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미로 5
"이 애비라고 그런 시절이 없었겠냐 지나고 나니, 남는건 후회밖에 없더구나 너는 애비처럼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다 차려줬더니 뭐가 그리 불만인거냐 범학아 애비 말 들어라 애비 말 들어서 너한테 나쁠 것 없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랑 다릅니다” “다르지 않다 너는 내 아들이야”
“아버지 아들이라도, 저는 다릅니다”
“달라도, 결국에는 같아진다. 너는 내 핏줄이니까, 내 자식이니까,
결국에는 너도 나처럼 후회한다” “아버지 후회하더라도, 제가 합니다”
“안 해도 될 후회를 왜 하려고 하는거냐? 범학아 나는 그꼴 못본다”
“아버지가 못보셔도, 저는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너 애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들어먹어야할 것 아니냐?”
“아버지 저는 싫습니다 아버지가 시키시는대로, 아버지가 정해놓으신대로, 그렇게 살지는 않을거에요 저를 아버지 뜻대로 하실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못 하실 거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범학아...잘 생각해보거라 지금 애비 말을 듣는게 좋다 니가 그렇게 좋아서 맘을 주고 있는 희망원, 거기도 후원이 없으면 어떻게 될거 같으냐? 문 닫는건 시간 문제야 거기 문 닫으면, 거기 아이들은 어디로? 거기 있는 그 여자는 어디로 가겠냐? 잘 생각해보거라 범학아 애비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아버지, 아버지가 이런 분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실망입니다 아버지”
“실망..? 내가 너한테 하고 있는 실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라 범학아” “아버지” 아버지에게 치를 떠는 범학, 아버지를 노려보다, 그대로 나가버린다.
골동품 가게 안으로 들어온 서하와 준결, 주인장이 보이지 않는다.
서하, 큰 목소리로 “계세요? 아저씨 저희들 왔어요” 준결 재차 불러본다.
“계세요?” 한켠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주인장, 서하 깜짝 놀란다. “깜짝이야 아저씨 거기 계셨어요?” 주인장, 하품을 한다.
“단잠자는데..” 다시 하품을 한다. “왠일들이야?” “주무셨어요? 가게 안 보시구요?” “손님도 없는데, 앉아있으면 뭐해” “아저씨 심심하셨구나” “찾아온 용건이 뭐야? 뭐 필요한거 있어?” “우리 얼른 보내고 주무시려고?” “얼른 용건이나 말해봐” 준결 가방에서 태엽시계를 꺼낸다. “여기 보세요, 여기에 홈이 나있어요. 예전에는 이런거 없었는데, 잘 좀 봐보세요” 시계를 얼굴 가까이 바짝 들이댄다. 주인장, 시계를 치우면서 “보나 마나야 자네들이 막 다룬거야 시계를” “에이 아저씨 아니에요 우리가 얼마나 조심 조심 다뤘는데요”
“에이 누나 그건 아니다” “자네들이 쓰다가 그런걸, 왜 홈이 나있으면 안되는거야?” “그건 아닌데요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생긴 홈이” “이상할 것도 많다, 다 생길만해서 생긴 홈이겠거니 하면 되지” “생길만해서 생겼다구요? 아저씨 이 시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거 우리한테 말씀 안 해주신거 있으시죠?” “허허 봐도 못본것처럼, 알아도 모르는것처럼, 이 시계가 그런 시계라고 하지 않았나...”
“아저씨 수수께끼 같은 말씀만 하지마시고, 좀 알려주세요” “수수께끼 같으면, 자네들이 풀어야지, 내가 알려주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자네들이 잘 풀어봐 더 할말 없으면, 어서들 가봐 나 한숨 자야해” 주인장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면서 내보내려한다.
“자..잠깐만요 아저씨, 우리 살거 있어요” 서하에게 눈짓한다. “아..맞아요...살거 있었는데...” “찾는게 뭐야?” 서하 재빨리 둘러보다가, 낡은 나침반이 눈에 띈다. “나..나침반이요..” “나침반? 저기 저런거 말이야?” 낡은 나침반을 가리킨다. “네 저거요 바로 저런거 잠깐 볼께요” 준결 나침반을 구경하는 척 한다. 서하도 준결 곁에 서서 나침반을 구경하는 척 한다. “그럼 천천히들 골라봐 나 잠깐 눈 좀 붙일테니까” “아..저씨? 저희를 믿으세요? 저희가 그냥 갖고 가버리면 어쩌시려구?” “허허허허 자네들은 나를 어떻게 믿나? 내가 여태껏 해준 말은 어떻게 믿어?”
