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위해 오늘 오전, 아노 키오 일본 총리가 방한했습니다. 이승박 대통령은 취임식이 끝난 후, 아노 키오 일본총리와의 비공식 회담을 가질 예정입니다.”
“소우타, 라디오 좀 끄지.”
완우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남자가 라디오를 껐다. 창문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을 감상하던 완우는 창문을 조금 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가 탄 차가 인천공항을 빠져나왔다. 그는 지금 막 일본총리와 같은 비행기에서 내렸다. 일본총리가 공항로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완우는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흠, 20년 만인가?”
오랜만에 귀국한 탓인지 완우는 그답지 않게 감상에 빠져들었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서른 살, 그는 아무 것도 없이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말 한 마디로 일본 총리도 갈아치울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대중이 그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막강한 힘이었다.
“료카, 가여린 본부장하고 연락은 어떻게 됐어?”
“아직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완우의 말에 조수석에 있던 여자가 완우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어설픈 한국말로 대답했다. 완우는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반드시 한국어를 사용했다. 애국심이라기보다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기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완우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오른팔인 이근택에게서 온 마지막 연락이 한 달 전이었다. 그 이후로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근택은 완우가 한국을 비운 20여 년 동안 완우를 대신해 한국의 모든 일을 처리한 능력 있는 부하였다. 평소의 그라면 바로 한국으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 계속 있었다. 일본에서 반드시 그가 직접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 전에 마무리되었다. 그는 뭐든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남을 잘 믿지 못했다. 이근택은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완우는 근택의 마지막 보고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뭔가 중요한 걸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동부아시아 책임자인 여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여린은 정기적인 보고 외에는 따로 연락해오는 일이 없었다. 여린에게 근택의 일을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바로 접었다. 둘은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우타, 호텔 가기 전에 본사부터 들르지.”
“알겠습니다.”
완우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남자 역시 어설픈 한국말로 대답했다.
“앗, 총책임자님!”
완우는 SA본사에 들어서자마자 제지부터 당했다.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23년 만의 방문이었다. 경비원이 처음 보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문을 열어준다는 건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완우는 제지를 당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경비원의 연락을 받고 내려온 직원이 그를 알아보았다. 일본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떻게…….”
그의 얼굴에서 비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미리 알려 주셨으면 공항에 마중 나갔을……”
“됐어. 가여린 본부장은?”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직원의 말을 완우가 자르고 들어갔다.
“저, 그게…….”
직원이 말의 끝을 또 흐리기 시작했다. 참을성이 점점 바닥이 나기 시작한 완우는 직원을 노려보았다. 이 직원은 반드시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완우의 눈빛에 기가 질린 것 같은 직원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끝맺었다.
“뭐? 이유가 뭐야?”
“저도 잘…….”
직원이 또 말을 흐렸다. 완우는 이 직원을 빨리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본부장 방으로 가지.”
“거기는…….”
직원이 완우의 길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완우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료카와 소우타가 완우 앞으로 나서며 직원의 어깨를 짚었다. 번개보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단정한 검은색 슈트를 입은 둘은 무표정한 표정까지 닮아 있었다. 직원은 그대로 얼어버린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비켜!”
완우의 목소리에서 조금씩 분노가 흘러나왔다. 그의 직감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가여린의 방에 들어선 완우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이 여린이 출근을 하지 않은 첫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녀의 방은 적어도 한 달 이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게 확실했다.
“아까 그 놈, 잡아와!”
완우는 돌아보지 않은 채, 뒤에 서 있던 료카와 소우타에게 지시를 내렸다. 둘이 다시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사이에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는 예의 그 직원이 울상을 한 채 잡혀 있었다. 료카와 소우타를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냥 물어볼 수도 있지만, 네 말투가 싫어서 이 방법을 써야겠다.”
“네?”
완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직원의 머리 위에 얹어놓았다. 직원은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곧 완우의 눈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뒤집어졌다. 직원은 의식을 잃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여린!”
잠시 후, 원래의 눈동자로 돌아온 완우는 불을 내뿜는 것 같은 일갈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완우는 직원의 기억에서 여린의 지시로 근택의 시체를 치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여린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거짓보고를 올리는 장면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완우는 정신계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상대방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상당한 체력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강력한 능력임은 분명했다. 절대 알려지면 안 되는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꽤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그 능력을 통해 쉽게 부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 비밀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가지 이상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감히, 배신을 해!”
완우의 두 눈이 여린에 대한 분노로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