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진짜 맛있겠다. 먹자.”
떡볶이 한 개를 급히 입에 집어넣고 뜨거워서 손부채질 하는 다은이를 보며 설화는 그녀의 지금 심정이 어떤지 간파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다은이는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면서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정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지금 이 밝은 모습이 사라질까 두려워 설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너, 내가 왜 이 떡볶이를 좋아하는 줄 알아?”
다은이는 젓가락으로 빨간 떡 하나를 푹 찍어들고는 장난스런 웃음을 띠며 물었다.
“음, 글쎄. 아! 값은 저렴하면서도 양도 많고 맛있으니까?”
“땡! 틀렸습니다.”
“그럼 이유가 뭔데?”
“이 떡볶이를 먹으면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맵잖아. 뜨겁고, 맵고 해서 이걸 먹으면 입이 엄청 고생인데 말이야. 희한하게도 스트레스가 쌓이지는 않고 오히려 확 풀린단 말이지. 하하하! 난 아마 어른이 되어도 속상할 때 술보다는 이 떡볶이를 찾게 될 것 같아.”
말을 마친 그녀는 들고 있던 떡을 입에 쏙 넣고 냠냠거리며 복스럽게 먹었다. 설화는 다은이의 웃음 속에 보이는 슬픈 눈빛이 너무 안쓰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오늘, 많이 속상했어?”
다은이는 떡볶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젓가락으로 빨간 양념사이를 뒤적거릴 뿐, 말이 없었다. 설화는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
“아니야.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있지, 어제 텔레비전에서….”
“점점 자신이 없어져.”
힘 빠진 다은이의 대답에 설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눈을 마주치기 싫은 듯, 설화의 교복 상의에 달린 이름표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 꿈은 이게 아닌데, 지금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답답하고 두려워. 너랑 같이 그 학교에 입학할 수만 있다면 내 꿈 다 버리고 부모님 뜻에 따라 얌전히 교사가 되려 했어. 친구와 함께 있다면 힘든 것도 다 참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없어. 그래서 자꾸 예민해지나봐. 그래서 계속 짜증이 나나봐.”
설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은이의 진짜 꿈과 그녀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할 거라고 설화는 생각했다. 다은이는 설화의 두 언니들처럼 확고한 꿈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바라온 단 하나의 미래상이 있었다. ‘제과 제빵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다은이의 부모님은 그녀의 꿈을 반대하셨다. 그들은 딸이 교사를 직업으로 삼도록 설득하셨다. 빵 굽는 건 취미로나 하라고, 여자는 교사가 최상의 직업이라 하시면서 완강한 태도를 보이셨다. 다은이의 목표는 예전부터 하나뿐이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제빵업계로 취직하려던 진로를 바꿔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했고, 대학도 사범대학에 지원했다. 자신보다 부모님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던 다은이가 지금, 수능시험을 일주일가량 앞 둔 시점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설화는 예전에 고등학교에 와서도 마음속 꿈이 변함없는 그녀가 신기해서 물어보았던 적이 있었다.
‘왜 제과 제빵사가 되고 싶어?’
‘그게, 중학교 때 동네 빵집 앞을 지나가는데 열린 문으로 퍼져 나오는 갓 구운 빵의 냄새가 녹아버릴 것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한 시간 넘게 그 앞에서 빵이랑 케이크를 구경하면서 서 있었어.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있었어. 그 이전에는 아무 느낌 없이 지나쳤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렇게 끌리더라고. 참 행복했어. 이런 냄새는 하루 종일 맡고 있어도 질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그냥 빵이 좋은 거 아니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설화는 살짝 의심이 들어 물었다.
