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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정상인 병동
작가 : 쉐리
작품등록일 : 2017.10.30

대한민국 청소년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때가 언제인 줄 아는가?
바로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시기이다.
한명, 두명씩 사라지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유서'를 남긴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그저 '자/실사건'으로 취급한다. 자살인지 실종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자/실사건에 설화의 친구 다은이 휘말리게 되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설화는 의외의 장소에서 다은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그들이 마주친 곳은..?

인간의 심리를 다룬 이야기.

 
13화
작성일 : 17-10-30 14:51     조회 : 276     추천 : 0     분량 : 9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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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에 느껴지는 푹신함에 이상한 기분이 든 설화는 눈을 떴다. 어느새 설화의 머리 밑에는 베개가 놓여 있었고 푹신한 이불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었다. 혹시 누가 왔나 싶어 문 쪽을 보는데, 햇빛이 비치지 않는 문 옆 구석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쪼그려 앉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었다.

  “누구, 누구야!”

  겁에 질린 설화의 외침에 잠이 깼는지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니?”

  어제의 평상복차림 그대로인 유 원장의 초췌한 모습이 보였다. 설화가 놀라며 경계하자 그녀는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말을 했다.

  “어제는 미안해, 많이 아팠지?”

  무슨 꿍꿍이일까 싶어 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무서워서 그랬어. 네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사라질까봐 너무 두려웠어. 그렇지 않아도 요새 사람들이 자․실 사건을 의심하고 있어. 납치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이야. 미칠 것 같아. 난 너희를 잃고 싶지 않은데 자꾸 방해하니까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왜 그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거죠?”

  설화의 질문을 받은 유 원장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희는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야. 너희들이 없으면 나는 빈껍데기일 뿐이야. 아이들이 여기에 오면서 난 진짜로 웃기 시작했어. 부모에게서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그 애들이 준 거야. 날 필요로 하고 항상 반겨주는 모습이 정말 기쁘고 좋았어. 나보고 대리만족이라고 했지.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아이들이 즐거워하면 나도 즐거웠으니까. 너희가 없는 이 집은 너무 허전할 것 같아. 난 너무 외로울 거야.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미치도록 쓸쓸해져. 부탁이야, 가지 말아줘. 내 곁에 있어주라. 해달라는 건 다 해줄 테니까 제발 떠나지마.”

  펑펑 우는 그녀의 모습에서 병원장의 당당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한참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그녀는 손수 차린 것으로 보이는 밥상을 설화에게 내밀었다. 밥과 반찬은 모두 양이 매우 많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모레에나 오게 될 거야. 여기 빵도 몇 개 놔두고 갈게. 부디 조금만 참아줘.”

  그녀는 문을 나서다가 설화에게 등을 돌린 그대로 들릴락 말락 하게 말했다.

  “정말 미안해, 넌 날 이해해줄 거라 믿어.”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유 원장은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설화는 밥상 앞에 다가갔다. 밥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심하게 허기가 져서 밥을 한 숟가락 떠 입안에 넣었다.

  “맛있네.”

  생긴 모습은 어설펐지만 된장국도, 시금치나물도, 불고기도 모두 맛있었다. 꾸역꾸역 밥을 입에 쑤셔 넣던 설화는 목이 메어왔다. 이것들을 다 만들었을 유 원장의 진심이 느껴진 탓인지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인지, 목이 콱 막혀서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상을 한 쪽에 밀어 놓은 설화는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면서 앉아있었다. 파랗던 하늘은 시간이 지나 유 원장의 머리카락처럼 검게 변했다. 구름에 가렸는지 달빛조차 비추지 않아서 창고 안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에 휩싸였다.

