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힘 드시죠?”
무대 위에 있던 가속이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그의 뒤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보였다. 무대를 중심으로 수십만 개의 촛불들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네!”
무대 밑에 있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가속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소리가 광화문 전체를 울렸다.
“참, 피곤합니다. 그죠? 그래도 할 건 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네!”
사람들이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참, 걱정입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여러분도 다 들으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나오셨겠죠. 파라다이스TV, 요즘 가장 핫한 프로그램이죠?”
가속은 매끄럽게 진행을 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파라다이스TV의 두 주역, 김준 대표님과 주진실 기자님을 모셨습니다.”
가속의 신호에 무대 뒤에 있던 김준과 진실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준과 진실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여러분, 박수 한 번 쳐주세요.”
가속이 먼저 박수를 쳤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광장을 채우고 있던 촛불들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에 서희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촛불의 모습은 언제 봐도 환상적이었다. 언젠가 태욱과 함께 보았던 몽골사막 밤하늘의 별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서희야, 이쪽이야.”
주선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서희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일행의 가장 앞에 있는 여린이 그들의 목적지인 방문을 열고 있었다. 방문에는 ‘본부장’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들은 SA본사에 몰래 들어와 있었다.
‘딸깍’
잠겨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처음부터 느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더 강하게 그녀의 가슴을 압박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서희는 이곳에 오기까지 의심할 만한 것들이 없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자고 한 건 여린이었다.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주선과 서희는 우재의 피부과 개원과 태욱의 개인금고사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린이 할 말이 있다며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폭탄을 터뜨렸다.
“4대 산맥사업을 막아야 해!”
“왜죠?”
경호였다. 물론 그도 4대 산맥사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공약으로 내세운 정책을 막을 명분은 없었다. 그리고 그럴만한 힘도 없었다.
“그 사업은 일본의 침략을 위한 것이니까.”
“네?”
“뭐라고요?”
“말도 안돼요!”
여린의 말에 모두 경악했다. 그만큼 모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린의 말은 그들 모두의 머릿속에 ‘일제 강점기’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승박은 이완우의 꼭두각시야. 아노 키오 일본 총리도 마찬가지고.”
여린이 모두가 차분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완우는 일본 전체를 한반도로 옮길 생각이야.”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경호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4대 산맥사업. 그 공사가 그걸 가능하게 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고 있기로 4대 산맥사업은 산림체질개선 프로젝트였다. 정부는 분명히 그렇게 설명했다. 물론 주선도 4대 산맥사업 자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어도 그 사업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4대 산맥 사업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산림체질개선 프로젝트가 아니야.”
“그럼 뭐죠?”
우재도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공간지배능력에 대한 연구가 20년 넘게 이루어졌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설마?”
태욱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일본 SA연구소에서 공간이동 연구에 대한 성과가 있었다는 보고가 있었어.”
“그렇다면 4대 산맥 사업이 나무 심고 올레길 같은 걸 만드는 게 아니라 일본자위대가 쳐들어 올 입구를 만드는 거라는 말인가요?”
우재가 여린에게 질문을 했다. 모르는 사실을 묻는다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맞아. 그리고 그 군대는 아마 일본군 최정예일 거야.”
“맙소사.”
태욱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여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일이었다.
“이 사실을 또 누가 알고 있죠?”
경호였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당신의 말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있나요?”
“있어요.”
“지금 볼 수 있나요?”
경호는 여린을 몰아세웠다. 그만큼 그는 지금 마음이 바빴다.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증거가 필요했다.
“지금은 곤란해요.”
“왜죠? 설마 증거가 없는 건 아니죠?”
“증거는 확실히 있어요. 다만……”
여린이 말끝을 흐렸다.
“다만?”
경호가 대답을 재촉했다.
“증거가 어디 있는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주선이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증거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
“거기가 어딘데요?”
여린이 대답을 망설였다. 모두가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여린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SA본사.”
“맙소사.”
숨을 죽인 채 여욱의 대답만을 기다리던 태욱이 탄식과 함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방 안에 있던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미안해. 나도 이완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우리한테는 태욱이 있잖아요.”
주선이 밝은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선의 말에 서희와 경호의 표정도 이내 밝아졌다. 밝지 않은 태욱의 표정을 확인한 우재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여린이 찬물을 끼얹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SA본사는 공간지배를 막는 장치가 있어서 태욱의 능력은 쓸 수 없을 거야.”
“뭐라구요?”
주선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태욱은 5년 전 잠수함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5년이라면 그들의 연구가 더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창조하는 공간까지 막을 수 있다는 여린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그 본사의 책임자로 있던 여린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