“그..그건...그냥...믿어지니까” “나도 자네들이 그냥 믿어진다네 천천히들 골라봐” 하품을 길게 한다. “나 좀 자야겠네” 긴 의자에 누워서 잠을 청한다. 서하와 준결 나침반을 구경한다. 서하 오래된 낡은 나침반을 만지작거린다. 준결 그 옆의 낡은 축음기를 보고 있다. 준결 축음기를 건드려서 시끄러운 소음을 낸다. 서하 나침반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소음에 놀라서 떨어뜨린다. 서하 준결의 발 아래 떨어져 있는 나침반을 본다.
서하 나침반을 주으려고 손을 뻗는 찰나, 준결의 발 아래가 푸른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화들짝 놀라서, 덥썩 준결의 팔을 잡는다. 준결 영문을 모르고 있다. 서하 손으로 준결의 발을 가리킨다.
준결 삼분의 일쯤 푸른 안개에 가려져있는 자신을 본다.
푸른 안개 깔리면서 시야가 서서히 흐려진다.
작업실에서 커다란 박스 안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넣으면서 장난치고 있는 두 사람, 서하와 준결 그대로 정지되어있다.
푸른 안개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
준결과 서하 멈춰있는 자신들을 본다. 서하, 갸우뚱하면서 “어떻게 된거야? 왜 이 시간으로 온거야?” “나도 모르겠어 누나 우리 왜 여기로 온거야?”
“골동품 가게에서 나침반 보다가, 여기로 왔어” “나침반이 안내한 곳이 여기야?”
“우리 둘이 장난치고 있던 여기 작업실..왜 여기로 우릴 데려온걸까?
지난 시간의 우리가 왜 우릴 여기로 부른걸까?”
“나침반은 방향을 알려줘 우리가 뭔가 잘 못 가고 있었던거 아니야?
가야할 방향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우리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우리를 다시 부른거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라구”
“우리가 선물 포장하면서 장난치고 있었을 때, 우리가 뭘 놓쳤던거야?
우리 그냥 장난치면서, 서로를 보고 있었던거뿐인데”
“시계 잠깐 시계 좀 봐봐” 서하 주머니 안의 태엽 시계를 꺼낸다. 테이블 위에 있는 태엽 시계와 똑같이 생긴 시계 서하가 쥐고 있는 시계는 태엽의 홈이 없는 시계이구, 테이블 위에 있는 시계는 태엽에 홈이 있는 시계다.
준결 두 시계를 들어서 살펴본다. 오른손에는 홈이 있는 시계를, 왼손에는 서하가 가져온 시계(홈이 없는 시계)를 들고 있다. 준결 두 시계를 양손에 들고 비교해본다 “똑같네 당연하지만 신기해”
갑자기 다시 시야가 흐려진다. “잠깐..여기 이상한데...”
서하,다급한 목소리로 “우리 다른 시간으로 가려나봐 준결아..태엽시계 챙겨” 준결 다급하게 왼손에 들고 있던 태엽시계를 내려놓고 오른손의 시계만 꼭 쥐고 있다. 두 시계가 뒤바뀐걸 모르고 있는 준결이다.
“누나 어서 내 손 잡아” 준결 태엽 시계를 바꿔서 가지고 간다. 왼손에 있는 서하가 가져온 시계를 내려놓고 오른 손에 있는 홈이 있는 태엽 시계를 들고 가는 준결, 서하와 준결 손을 꼬옥 붙잡는다.
푸른 안개가 짙어지면서 시야가 완전히 흐려진다.
푸른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
골동품 가게로 다시 돌아온 서하와 준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본다.
천둥과 번개,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저녁, 범학은 손에 소주병을 들고 한강대교를 걷고 있다. 범학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빗물에 섞여서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나의 주검을 보면 후회하실까? 평생을 미로 안에서 살게한 그분들은 나의 주검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갖게 될까?
내 인생을 가둬버린 죄책감에 하룻밤이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몸부림치면서 나에게 용서를 빌며 후회하게 될까? 내가 죽어 없어지면 단 한 시간이라도 피눈물을 흘리며 미로 안에서 죽어가게 한 댓가를 치루게 될까’
정해진 장소에 도착해서 멈춰서는 범학,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소주를 마신다. 핸드폰을 꺼내서 발신제한으로 우영에게 전화를 건다. 얼마간의 신호음이 들린후 여보세요 하는 우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영의 목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던 범학, 재차 반복되는 우영의 여보세요 하는 소리에 전화를 끊는.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다가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명함 하나, 꺼내서 들여다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빗물을 닦아가면서 명함을 보던, 범학 결심한 듯 전화를 건다. 울리는 신호음 소리, 들려오는 서하의 목소리, 범학, 취한 목소리다. “여보세요 단서하 작가님” “누구세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희망원에서 명함 주셨던....” “아..기억해요...송범학씨...” “네 기억하시네요” “어쩐일로...”
