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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난세, 그리고 약속
작가 : 어둠속의빛
작품등록일 : 2017.10.30

"그때의 약속, 그런 말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지금 나와 당신은 적, 나의 주인을 위해 나는 당신을 칠 것입니다."
어지러운 천하, 혼돈 속에서 맺어진 약속. 서초 제일의 명장과 한나라의 대장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난세, 그리고 약속 》5회. 의제여 의제여
작성일 : 17-11-05 20:20     조회 : 285     추천 : 0     분량 : 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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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영포의 결심이 섰다. 의제의 부하 장수가 아닌 구강의 왕으로써, 자신을 위함이 아닌 구강의 백성들을 위해 그는 패왕의 뜻에 따라 의제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결심을 굳힌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부장 셋과 함께 준비된 정병 5백을 이끌고 장강을 향해 나아갔다. 이틀이 지난 후, 그는 먼저 도착한 형산, 임강, 그리고 구강성의 병사들과 합류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왕.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무 늦었군. 그래, 준비는 끝났는가?"

  "저와 형산왕, 그리고 구강성에서 먼저 출발한 병력 1천이 이미 수적으로 변장하였고 배 수십 척이 준비되었습니다. 대왕의 병사까지 총 1천5백이니 각각 수십 명씩 나누어 타고 때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면 될 것입니다."

 

  배까지 준비되었다면 이제 더 준비할 것은 없다. 그는 먼저 병사들을 배에 태우고 의제 일행을 정탐하기 위해 물에 익숙한 병사 5명을 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그리고 의제가 강을 건널 때에 맞춰 자신들에게 돌아와 보고하게 하였다. 의제의 일행은 호위병을 포함해도 5백명이 넘지 않으니 여러 방향에서 넓게 포위해 의제의 배를 친다면 별로 힘을 들이지도 않고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준비를 끝낸 영포는 자신도 배에 올라 때를 기다렸다. 약해지지 않게, 의제를 보고 망설이지 않게 마음을 다잡으며 말이다.

  그로부터 사흘 후, 드디어 의제의 일행이 장강에 당도하였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는 지라 의제는 배를 구해오게 하여 강을 건너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는 구할 수 있었는데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타나 배를 막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뭐냐?! 갑자기 왜 물고기와 자라떼가 우리 배를 막는단 말인가!"

  "당황하지 마라.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나아가보자."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돌연 서북쪽에서 광풍이 맹렬하게 불어오더니 돛대가 흔들리다 견디지 못하고 우지직 소리를 내려 부러졌다.

 

  "폐... 폐하. 아무래도 불길하옵니다. 강을 건너지 마심이......"

  "......"

 

  돛대가 부러졌다. 무언가가 부러졌다는 것은 그 일이 불길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거록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왕리의 군영에 대장기가 부러졌는데 왕리는 이를 미신이라고 무시하였다. 그것을 무시한 대가는 실로 처참하였으니 진나라의 20만 대군은 항우의 강병을 만나 무참하게 깨졌다.

  하지만 여기까지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갈 수도 없다. 오늘은 여기 근처의 마을에서 머물고 다음날 배를 구해 떠나도록 하자."

  "폐.... 폐하......"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가지 않으면 항우가 우리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짐이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대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

 

  그의 말에 숙연해진 위사들과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며 눈시울을 훔쳤다. 아직 어린 나이의 의제, 이제 겨우 15살에 불과한 어린 소년에게서 도대체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마음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런 난세에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만고에 이름을 남길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시기는 어지러운 난세, 그리고 천하의 항우가 제후들을 호령하고 있는 시기였다. 다시 말해 성심이 비단결 같은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대란 뜻이다.

  신하들은 그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둘 도 없는 성군이 될 수 있는 의제가 무도한 항우에 의해 비참하게 쫒겨 다닌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만 가자. 푹 쉬었다가 내일 다시 길을 떠나도록 하자."

 

  결국 의제 일행은 근처의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가 다음날, 날이 밝자 커다란 선박을 3척을 구했다. 의제가 탄 배를 중심으로 2척의 배가 호위하는 대형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는 일행들, 그런데 강 한복판에 당도하였을 무렵에 뱃머리에서 망을 보고 있던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수십척이 갑자기 나타나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좌, 우의 배가 의제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냥 지나치는 정체불명의 배들, 크기도 일반 어선 정도 되는 크기였기에 그들은 마음을 놓고 다시 강을 건넜다. 그런데 그냥 지나쳤다고 생각하던 그 배들이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들을 포위하는 것이 아닌가.

