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미로 4
역시 진지하다. “겁먹고 있어 사랑을 두려워해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의 끝을 먼저 생각해 그러니 끝이 두려워서 사랑은 시작도 못하지
근데 그거 알아? 사랑의 승자는 깨질 때 깨지더라도 무모하게 가보는 사람이 사랑을 쟁취하게 돼 머리로 먼저 생각하고 뒷걸음질부터 치는 사람보다...먼저 무모하게 뛰어드는 사람이 결국 그 사랑을 얻게 되거든 나는 사랑에 승자가되고 싶어”
“무모하게 달려들다 빨리 지치게 되면? 그때는 어떡해?” “지칠 때 지치더라도, 생각만 하다가, 지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사랑은 해봤으니까...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지레 지치는 것보다...훨씬 낫잖아”
“아닐지도 몰라 지레 지치는게 훨씬 나을지도 몰라 무모하게 달려드는것보다..이게 사랑일까 확인하고 확실할 때 사랑하는게 훨씬 좋지않아? 확신할 수 없는 마음에 전부를 다 걸수는 없잖아”
“확신할 수 있는 마음이란건 어떤건데? 내 가슴이 뛰는데, 머리야 확실하니?
지금 나 사랑에 빠진게 확실해? 머리에게 뛰는 가슴을 확인이라도 받아야 확신할 수 있는 마음이 되는거야?” 서하 가만히 듣고 있다. “마음을 분석하지마 추리는 사랑하는데 필요하지 않아 사랑은 느끼는거지, 분석하는게 아니야 그냥 느끼는거지, 분석해서 확인하는게 아니라구”
서하 말이 없다. 잠시 흐르는 침묵.. “누나는 머리를 너무 확신하고, 가슴을 너무 불신해 그러니 사랑이 불안하지, 불안함이 심장을 아프게 할까 두렵지 심장은 말이야 생각보다 약하지 않거든 깨어지고 다쳐도 또 다시 뛰게 되는게 심장이거든,
우리가 살아있는한, 계속 뛰는게 심장이거든, 뛰는 심장을 억지로 잠재우려하지마”
준결의 진지한 눈빛이 오늘따라 더 든든하다. “준결아” 하고 부르는 서하의 눈빛은, 나 감동받았어 얼굴에 씌여있는 딱 그 눈빛이다. “누나 너무 감동이었어? 내가 쫌 감동적으로 잘 생기긴 했지”
“헉...너는 잘 나가다가 꼭..옆으로 새더라, 술 다 깼으면 사건 노트나 정리해” “사건 노트...” 노트를 뒤적이면서 “이번에는 무슨 사건이 생기려나”
서하 태엽 시계를 만지작거린다. “이 시계말이야 꼭 사건이 생겨야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걸까? 우리 맘대로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구만, 그건 타임 머신이구, 이건 우리한테, 사건이 따라오는게 아니라, 사건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거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건이 생기면, 시계가 우리를 그쪽으로 이끄는 것 같아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무..관..하게? 잠깐 누나 시계 좀 줘봐”
“시계? 여기 있어 왜?” 시계를 건넨다. 준결 시계를 불빛에 비춰본다.
“태엽이...누가 꼭 억지로 돌린것처럼, 홈이 패여있어” “어디?” 가까이 다가가서 시계를 본다 “어? 정말이네? 왜 이렇게 됐지? 전에 봤을때는 안 그랬는데” “억지로 돌려야할일?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억지로 돌려야할만큼 다급했던 일이...이 시계는 우리가 갖고 있는데..그렇다면, 억지로 돌린 사람은 우리, 우리에게 생긴 다급한 일..시계의 쓰임을 알면서도 억지로 돌려야할만큼 다급한 일이 대체 뭐지?”
“내일..골동품 가게에 가보자...” “그래 그게 좋겠어”
집으로 돌아온 범학, 책상 앞에 앉아서 새벽까지 고민 중이다.