빗소리에 묻혀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여보세요? 소리가 잘 안들려요 빗소리가 들리는데...밖이에요?” “아니...아니에요...작가님..그냥..주머니 안에 명함이 있어서..그냥..걸었어요” “범학씨..거기 밖이죠? 빗소리가 많이 들려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아무일도 없어요 지금 집이에요”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는데...집이에요?” 뭔가 이상하다 “밖이면 같이 한잔 할까요? 저도 밖에 있는데, 범학씨”
“아니..괜찮습니다 그냥 안부 전화에요 끊어야겠어요 비가 많이 내리네요” 횡설수설 취한 목소리, 서하 다급하게 “범학씨 끊지말아요 거기 어디에요? 비 많이 오는데, 밖에 혼자 있지 말아요 지금 내가 갈께요 어디에 있어요?” “집에 들어가고 있어요 오실 필요없어요 끊어야겠어요 잘..지내세요...” 범학씨 하는 서하의 목소리 들리지만, 전화를 끊어버리는 범학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있는 준결, 옆자리에 서하가 타고 있다. “범학씨” 전화가 끊어진다 “끊었어?” “어...이상해...준결아..범학씨 찾아야겠어 느낌이....느낌이 이상해...” “어떻게? 찾아야할까?” “어떻게든 해봐야지” 핸드폰으로 서하, 범학의 번호를 친구찾기로 등록한다. 승인이 되었다는 메시지가 올때까지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린다. 범학 메시지 알림음이 들린다.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본다. 빗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빗물을 닦아보다가, 승인 버튼을 건드린다. 승인이 됐다는 메시지를 받은 서하, 위치 추적에 들어간다. 한강 대교 부근으로 나오는 범학의 위치, 서하, 다급하게 “주..준결아 서둘러 한강 대교야” 준결, 놀라면서 “한강 대교???” 준결 속도를 높인다. 서하 범학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지만, 신호음만 가고 받지 않는다. 서하, 초조한 표정으로 “제발..제발..범학씨...전화 좀 받아요” 다시 전화를 건다 서하 메시지를 보낸다.
범학 전화벨이 울리지만, 받지 않는다. 다시 울리는 전화를 쟈켓 주머니 속에 넣어버린다. 잠시 후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 범학 역시 신경쓰지 않고, 소주를 마신다. 속도를 높여서 서둘러서 한강 대교 부근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는 서하와 준결, 큰소리로 범학의 이름을 부르면서 범학을 찾는다. 빗소리에 가려져서 들리지 않고, 빗줄기에 시야가 흐리다. 범학 병나발 불던 소주병을 휙 던지려하는 찰나,누군가 팔을 붙잡는다. 돌아보는 범학, 준결이 범학의 팔을 붙잡고 있다.
서하는 여전히 범학을 찾고 있다. “여기서 뭐하는 거에요? 뭐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댁은 댁 갈길이나 가세요 모르는 나한테까지 시간 내줄만큼 한가해요? 어서 댁 갈길이나 가세요”
“단서하 작가님 동료입니다 아까 통화할때도 같이 있었어요
서하 누나랑 같이 걱정돼서 여태껏 범학씨 찾고 있었어요”
“나를요? 생전 처음보는 나를? 왜요?” “범학씨....여기 왜 왔어요? 뭐하려구요? 뛰어내리기라도 하려구요?” “잘 아시네요 부모의 인형처럼 사느니, 그냥 마감하렵니다 이쯤에서 그만 두고 싶어요” 발버둥친다. 준결 범학을 꽉 붙든다.
“이러지 말아요 범학씨” 서하 헐레벌떡 달려온다. “여기 있었구나 너도, 범학씨도 안보여서” “단서하 작가님,”
“범학씨 이러지말아요” 범학에게 다가가려다 고여있는 빗물에 미끄러진다. “누나 괜찮아?” 서하를 돌아보느라 범학을 잡고 있던 팔이 느슨해진다.
범학 그 틈을 타서, 난간 위로 기어올라간다. “안돼..” 서하는 달려가서 범학을 붙든다. 범학 들고 있던 소주병을 휘두른다. 그대로 서하 머리를 가격하는 소주병 깨어지고 서하는 그 자리에 쓰러진다. 범학 쓰러져있는 서하를 보다가 휘청하면서, 그대로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친다.
준결,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망연자실하다. 떨면서, 서하에게 다가간다.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있는 서하, 이미 의식이 없다. 준결 서하를 흔들면서 “누나..정신차려봐 누나 일어나봐 일어나라구” 오열하는 준결 잠깐 정신이 들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지만, 이미 범학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준결, 주머니 안에서 태엽 시계를 꺼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