‘음, 사실 그런 생각도 해봤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난 크림이 많이 들어간 빵을 잘 먹지 못해. 일반 케이크도 느끼해서 한 조각이 한계야. 그러니까 빵이 좋은 것만은 아닌 거지. 빵에 첫눈에 반한 그 이후에 학교에서 하는 클럽활동을 제과제빵부에 들었거든. 그래서 한 학기동안 요리학원에서 빵이랑 쿠키를 만들었었어. 물렁물렁한 반죽을 만들고 조심해서 모양을 잡고 알맞게 크림을 짜내는 게 한없이 기뻤어. 구워지는 동안의 설렘도 좋았어. 물론 처음에는 설탕 조절 실패로 엄청나게 단 쿠키가 탄생했지만, 만들던 순간에 느낀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행복했어. 다시 또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 평생 그 일을 하고 산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제과제빵사 얘기를 할 때마다 아주 즐거워했던 다은이였다. 그랬던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공부에나 집중하라고? 아님, 그냥 지금이라도 너의 꿈을 위해 다 버리고 포기하라고? 설화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론은 뻔해. 내가 정신 차려야지.”
설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다은이는 덤덤하게 말했다.
“난 부모님을 저버릴 수 없어. 용기가 없으니까.”
“다은아.”
안타까운 얼굴로 설화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그거 알아? 나 지금 내 앞에 서있는 네가 정말 부러워. 진심으로 부럽다.”
다은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슬픔이 어린 눈빛의 그녀를 설화는 한참동안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1년에 딱 하루, 비행기를 비롯한 모든 소음공해가 자중되어지고 출근시간도 한 시간 늦춰지며 경찰차가 택시처럼 변하는 날이 있다. 고등학교마다 사람들로 붐비고 사십에서 오십대의 사람들이 교문에 엿을 붙이기도 하며, 절이나 교회에 기도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런 날이 있다. 그 하루를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12년이라는 세월을 공부에만 소비하게 된다. 그리고 단 몇 시간의 시험으로 그들이 보낸 세월이 보람됐는지 아닌지 지극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판단되어진다. 반나절의 시험으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한 순간에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 날이 대한민국에 있다. 그리고 그날의 해가 저물고 나면, 아이들의 어두운 마음이 하늘을 채우고 그들의 눈물과 아쉬움의 한숨이 별과 달이 되어 쓸쓸한 가을밤을 밝히게 된다.
시계가 오후 8시를 가리키자,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설화는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 거라는 짐작을 하며 다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다은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 후 새벽까지 계속 통화를 시도해봤지만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기계음뿐이었다.
설화는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제일 먼저 온 설화는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들 중에 다은이를 찾으려 했지만, 종이 칠 시간이 다 되어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 모두 자리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애들 몇 명 있네. 걔네 오면 교무실로 오라고 해라. 다들 시험 잘 봤지? 어제 가채점했을 거라고 믿고, 지금 나눠주는 종이에 점수 적어서 내. 10분 있다가 걷는다. 가채점 점수 오차 많이 나는 애들은 성적표 나오면 오차 1점당 한 대씩이다. 정직하게 쓰도록! 자, 얼른 작성해.”
반 아이들 대부분은 우울한 모습으로 가채점 점수표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글씨 쓰는 소리가 교실 안을 맴돌고 있을 때 뒷문이 열리면서 다은이가 나타났다.
“정다은.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선생님은 예상외로 그녀에게 호통 치지 않았다. 힘없이 교실에 들어온 다은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얼굴에 그늘이 잔뜩 드리워진 채, 다은이는 선생님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와서 가채점 점수표 받아가라. 5분 있다가 걷을 거야.”
자리에 앉으려던 그녀는 선생님의 말에 가방만 책상에 내려놓고 교탁 앞으로 가 종이를 받아왔다. 다은이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점수를 적었다. 그리고는 종이를 뒤집어 놓고 그 위에 팔을 포개 얼굴을 묻었다. 그런 다은의 모습에 설화는 불안해졌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며 자신을 다독여 봐도 좀처럼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들은 자유 시간을 주거나 영화를 틀어주는 등 수능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아이들은 이 분위기에 맞춰 수능시험 점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잠을 자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는다든지 영화를 보는 등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수업시간과 별 다를 게 없는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다은이는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교무실에 가게 되었다. 축 늘어진 어깨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설화의 마음은 복잡해져만 갔다.