  설화는 유 원장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강해보이던 그녀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설화에게 울며 부탁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설화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조금이라도 바깥 바람을 쐬고 싶은 생각에 설화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창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아니, 열지 못하도록 막혀있다고 하는 게 옳겠다. 허무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창문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우연히 빛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어지럽게 쌓인 상자들 틈에서 반짝 반짝 빛을 내는 물체를 보게 되었다. 그 물체는 먼지가 가득 쌓인 작은 서랍장이었다. 나무에다가 옥빛으로 감싸져있는 서랍장은 총 두 칸이었는데 둘 모두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직감적으로 귀중한 게 들어있다고 생각한 설화는 자물쇠를 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손으로 떼어 보려고도 하고, 단단한 물건들로 내리쳐보기도 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오기가 난 설화는 마지막으로 서랍장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자물쇠뿐만 아니라 서랍장에도 충격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설화는 서랍장을 몇 번 더 바닥에 내리 던졌다. 결국 자물쇠는 부숴 졌지만 서랍장 또한 금이 가 있었다. 설화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다양한 청소년 연극 포스터와 대본들이 들어있었다. 포스터는 모두 찢어진 조각을 테이프로 정성스레 붙여져 있었다. 연극의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대본은 겉표지에 <우리들의 맹세>라고 쓰여 있었다. 종이가 아주 오래됐는지 너덜너덜해지고 손때가 많이 묻어있었다. 종이를 넘겨보다가 유 원장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녀는 주인공들 중 한 명이었다. 설화는 왜 연극대본에 그녀의 이름이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것들을 다시 넣어두고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곳에는 대본과 마찬가지로 많이 낡은 공책 한 권이 있었다. 검은 표지로 감싸진 공책은 꽤 두꺼웠다. 설화는 조심스레 안을 펼쳐보았다. 안에는 정갈한 글씨로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그 글은 일종의 수필처럼 보였다. 글은 ‘나는 병을 가진 의사다’라는 말로 서두를 열고 있었다. 내용을 전부 보지 않아도 짐작으로 설화는 ‘나’가 유 원장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그녀는 의사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외동딸이었다. 그녀를 낳은 뒤 어머니는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하셨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셨다.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부모님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시작했다. 대대로 해오던 종합병원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녀는 의사로 키워져야 했다. 어렸을 때는 그녀도 부모님의 뜻을 따라 의사를 꿈꾸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자, 다른 꿈이 그녀의 가슴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된 그녀는 다른 보통의 아이들처럼 텔레비전도 보고 싶었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고도 싶었다. 하지마나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공부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감옥에 갇힌 죄수 같은 생활을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바깥세상과 접하게 된 것이 바로 ‘연극’이었다. 연극부의 고문이기도 했던 중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연극 공연을 보여 주셨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설득하신 덕분에 학원을 빠지게 된 그녀는 반 아이들과 다 같이 극장에 갔다. 처음 해보는 일탈에 그녀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연극은 「우리들의 맹세」라는 청소년들의 연극이었다. 연극부 동아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게 되지만 좌절하지 않고 힘을 내서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내용의 극이었다. 청소년 연극제에서 행해지는 고등학생들의 연극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다. 무대의 화려함부터 배우들의 대사와 표정, 손짓 하나하나까지 모든 게 다 멋져 보였다. 그녀는 연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 그녀는 담임선생님께 부탁드려서 연극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모님께는 수학부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발성법을 배우면서 성량을 키워갔고, 행동묘사 연습을 하면서 연기를 배워나갔다. 이 세상에 공부 말고도 재밌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하는 것이 아주 즐겁고 행복했다. 학교에 가는 게 좋고, 내일이 기대되었다. 그것은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그녀는 의사가 아니라 배우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서도 계속 연극부에 들었다. 2학년 때는 2년마다 열리는 축제가 있어서 연극부 활동이 바빠졌다. 축제에서 그녀를 연기에 발 담게 한「우리들의 맹세」라는 작품을 각색해 공연하기로 결정되었고, 그녀는 5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을 맡았다. 연극 준비에 몰두하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녀의 성적은 상당히 떨어지고 말았다. 학교에 찾아온 부모님은 성적이 떨어진 이유가 연극부 때문임을 알고는 격노하셨다. 그녀는 그날로 연극부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그녀가 부모님께 연극부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며 나중에 배우가 되겠다고 말하자, 부모님은 그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는 학교를 쉬게 했다. 그리고 방안에 그녀를 거의 가두다시피하고 날마다 정신과, 심리상담 등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그녀에게 의사가 얼마나 좋은 직업이며 배우의 단점은 어떠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말해댔다. 아버지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시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진로를 바꿀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참다못한 부모님은 그녀를 자퇴시키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곳은 번화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영화나 연극은 물론이거니와 텔레비전도 없었다. 