 

  "누... 누구냐!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감히 황제폐하를 가로막다니! 네놈들은 어디의 누구인가?!

 

  작은 배들에게 다닥다닥 에워싸인 상황이라 배를 돌려 달아나기도 힘든 상황, 병사들은 의제를 지킬 수비진을 갖추었다. 그때, 배와 배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지더니 형산왕 오예와 임강왕 공오가 무장한 병사 30명과 함께 다리를 건너왔다.

 

  "패왕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어 소신 형산왕과 임강왕이 먼저 폐하를 맞이하러 왔습니다. 폐하께서는 옥새와 장부를 소신들에게 주셔야겠습니다."

  "뭐라?!"

 

  일국의 황제를 대하는 예의는 둘째 치고 옥새와 장부를 달라는 것은 신하로써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망발. 분노한 신하들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칼이었다.

 

  "네 이놈!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 있단 말이냐! 네놈은 아비와 어미도 없느냐?! 폐하께서는 만백성의 어버이 같은 존재이거늘 네 어찌 감히 그런 망발을......"

  "닥쳐라!"

  "헉!!"

 

  가장 앞에서 둘을 꾸짖던 신하 한명이 목없는 귀신이 되어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놀란 병사들과 신하들이 일제히 창칼을 뽑아들고 그들을 겨누었다. 의제 역시 당황하며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눈 앞에서 목이 잘려나가 죽는걸 보는 것은 의제에겐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 눈 앞에서 피를 보았는데 그 어린 정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아... 아.....!!"

  "폐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습니다!!"

  "뭣 들 하느냐! 폐하를 지켜라! 저놈들을 막아라!!"

 

  그러는 동안 형산과 임강의 병사들 대다수가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고 구강성의 병사들은 흩어져 배에 남아있던 의제의 병사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죽여라. 한놈도 살려두지 마라!!"

  "패왕의 명이다. 모조리 죽여라!!"

 

  곧 치열한 접전이 배 위에서 벌어졌다. 명색이 황제를 호위하는 위사들, 그들은 천하를 통틀어 뛰어난 용맹을 갖춘 자들로 고르고 골라 구성된 정병들이다. 형산과 임강의 병사들이 오합지졸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위사들이 펼친 방어진을 격파하기엔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형산, 임강 왕이 세차게 몰아쳤지만 위사병들의 방어진은 철벽에 가까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2국의 병사들만 죽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또 다른 배 3척, 그 배들은 다른 배들과 크기부터 달랐다. 형산, 임강의 배들이 어선과도 같았다면 그들의 배는 마치 상선같았다.

 

  "저... 저기!! 또 정체불명의 배가 나타났습니다!"

  "......!!"

 

  그 배 역시 의제의 배와 가까워지자 다리를 걸쳤는데 바로 건너오지는 않았다. 대신 활을 등 궁노수가 나타나 의제의 호위병들을 겨누기 시작하였다.

 

  "궁수들이다! 방패 앞으로!!"

 

  궁수들이 활을 겨눔과 동시에 형산과 임강의 병사들이 썰물처럼 물러났고 선두에 선 위사들은 큼지막한 방패를 꺼내들었다. 곧 화살이 퍼부어졌고 미처 방패로 가리지 못한 이들은 하나 둘씩 쓰러졌지만 위사들은 진형을 조금씩 조금씩 좁히며 의제를 중심으로 새롭게 방어진을 펼쳤다. 물론 거리가 가까운 탓에 날아오는 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젖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어 필사적으로 방패를 들고 버텨내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활을 거두고 창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그들의 장군. 그런데 그를 본 의제의 신하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 그대는....."

 

  커다란 철극을 움켜쥐고 번쩍이는 안광에 얼굴에 푸른 먹칠을 하고 있는 장군.

 

  "영포.... 영포가 아니시오?"

  "그대가.... 그대가 어떻게......."

 

  영포가 등장하자 그들은 아연실색하며 힘이 풀린듯 하나 둘씩 주저앉았다.