다시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다은이는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영어로 된 퍼즐게임을 다 완성할 때 까지도 그녀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다음 쉬는 시간이 되자, 설화는 교무실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저런 걱정들로 심난해 하며 복도로 나서던 설화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표정의 다은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설화는 지금까지 그런 표정의 다은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설화를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다은이는 잠을 푹 자지 못했는지 눈이 충혈 돼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지만 설화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다은이에게 다가가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다은아. 어디 아픈 거야?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
그녀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 입 안에서 웅얼거리더니 이윽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신 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거야. 걱정 하지 마. 진짜 괜찮으니까.”
다은이는 수능시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기가 죽은 설화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 친구로서 설화가 할 수 있는 건 다은이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것뿐이었다.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응? 가자!”
활기를 띄며 물었지만 다은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단지 시선을 허공에 두고 생각에 잠긴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오늘 우리 부모님이랑 남동생 늦게 올 거야. 아버지랑 어머니께서 부부동반 세미나로 일본 가시는데 남동생도 따라가고 싶대서 데려가셨거든. 내일 오실지도 몰라. 아무튼 우리 집에 오늘 아무도 없어. 나 혼자 있기 무섭단 말이야. 같이 가주라. 부탁이야.”
설화는 다은이가 거절할까 봐 일부러 세세한 것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듯 말하는 설화를 보며 다은이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알았어. 나도 오늘은 집에 가기 싫으니까.”
“정말? 고마워! 우리 시장 들러서 장보고 가자. 뭐 먹고 싶어? 말만해!”
횡설수설 떠들면서 설화는 여전히 굳은 표정의 다은이를 흘낏 쳐다봤다. 말하지 않아도 지금 다은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친구가 절망감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설화는 속으로 답답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장을 보러 가서도 다은이는 크게 웃지 않았다. 스치듯 미소가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이 되어있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설화는 평소에 하지 않던 농담을 해가며 분위기를 띄웠다. 하루 만에 수척해진 그녀가 안쓰러워 이것 저것 만들다 보니 어느새 식탁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요리가 완성되었다.
“요리책보고 만들어보긴 했는데, 맛이 있을지 모르겠네. 맛없어도 많이 먹어.”
설화는 사실 다은이가 조금만 먹고 그만 먹을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설화의 걱정과는 정반대로 그녀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뜨겁고 싱거운 김치찌개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모양도 이상한 소시지를 여러 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음식을 먹는 다기 보다는 입에 쓸어 넣고 있었다.
“야, 야. 천천히 먹어. 물도 마시고. 그러다가 체해!”
설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은이는 떡볶이 양념을 숟가락으로 퍼먹고 치킨의 닭다리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거칠게 물어뜯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걸신들린 사람 같았다. 그렇게 많던 음식의 대부분을 먹어치운 다은이는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며 설화를 부엌에서 밀어냈다. 어쩔 수 없이 밀려나온 설화는 양치질을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은이의 행동은 너무 이상했다. 그녀의 심리상태가 상당히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 밖에는 짐작할 수 없었다. 입안을 헹구고 나온 설화는 다은이가 걱정되어 부엌에 갔다. 그곳에는 설거지를 하는 물소리와 함께 콧노래 소리가 어우러져있었다. 설화는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다은이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다은아. 너 집에 전화 했어? 가서 전화해, 나머진 내가 할게.”
“아니야. 다 했어. 넌 가서 쉬고 있어. 금방 끝나니까.”
그녀의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운 쾌활함에 설화는 얼떨떨해하며 거실로 나왔다. 누워서 자도 될 만큼 커다란 의자에 앉은 설화는 텔레비전을 켰다. 켜자마자 나온 화면에는 어떤 사건에 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선가가 고아원에 거액의 돈을 기부했다는 쉽게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보도하고 있었다.