외진 곳이라 그녀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감시자와 유모를 붙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낯선 땅, 낯선 곳에 그녀는 혼자 남겨진 거나 다름없었다. 부모님께서 화를 푸시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희망은 절망으로 돌변했다. 그녀는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사가 되는 것, 그 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의사가 되기 위해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연기를 하고 싶어서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무너졌지만 견디고 또 견뎠다. 그렇게 참으며 모든 과정을 마치고 ‘의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없던 수 년 동안 나라의 상황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것도 너무도 추악하게 바뀌어 있었다. 사회는 현대화 되어 갔는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퇴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하는 대신 돌아가는 시계바늘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하고 내일이 오지 않을 듯이 삶을 살았다. 아이들조차도 꿈을 품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 병원에서 몇 년 간 병원 일을 배우다가 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환갑이 넘은 부모님은 쉬기를 원했고, 그녀에게는 이미 예정된 일이라 조금 이르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삼십 대 중반에 대기업 수준인 병원을 운영하게 된 그녀는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힘든 과정을 겪으며 굳건해졌기 때문이었는지, 나라의 경제위기 상황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일이 익숙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에게, 병원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거짓 미소를 짓고 있던 것이다. 질척질척한 진흙에 빠진 것 같은 마음을 숨기고 즐거운 듯이, 아주 너그럽게 웃었다. 쌓여가는 돈을 보면서 그녀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아이들이 이룰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병원 옆에 조그만 2층짜리 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을 때마다 아이들을 찾으러 다녔다. 처음에는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청소년들을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원하는 걸 하게 해줘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그녀의 집을 감옥이라 말하며 자유롭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감옥이 아닌 천국으로 생각할 만한 아이들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세미나를 갔던 지방대 병원 옥상에서 자살을 하려는 종혁을 보게 되었고, 그 아이가 첫 번째로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뒤로 그녀는 자살할 것 같은 아이들을 찾게 되었다. 병원에 오는 환자나,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기운이 없고 슬픔이 가득 담긴 눈을 가진 아이들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주시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하나 둘 씩 집에 데려와 어느 새 방들이 거의 다 차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꿈을 찾게 해준 뒤, 바로 돌려 보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겁이 났다. 그녀처럼 그들도 꿈이 짓밟힐까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거나 현실에 의해 꿈을 포기하게 될까봐 걱정됐다. 그래서 아이들을 가두었다. 아무도 건물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6개월마다 한 번씩 연극을 했다. 아이들을 지하 창고에 가두고 연구원들을 불러 실험실처럼 보이게 했다. 지하 창고에서 아이들이 괴로워할 거라는 걸 짐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안식을 찾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괴로울까봐, 다시 예전의 악몽 같던 시간들이 생각날까봐 두려워서 드라마나 연극, 영화 등 공연을 볼 수 없었기에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는 말도 못하게 많았다. 그런 답답함과 불안들을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해소하곤 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거워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다그치는 사람도, 끔찍했던 괴로움도 없는 이곳이, 원하는 걸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곳이 천국 같다고 했다. 그녀는 영원히 이대로 살 수 있길 바랐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그들의 그러한 행복은 일시적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돌아가고 싶어진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건물의 모든 문을 없애고 자신의 방과 창고에만 문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창고에 가두게 될 때마다 그녀는 ‘나가도 돼’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 때, 아이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안전하게 있는 그들을 볼 때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있어줘서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글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설화는 한 편의 자서전 같은 글이 담긴 공책을 가슴에 가만히 안았다. 유 원장도 아픈 상처를 지닌 사람이었다. 누구의 불행이 더 심한지 그 정도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그들보다도 유 원장의 삶이 더 괴로웠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그들은 젊고 다시 시작하기에 충분한 나이이지만, 유 원장은 이미 많은 길을 걸어왔고 그것들을 다 포기하고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지나있었다. 그녀는 결국 마음의 방 한구석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응어리를 품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꿈을 포기할 수박에 없었던 그녀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설화는 연민의 눈물을 흘렸다. 설화는 꿈 없이 살았던 자기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설화의 하루하루가, 그 자유스러웠던 나날들이 유 원장에게는 간절히 원했던 일상이었다. 차라리 그녀와 인생을 바꿀 수 있었더라면 유 원장은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왔다.

