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은 뭐,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다음은 누구지? 1년 된, 태훈이?”
조용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태훈이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움찔하며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모두들 성급하게 재촉하지 않고 아이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음, 형이랑 누나들이랑은 다르지만 나도 나름대로 힘든 삶을 살았어.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생각나는 사람 있나? 그때 엄청 뚱뚱한 공이 굴러온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태훈이가 웃자고 하는 말인 걸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우량아로 태어나서 계속 난 뚱뚱했었어. 한 번도 누구한테 외모로 칭찬받아 본 기억이 없었어. 심지어 부모님들도 항상 건강을 걱정하긴 했어도 나에게 멋있다거나 귀엽다는 말을 해주지는 않았어. 하루에 내가 먹은 양이 어마어마했거든. 가족들도 진절머리 났겠지. 난 형이 한 명 있었는데 형은 무지 잘생겼어. 키도 크고 호리호리해. 대놓고 들어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속으로 나와 형을 비교한다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래도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먹는 게 즐거웠고 거기서 행복을 찾은 것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초등학교 때에는 조금 놀림 받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했어. 친구들이 있었거든. 그 아이들은 항상 날 위로해주고 보듬어줬어. 딱 두 명이기는 했어도 백 명보다 값진 친구들이었어.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그 아이들이 달라지더라. 남을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 희생양이 된 거야. 항상 날보고 냄새가 난다고 했어. 돼지한테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돼지콜레라 옮는다고 가까이에 오지도 못하게 했어. 물론, 내가 그들과 외모가 다르니까, 눈에 띄는 외모니까 자신과 다른 이상한 것을 싫어하는 건 이해해. 그 아이들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다 참을 수 있었어. 진짜로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친구라고 믿었던 아이들이 배신했기 때문이야. 반에서 따돌림을 받는 날 피하더니 어느 샌가 놀리는 애들 편에 서 있더라고. 항상 나에게 힘을 주는 말만 하던 입으로 험담을 했고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주던 손이 한 순간에 비난의 손가락질로 바뀌었을 때, 살면서 최초로 절망감을 느꼈어. 갈기갈기 찢긴 가슴을 도로 붙일 수가 없었어.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해서 거울도 보기 싫었지. 이대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친구라고 믿었던 인간들에게 물었어. 왜 그러는 거냐고, 우린 친구 아니냐고. 경악하더라. 내가 혼자 착각한 거였대. 자기들은 나와 친구한 적이 없다는 거야.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대. 그 때 알았어. 정말 사람은 슬픔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당할수록 나는 늪지대에 빠진 사람처럼 서서히 죽어갔던 것 같아. 결코 발악도 하지 않고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인 거였어. 나는 정말 돼지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 아니, 돼지보다도 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왕따를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 여기 와서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어. 마리아님이 그러시더라. ‘너 참 잘 생겼구나. 참 귀여워. 넌 정말 좋은 아이야.’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힘이 나던지 몰라. 그래서 결심했지. 내가 나를 사랑하자고 말이야. 건강하게 살도 빼기 시작한 거야.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아. 놀리면 놀리는 대로 가만히 받아들이던 지난날의 난 사라졌어. 이제는 자신감을 갖고 나 자신을 사랑할거야.”