‘내가 나다울 수 없는데 여기서는 인형일뿐인데 부모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 부모님이 정해주신 길의 끝은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서 선명해서 오히려 더 겁이나 감정을 없앤채 실리적으로만 움직이는 인형으로 걸어야하는 길..정해준 약혼자와 약혼을 하고, 사시에 합격하고, 연수원, 그러다 적당한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유학 보내고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신분이라는 보이지않는 족쇄에 채워진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감정은 감춘채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거, 그게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길이야 그렇게 살아가길 강요하시는거야’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되지? 왜 인형처럼 살아야하지? 부모님은 항상 그러셨어 어릴때부터 쭉 그러셨어 내가 원하는거, 내가 하고 싶은거는 한번도 물어보질 않으셨어 이게 좋은거다,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야 최고가 될 수 있다 최고가 되려면 이렇게 살아야한다 어릴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정도로 수없이 들었던 말이야 엘리트가 되기위해서 키워진 나..부모님이 요구하는 레벨이 되지 않으면, 버려질까 두려워서 늘 전전긍긍하면서 커왔던 나 친부모한테 이런 느낌을 받고, 이런 기분으로 커왔던 사람이 나말고 또 있을까? 그래도 버텼어 그래 대학이 있다 일단 합격만 하면, 조금은 풀어주시지 않을까? 약간의 여유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릴때는 그것만 바라보고 요구하시는대로 움직였어 그래 대학..일단 대학만 가자,
이제 왔는데, 그토록 원하시던걸 해드렸는데, 그건 관문일뿐이었어 통과의례 같은거 이제 나에게 남아있는건 정해진 길로 내달리는거 뿐이야 정해진 길에서 준비된 옷을 입고 똑같은 틀에서 찍어낸 또다른 인형과 손을 잡고, 인형처럼 웃으면서 나는 또 나와 닮아있는, 아니, 똑같은 틀에서 찍어낸 작은 인형을 만들어내겠지...이게 앞으로 내게 주어진 인생이야 너무나도 뻔한 끝이 너무도 분명하게, 선명하게 보이는 인생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 속에서 빙빙 돌다가 숨이 끊어질때까지 미로 속을 헤매여야한다 부모님이 만들어준 미로에 갇혀버렸어’
노트에다가 끄적인다. 인형, 선명하게 보인다, 빠져나올 수 없다. 미로..에..갇혀버렸다...미로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범학 ‘미로에 던져졌다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
미로 안에 갇혀서 영원히 살아야하는 인형이 되어버렸어 그래..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부러워할 인형이 되버렸어 봉사활동?
아니? 나는 봉사하러 가는게 아니였어 나는 살고 싶었어 인형이 아니라,
내가 송범학이 되어서 살고 싶었다구, 아이들의 맑은 눈빛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다른 자유로움을 느꼈어 그 아이들의 결핍은, 나처럼 영혼이 갇혀있는 결핍이 아니여서...영혼만은 누구보다 순수하게 맑은 그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나는 나를, 어린 시절의 나를, 보상해주고, 보상받고 싶었던 거야 그 아이들을 통해서 어릴때의 나를 안아주고 싶었던거야'
누구도 나한테 해주지 않았던 따스함을...그래..그 따스함을,
느껴보고 싶었어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던, 소망을 어릴때부터의 내 소망을,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깊이 잠들어버렸던 내 소망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어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해? 누가 나 좀 구해줘,
이 끝없는 미로에서 나 좀 꺼내줘, 제발, 나 좀 꺼내서 숨쉬면서,
숨을 쉬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줘, 제발 나를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 송범학으로 살 수 있게, 나 좀 꺼내줘.....’
“누가 나 좀 구해줘...제발 나 좀 구해줘...”
