 응?”
금방이라도 태욱을 죽일 것 같이 쏘아보던 주선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태욱에게 애원하듯 매달리기 시작했다. 태욱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선아, 그만해!”
서희가 태욱에게서 주선을 떼어놓으려 그녀를 잡았다. 하지만 주선은 이미 서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짝!’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주선은 자신도 모르게 뺨을 감싸 쥐었다. 한 쪽 볼이 얼얼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차려!”
여린이었다.
“난 선생님 안 믿어요!”
정신을 차린 주선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주선의 눈빛은 확실히 아까와 달라져 있었다. 평소 주선의 눈빛이었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고요!”
태욱은 곤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희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여린은 주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세요.”
주선의 말은 차가웠다. 아까처럼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표정은 냉정했지만 동시에 지극히 이성적인 얼굴이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여린은 가만히 주선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실문을 열고 나갔다.
“선생님!”
태욱이 여린을 따라갔다.
“우재 찾으러 가야지.”
주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희와 주선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희는 자신이 본 우재의 마지막 모습을 차마 주선에게 말하지 못했다. 주선은 우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서희의 말에 주선은 말없이 병실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이동침대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경현이 누워있었다. 응급처치를 끝낸 의료진이 경현에 대해 물었을 때, 감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여린과 태욱이 그를 이곳에 두기로 결정했다.
“응?”
주선의 시선이 권씨를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서희는 주선과 권씨를 번갈아 보았다.
“저 사람의 기억을 읽으라고.”
주선은 서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여전히 차갑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아, 그래! 그러면 되겠다!”
서희는 이제야 주선의 생각을 알았다는 듯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서희는 처음 겪어보는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느라 잠시 논리적 사고가 마비되어 있었다. 그들과 한패였던 권씨의 기억을 읽으면 분명히 그들이 우재를 데려갈 만한 곳을 알 수 있을지 몰랐다. 물론 모두 우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전제하의 일이었다. 서희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우재의 마지막 모습을 떨쳐내기 위해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서희도 우재가 몹시 보고 싶었다.
“잠깐만!”
서희는 서둘러 경현의 머리에 손을 댔다. 눈을 감고 평소보다 더 집중했다. 어두운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깜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멀미가 나는 것도 같았다. 구토가 올라오는 걸 겨우 참았다. 칠흑 같이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벽에 부딪혔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벽을 더듬었다. 다른 쪽도 벽이었다. 반대쪽도, 그 옆도 벽이었다. 사방이 다 막혀 있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서희를 잡아 끌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희는 반항할 틈도 없이 깊은 어둠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서희야!”
주선은 경현의 곁에 그대로 주저앉듯 쓰러지는 서희를 간신히 받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