말을 마치고 활짝 웃는 태훈이의 모습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다시 웃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생각하자, 설화는 아이가 정말 멋지고 어른스럽다고 느꼈다. 다음 차례인 자신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자, 경옥은 작은 입을 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 태훈이보다 한 달 늦게 들어왔어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눈을 떠보니 이 곳이었어요. 태훈이와 달리, 예전의 저는 상당히 말랐었어요. 뼈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곤 했었죠. 밥을 거의 먹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신경과민으로 잠도 못자고 대인기피증까지 있었어요. 그렇게 된 건, 다 제 어리석음 때문이에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인터넷으로 공개 UCC 오디션을 본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어요. 그 오디션은 제가 가고 싶어 하던 기획사의 주최로 열린 거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전 그날 당장 카메라로 노래 부르는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어요. 한 번도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제 노래 실력이 어떤지 가늠할 수 없었죠. …엉망이었어요. 아니, 엉망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올린 영상 밑에는 많은 답글들이 달렸어요. 대부분이 좋지 않은 글이었죠. 넌 가수할 실력이 아니라고, 무슨 자신감에서 오디션을 보는 거냐는 내용이 가장 많았어요. 사람들은 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희 부모님까지 욕을 했어요. 저 같은 자식을 낳은 부모님이 불쌍하다는 글까지 있더라고요. 오디션은 떨어졌고, 전 그 사실보다 사람들의 지독한 모습에 더 충격을 받았어요. 길을 가다가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제 주변에서 사람들이 깔깔거리고 웃으면, 다 저 때문인 것 같았어요.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졌어요. 눈을 감으면 인터넷 속 그 글들이 떠올라서 잠을 잘 수도 없었죠. 학교도 갈 수 없었고 밥도 먹을 수 없었어요. 지옥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죠. 부모님은 병원에라도 가보자고 하셨지만 의사들도 제 영상을 봤을까봐 겁이 났어요. 그렇게 꼬박 6개월을 집에서만 보냈어요. 점점 저는 말라갔고,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던 부모님은 악성 댓글을 단 사람들을 경찰에 신고했어요. 대질심문을 하러 가야한다고 들었을 때, 처음에는 갈 생각이 없었어요.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공포심에 휩싸였었죠. 하지만,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그보다 왜 그랬는지 묻고 싶어졌어요.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지, 그런 심한 욕을 할 정도로 내가 나빴는지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겨우겨우 용기를 내 경찰서에 갔을 때, 저는 놀라서 다리가 풀려 넘어지고 말았어요. 그들 중에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몇 명 있던 거예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사는 하던 아이들이었죠.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날 지나치며 같은 반에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거예요. 알던 사람들이 그랬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세상 사람들이 괴물 같아 보이더라고요. 믿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반 아이들이 나를 비웃는 환청소리까지 들리면서 제 몸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죠. 손목을 그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차마 깊이까지 그을 용기가 나질 않아서 목숨은 부지했지만, 흉터는 아직도 뚜렷이 남아있어요. 이곳에 오고난 후, 마리아님의 도움으로 차마 부를 수 없었던 노래도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몸도 마음도 나을 수 있었어요. 가슴속의 상처에 딱지가 앉기 시작한 거죠. 마음이 편해지니까 노래도 더 잘 불러지더라고요. 물론, 마리아님께서 개인교습을 붙여주시기도 했지만요. 대인기피증도 많이 사라졌어요. 그래도 사람들에게 말을 쉽게 놓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완전히 나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설화는 이제야 왜 경옥의 노래에서 슬픈 감정이 잘 표현됐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노래는 특히나 감성이 중요하기에 가수가 경험이 많을수록, 노래의 아름다움은 더욱 진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서인 우진은 힘을 얻으려는 듯이 축구장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난 올 3월에 여기에 오게 됐어. 그 전까지는 서울 강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어. 우리 집은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어. 그래서 부모님은 맞벌이하셨고, 난 형제도 없었어. 한마디로 좀 외로웠지. 그런데 중요한 건, 정작 외로워할 시간조차 없었던 거야. 예전의 내 일과표를 말하자면, 아침 8시부터 3시까지 학교수업, 끝나면 바로 영어 학원 갔다가 수학학원, 그 다음에는 논술학원, 그 다음은 태권도. 그렇게 다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였어. 씻고 바로 자지도 못해. 학교랑 학원숙제 해야 하거든. 난 정말 내가 초능력자인 줄 알았어. 주말에는 쉴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주말에는 일을 쉬는 엄마가 박물관이며 전시관 같은 곳에 날 끌고 다니셨거든. 정말 쉴 틈 없는 하루하루였지. 그나마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하는 축구만이 유일한 자유였고 즐거움이었어. 학원만 많이 다닌다고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도 부모님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며 날 몰아세우셨어. 버티다 한계에 부딪쳐서 부모님께 힘들다고 얘기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어. 다 날 위한 거라고 하면서 복에 겨운 줄 알라는 거야. 난 솔직히 말하면, 공부에 흥미 없어.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있는 게 좀이 쑤셔서 견디질 못하겠어. 뛰어다니는 게 좋아. 상쾌한 바람도 좋고 흙냄새도 아주 많이 좋아해. 난 나중에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그래서 장래희망에 축구선수라고 썼었지. 부모님이 사실을 아시고는 노발대발하셨어. 난 졸지에 학원만 하나 더 다니게 됐지. 영어회화학원이었어. 집에 12시에 들어오는데 정말 죽겠더라. 가뜩이나 엉덩이가 저리고 어깨는 뻐근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이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어서 학원을 가지 않았어. 그 시간에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 집에 가면 심해봤자 맞기나 하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집에 갔을 때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 때리기는커녕 혼내지도 않아서 너무 이상했지. 그 다음날부터 엄마는 일을 가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다니기 시작하셨어. 학교에서 오는 대로 엄마와 같이 학원에 갔고,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오고 또 다른 학원에 데려다 주는 식이었어.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통에 난 점점 숨이 막혀왔어. 엄마 아빠가 이상해보이고 무서워지기까지 했어. 빠져나가고 싶었어. 이 생활을 끝내고 싶었어. 그래서 부모님이 잠든 새벽에 도망친 거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길을 잃었고 마리아님을 만났어. 그래서 여기에 오게 됐지.”