≪서인 종합병원 원장 「유 마리아」씨는 수년간 ‘천사의 집’에 지속적으로 기부해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금액이 무려 30억 원을 넘는다고 해서 화제입니다. 그녀는 이 고아원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기부를…≫
화면 속 병원 원장이라는 여인은 4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고 미인이었다. 게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여자, 정말 예쁘다. 연예인해도 되겠어.”
설화의 옆에는 어느 샌가 다은이가 와서 앉아있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을 했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는 것 같았다.
“너희 집 저 병원이랑 가깝지? 혹시 저 사람 직접 본 적 있어?”
다은이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서인종합병원? 음, 전에 작은 고모가 다치셔서 그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는데 그때 잠깐 봤던 것 같아.”
설화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약 3년 전, 등산을 하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작은 고모께서 다리 골절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었다. 그래서 설화의 가족 모두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대기업 사장인 아버지의 방문소식을 들었는지 병원장이 직접 병실에 방문했었다. 병원장은 와서 고모의 증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치료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미래 후계자감으로 설화를 병원장에게 소개시켰었고, 그때 처음으로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설화는 원장이 너무 어려 보여서 아버지와 대화하는 게 어색하다고 느꼈다. 훤칠한 키에 긴 생머리, 흰 의사 진료복이 잘 어울리는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소문대로 화사한 사람이었다. 웬만한 배우보다도 더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께 그녀가 마흔 살을 앞두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설화는 믿을 수 없었다. 병원장은 마치 20대처럼 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땠어? 정말 실물도 예뻐? 나도 직접 만나보고 싶다.”
부러운 듯 설화를 보는 다은의 눈빛이 반짝 반짝 빛났다.
“응. 진짜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정말 광채가 나더라고.”
“그래. 그럴 것 같아. 내가 신문에서 봤는데 저 사람 우리나라 5대 재벌 중 한 명이래. 그 중 유일한 여성이고. 대단하지 않아? 돈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걸까? 능력 있어서 좋겠다.”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다은을 보며 설화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뉴스에서 유 마리아 원장의 기부소식이 끝나고, 아나운서는 다음소식을 전했다.
≪어제 있었던 수학능력 시험이 어려웠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는 가운데….≫
귀를 자극하는 한 단어에 다은과 설화는 침묵에 휩싸였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어색해져갔다. 설화는 다은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더 이상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얼굴 표정은 굳어졌고 안색이 나빠졌다.
“다은아. 너.”
괜찮은지 물어보려던 설화는 다은이의 말에 가로막혔다.
“망쳤어.”
오늘 교실에서의 모습을 보며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실제로 들으니 설화는 마치 다은이가 다른 나라 말을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느껴졌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시험지를 받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더라. 어지럽고 시야가 아득해졌어. 정신이 반쯤 나갔었던 것 같아. 어떻게 답을 썼는지도 모르게 시험이 끝나버렸고, 가채점 결과는 완전 최악이었지. 한 마디로 죽고 싶더라, 정말.”
다은이는 허탈하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가슴 속 절망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 어떡하지? 설화야, 나 어떡해? 미치겠어. 나 너랑 같은 학교, 아니 모든 대학교 다 떨어질 것 같아. 재수할 자신 없는데, 또 그렇게 지옥 같은 1년을 보낼 자신 없는데 어쩌지.”
울 것 같은 표정의 다은이는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가채점은 말 그대로 가채점일 뿐이야. 표준점수 잘 나오면 등급 잘 받을 수 있어. 너도 잘 알잖아. 아직 실망하기는 일러.”
“모르겠어. 난 정말 모르겠어.”
설화는 다은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 토닥였다. 그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어서 설화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설화는 친구의 절망에 감당할 수 없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괜찮을 거야. 모두 다 잘 될 거야.”
말은 위로를 하면서도 설화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 잘 될 거라고 생각이 되지 않았다. 다은이는 어쩔 수 없이 재수를 해야 할 거라고 설화는 속으로 단정 지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게 느껴졌지만 자꾸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