  유 원장의 글 속에서 설화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설화와 유 원장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설화도 그녀처럼 어렸을 때 부모님의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가까이에 부모님이 있었어도 어리광조차 마음대로 부리지 못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되도록 부모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설화도 사랑받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예뻐해 주고 보듬어주길 바랐다. 부모님의 뜻을 따라 수동적으로 살게 된 이유도 애정을 받고 싶어서였다. 부모님이 인정하실 만한 실력이 되면 사랑해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묵묵히 외로움을 견뎌온 것이었다. 유 원장만큼이나 설화도 너무 쓸쓸했다. 유일하게 귀여워해주던 언니들이 모두 외국으로 간 후에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있었지만 다들 공부 잘하는 설화에게서 도움을 받으려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설화 자신도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설화는 다은을 만나기 전까지 학교에서 혼자 생활했다. 다은이는 친구들도 있었고 인기도 많은 편이었지만 설화는 조용히 공부만 하는 편이라 반 아이들의 관심 밖이었다. 같은 특별활동 부를 하게 되었을 때, 다은이는 먼저 설화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설화야 안녕. 너도 독서부야? 책 좋아해? 난 그냥 들 게 없어서 이 부서로 선택한 건데….’

  ‘나도 책….’

  설화는 이때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 그냥 자리 남아서 온 거야.’

  ‘그래? 나랑 같구나. 그래도 혼자되지 않고 너랑 같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 때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웃던 다은이의 모습을 설화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를 설화만큼이나 잘했던 다은은 한 번도 설화의 필기공책을 빌려달라거나 숙제를 대신 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에 설화의 취미나 좋아하는 음식 등을 물어보곤 했다. 그런 관심이 정말 고마웠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다시 같은 반이 됐을 때는 정말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설화는 다은에게 마음을 모두 열었다. 진심으로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또 다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생각에 미치도록 슬펐다. 그렇듯 지독한 외로움을 경험한 설화이기에 유 원장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설화는 어두운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두 눈에 눈물이 고여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곳처럼 유 원장이 있던 곳도 음침하고 무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자신의 상황이 어린 시절 유 원장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설화는 눈을 감아보았다. 그러자 어두운 방안에 쪼그려 앉아 찢어진 연극 포스터를 울면서 테이프로 붙이는 어린 그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아이는 한 조각 한 조각 정성스럽게 포스터를 붙여나갔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롭고 가여워서 설화는 팔을 뻗어 그녀의 작은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아이는 설화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제발 도와줘요.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아직 무대에도 한 번 올라가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한 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무대 위에 서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모든 걸 다 잊고 공부만 할게요.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의사가 될 테니까, 제발요. 네? 제발 부탁이에요, 아버지.”

  아이의 간절함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 설화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슬픔을 느꼈다. 구해주겠다는 소리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만큼 설화는 울고 있었다. 너무도 열렬히 호소하는 그녀를 보며 설화는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유 원장의 생각이 설화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그 때 느꼈을 고통이 가슴에 새겨지는 듯 했다. 멈춰진 세상에 오직 유 원장과 설화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목이 메어오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설화는 호흡이 곤란해져서 온 몸에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허, 헉.”

  상상에서 빠져나온 설화는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지칠 정도로 운 탓인지 힘이 하나도 없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죽을 것 같다는 공포심에 그녀는 문으로 힘겹게 기어갔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설화는 문을 세게 두드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가슴을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설화는 한계에 다다랐다. 가족들과 다은이, 이곳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슬픈 얼굴의 유 원장까지 모두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설화야, 너 무슨 일이야! 괜찮아?!”

  쓰러진 설화를 보고 새파랗게 질린 다은이의 손을 잡지 못한 채, 설화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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