설화를 비롯한 모두는 믿을 수 없는 그의 하루 일과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초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워 보이는 게 당연한데도 우진이의 부모님께서 자식에게 그런 벅찬 일상을 강요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설화는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열에 혀를 내둘렀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그들을 위해 아이들을 억압하는 것 같았다. 자식들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무조건 부모의 뜻대로 따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억지고 오만이었다.
“힘들었겠다.”
다은이의 말에 우진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뭐, 그렇지. 그런데 나 말고도 많은 애들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어, 지금도. 그에 비하면 난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볼 수 있어.”
“나도.”
갑작스러운 해인이의 말에 모두의 동공이 커졌다. 해인이는 다은이가 만든 산타쿠키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이는 하기 힘든 말을 하려는 듯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나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어. 게다가 난 한국에 없었어.”
“그럼 어디에 가있었단 말이야?”
더욱 잘 들으려는 것처럼 몸을 해인이 쪽으로 기울이며 지윤이 물었다.
“필리핀. 엄마랑 나랑 둘이서 갔었어. 아빠는 여기서 지냈어. 8살 때는 학교에서 다니다가 엄마 아빠가 외국어는 어렸을 때 배워야 한다면서 한 학기만 다니고 자퇴하고 가을에 필리핀으로 갔어. 처음에는 좋았어. 외국이니까 신기하고 재밌을 것 같기만 했어. 그런데 거기서 학교에 다니다 보니까 너무 이상했어. 한국 아이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애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 모두 적응을 하지 못했어. 필리핀 애들이 피부하얀 우리들을 피하기도 했고 서로 말이 안 통하니까 친해질 수가 없었어. 선생님이 하는 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책을 봐도 읽을 수 없었어. 엄마한테 말했더니 지내다보면 다 이해하게 될 거라고 기다리랬어. 그렇게 1년을 있으니까 나는 완전한 한국인도 아니고 필리핀인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이 돼버렸어. 한국말도 잘 할 수 없었고, 영어도 잘 할 수 없었어. 그러면서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됐어. 올해 여름에 한국에 들어오게 됐었어. 친척들까지 모두 모여서 놀러간다고 들었어. 그동안 명절 때도 한국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난 많이 들떠있었어. 그런데 막상 한국에 오니까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이곳을 그리워했는지 깨달았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았어. 그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너무 부담되고 벅찼어. 난 도망치고 싶었어. 내가 있을 곳은 한국이라고 생각했어.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들도 보고 싶고 무엇보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보고 싶었어. 아빠가 사는 집에 도착했을 때, 난 도망쳤어. 엄마 아빠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서 골목 사이사이로 숨어들어갔어. 누가 도와줬으면 싶었어. 누가 날 여기,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살게 해줬으면 싶었어.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오고 더러워진 옷을 입고 걸어가는 날 사람들은 이상하게 봤어. 그래도 난 좋았어. 한국이라는 사실이 기쁘고 즐거웠어. 한 참을 걸어가다 분식집을 지나가는데, 배가 너무 고픈 거야. 하지만 돈이 없어서 사먹을 수가 없었어. 그 때 마리아님이 나한테 말을 거셨어. 길을 잃었냐고 물으시면서 날 여기로 데려와서 밥도 주고 옷도 갈아입혀 주셨어.”
해인이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설화는 그의 마음의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도망친 걸 후회해?”
설화의 질문에 해인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건 싫어. 하지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다시 예전처럼 셋이서 같이 살 수 있다면 좋겠어.”
곧 눈물이 떨어질 듯 아이의 눈망울은 그리움으로 젖어있었다. 설화는 유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에 대해 집착하는 그녀의 매서운 표정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났다.
“하,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어 먹은 건가.”