  그는 항우 휘하 제일의 무장, 용맹이 뛰어나 언제나 선두에 서서 대군의 길을 열었다. 하지만 식견도 갖추고 있었고 예와 정도를 알았던 무장이기에 항우와는 달리 그의 평판은 언제나 좋았다. 그런데....

  그 영포가 지금 의제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나타났다

 

  "구강왕 영포,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우선 철극을 내리고 포권을 취하며 황제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의제는 이미 그의 인사를 받아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으.... 으아아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의 앞에 나타났다. 목이 날아가고 사지가 절단되었으며 피가 솟구쳐서 황제의 용안에까지 튀는 난전, 불과 15살 밖에 되지 않은 의제가 견디기엔 너무나도 힘들었다. 살기를 풍기며 의제를 죽이기 위해 덤벼드는 적에 맞서 마치 거대한 철벽처럼 황제를 지켜주는 위사들도 그의 정신까지는 지켜줄 수 없었다.

 

  "......"

 

  의제의 그 모습에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다시 그의 머릿 속에 번뇌가 찾아왔다. 어린 소년이 너무도 강한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부들부들떠는 가엾은 모습. 그 모습에 그는 지금 여기서 위사들을 도와 의제를 구할까? 잘 설명한다면 패왕도 납득을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였다. 하지만 곧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늦었다. 그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온 것이다. 패왕이 설득을 한다고 설득당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만일 그가 패왕의 명에 반발하여 의제를 살려주기라도 한다면 서초의 대군이 구강으로 밀어 닥칠 것이란 것은 너무도 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패왕에 맞설 힘이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폐하. 그만.... 그만 끝을 내겠습니다."

  "구강왕....!! 어찌 그대가!!!"

  "나는 일국의 왕이오. 구강땅이 전란에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소이다!"

  "네 이놈!! 이분은 천자이시다. 어찌 감히 일개 왕이 천자께 칼을 들이댄단 말이냐! 당장 그 흉물을 치우지 못할까!! 이 부모도 없는 역적놈아!!"

  "쳐라!! 한놈도 살려둬서는 안된다! 모조리 죽여라!!!"

 

  이를 악 물고 영포는 구강의 전 병력들에게 공격명을 내렸다. 형산, 임강의 병사들과는 달리 영포의 구강군은 숱한 전장, 특히 거록에서의 전투에서 맹렬한 활약을 한 강병. 의제의 위사병들은 사력을 다해 그들을 막았으나 수적으로 너무 불리한데다 구강군의 용맹함에 점점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의제를 따르던 신하들 또한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였다. 대부분 의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죽은 것이다. 병사들의 무자비한 창칼이 의제를 향해 겨누어지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고 죽어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의제의 비명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그의 정신은 점점 파괴되어갔다.

 

  일각의 시간이 지나자 의제의 위사들과 신하들은 모두 죽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명의 위사병이 칼을 뽑아들고 영포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 이놈!! 폐하는.... 폐하는!!!"

  "미안하다. 저승에서 나를 원망해라."

  "폐하를.... 폐하를.... 커헉!!!"

 

  마지막 순간까지 의제를 지키려던 위사의 목에 철극을 꽂아넣은 영포, 그 위사병은 죽어가면서까지 의제를 지키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서 어린 소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손이 어린 소년의 발 끝에 닿자 끝내 고개를 떨구고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어린 소년은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허어.... 으으으으.....!!!"

 

  소년은 양 팔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근처에서 소리만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점점 더 웅크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영포의 마음은 점점 더 약해져갔다. 그는 애써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돌려 소년을 무시했다.

 

  "임강왕, 형산왕!"

  "말씀하시오, 구강왕."

  "굳이 우리 창칼에 피를 묻힐 필요가 있겠소? 배 밑창에 구멍을 뚫고 끝냅시다."

  "........"

 

  사실 그들도 의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죽이긴 꺼림칙하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의제가 타고 있는 배 밑창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자신들의 배로 옮겨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의제가 탄 배는 점점 가라앉더니 나중에는 완전히 흔적도 없이 강바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영포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눈물을 훔치며 구강으로 돌아갔다.

  어린 의제 미심, 그는 그렇게 강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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