윤서의 한숨어린 할머니 같은 말투에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내 얘기를 할까? 나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가 없었어. 늘 혼자였지. 집에만 있는 내가 안쓰러운지 부모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나에게 계속 성격치료를 받아보자고 하셨지. 난 별로 내키지 않았어. 알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정신과에 다니면 무조건 미쳤다고 생각하잖아. 뭐, 마음속으로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야. 사회와 나의 유일한 소통의 장은 오로지 ‘그림’이었어. 그림만으로 나는 자연을 이야기했고, 연예인을 이야기했고, 그날 먹은 맛있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 학교에서 나는 왕따가 아니고 은따였어. 은근히 반 아이들은 나를 싫어했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어. 나도 그게 편했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진로를 결정할 시기가 오자, 내 몹쓸 성격이 좀 불편해지더군. 대학교에서만큼은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정신과에 다니며 치료받기 시작했지. 좋더라. 거리낄 게 못돼.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더라니까.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거야. 아무튼, 열심히 치료받으러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 반 담임선생님하고 마주쳐 버렸어. 일부러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병원에 간 건데도 그렇게 마주치고 만 거야. 몹쓸 운명의 장난이었지. 나는 병원에서 나오고 있었고, 선생님은 길을 지나가고 있었어. 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으시기에, 좀 망설이다가 그래도 담임선생님이니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얘기했어. 정신병원에서 성격치료 한다고. 그랬더니 놀라시더라. 나를 보는 느낌이 약간 이상했는데 별 거 아니겠지 싶었어. 아니나 다를까, 내 느낌이 맞더라. 다음날 담임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부르더군. 앞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정신병원에 다니지 말라는 거야. 나는 그냥 성격치료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앞뒤가 꽉 막힌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선생님은 받아들이질 않았어. 그 대화를 누가 들었는지, 어느새 반 전체에 내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 때부터 나의 은따 생활은 청산됐고 대신 왕따 생활이 시작됐지.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해서 다 철들었다는 건 오산이야. 애들은 공부로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내 얘길 꺼냈어. ‘그래도 난 쟤처럼 정신과는 다니지 않잖아, 적어도 미치지는 않았잖아’라고 하면서 말이야. 내가 유일한 비상구인 그림을 그리자, 홱 뺏어들고 조롱했어. 이건 뭐냐? 심리테스트 같은 거냐? 여기 이 얼굴 콧구멍이 작은 걸 보니 너의 또라이 끼가 가득하다는 거구나? 이런 식이었지. 더욱 심한 애들은 그림에 낙서를 하거나 찢어버렸어.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졸업이고, 그러면 해방이라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어. 미대에 지원하려던 나는 실기 준비로 한창이었어. 학원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서 예상 실기 그림을 그렸지. 학교에 가져와서 미술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조언을 얻고자 하려는데, 일이 발생한 거야. 내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반 애들이 내 그림을 꺼내 보고 있더라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예민해있던 나는 화를 버럭 내면서 그림을 달라고 했지. 잠깐의 실랑이가 오가다가 그림이 찢어졌어. 그 애들은 ‘내 잘못 아니다’, ‘네가 그런 거야’ 라고 하면서 다 나에게 뒤집어씌우더군.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서 나도 모르게 그 애들 책상으로 가서 참고서를 찢어버렸어. 그게 시초로 싸움이 붙은 거지. 난 여자였고 그 애들은 남자애들이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난 발길질로 배를 얻어맞은 후 쓰러졌지. 그 뒤에 선생님이 오셨고 싸움이 중지됐어. 다른 애들은 교실 밖에서 벌을 서고 나만 교무실로 불려갔어. 담임선생님이 딱 한마디 하시더라. 병이 악화 된 거 아니냐고. 내가 분명히 성격치료라고 했는데도 병이라는 말을 쓰더라, 정신병이라고 말이야.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어. 선생님은 부모님들께도 연락하셨지. 싸운 애들과 그 부모들이 다 모인자리에서 하는 말이 내가 정신병원에 다니니까 그 애들 부모보고 이해하라는 거야. 우리 부모님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머리 숙여 사과를 하셨어. 어찌나 분하고 원통하던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어. 더러운 기분을 풀고 싶어서 한강으로 갔어. 한참을 흘러가는 강물만 보고 있었지. 눈물이 나더라. 억울했는지 울음이 멈추질 않았어. 그러다가 강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강물이 자꾸 날 오라고 하는 것 같은 거야. 물속에서는 아무도 날 이상하게 보지 않고 편해진다고 손짓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물가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질 않아. 눈을 떠보니 여기였을 뿐이야.”
윤서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학교라는 존재가 학생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존재인지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제 2의 부모라는 선생님이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했을 때 윤서가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책임한 선생님의 말로 인해 학생이 죽고 싶어지기도 한다는 걸 그들은 알까.
“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할게, 다음은?”
윤서는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다은이를 보았다. 자신의 순서를 짐작했는지 다은이는 긴장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