작업실 쇼파에 누워서 잠들어있는 준결, 이층의 침대에서 작은 스텐드를 켜놓고 깊이 잠들어있는 서하, 불빛이라고는 이층의 스텐드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불빛뿐이다. 테이블 위에서 갑자기 반짝거리는 태엽 시계 가느다란 불빛이 태엽 시계를 빙둘러 감싸안는다.
태엽 시계의 태엽이 스르르 풀리면서 저절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시계 태엽,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작업실 방안에서 쇼파에 앉아서 얘기중이던 서하, 화면을 거꾸로 돌리는것처럼 일어나서 꿀물을 타고 쇼파에 널부러져 있던 준결 거꾸로 돌린 화면처럼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간다.
어느새 작업실 안은 텅비어 있다. 언제 들어왔는지, 서하만 들어와 있다.
슬퍼보이는 눈빛의 서하, 테이블 위의 태엽 시계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태엽을 억지로 돌린다. 돌려지지 않자, 서랍 안의 공구를 꺼내서 억지로
돌려본다. 작은 홈이 패여진 태엽 시계, 서하 그래도 태엽이 풀리지 않자,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다. 다시 화면은 거꾸로 흐르고, 서하 다시 바깥으로 나간다.
화면이 바뀐다. 작업실에서 커다란 박스 안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넣으면서 장난치고 있는 두 사람, 서하와 준결. 푸른 안개 깔리면서 시야가 흐려지고 다시 시야가 밝아진다.
어느새 정지되어있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난 또다른 서하와 준결,
준결 태엽 시계 두 개를 만지작거리면서 비교한다. 왼손에는 원래 갖고 있던 태엽시계를, 오른 손에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태엽시계를 들고 있다. 다시 푸른 안개가 깔리자, 서하가 재촉한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준결, 오른손에 있던 태엽 시계를 내려놓고, 왼손에 원래 갖고 있던 태엽시계 (예전 장면과는 다르게 왼손에 있던 시계)를 꼭 쥐고 있다. 다시 서서히 밝아지는 방안, 정지되어있던 서하와 준결이 다시 움직인다.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두 사람, 테이블 위의 태엽 시계가 반짝인다.
태엽 시계의 태엽 부분에 작은 홈이 패여있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한다. 테이블 위의 태엽 시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반짝임이 멈춰있다.
방안에는 깊이 잠들어있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느다랗게 들려온다.
스텐드의 불빛이 두 사람을 정겹게 비춰준다.
고급 한식당에서 범학부, 범학모, 범학, 곽판사 내외, 채경 식사중이다.
양쪽 부모님들은 벌써 약혼 날짜를 잡고 있다.
범학부, “미룰 필요가 뭐 있어요 내일 당장이라도, 괜찮은데요 저희는,”
“그래도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텐데” “준비는 저희가 다 할테니 아무 걱정마십시오 그날 채경이랑 같이 참석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럴수야 있나, 자네한테 미안하지 않은가” “괜찮네 괜찮아 그럼 다음주 주말에 하자구, 채경아 너는 어떠냐?” “저는 좋아요”
“시원시원하고 좋네” 곽판사, “자네는 어떤가? 범학 말이 없다.
범학부, “뭐하는거냐? 물으시잖아?” 범학 여전히 말이 없다 “이 자식이”
범학부 버럭 한다.
범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희망원 콘서트 날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다. 범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목례만 가볍게 하고는, 그대로 나가버린다.
범학부 버럭 소리지른다 “저..저...저 자식을” 범학부, 벌떡 일어났다가,
뒷목 잡으면서, 털썩 앉는다.
범학모, “당신 괜찮아요? 혈압도 높으신 냥반이..두세요 범학이 이따 내가 잘 말할테니까” 채경모, “범학군이 우리 채경이 맘에 안드는거 아닐까요?”
범학모, 손사레를 치면서 “아휴 그런 말씀 마세요 저 녀석이 워낙에 수줍음이 많아서 여자 앞에서는 어찌나 어색해하는지, 좀 익숙해지면, 괜찮을거에요”
채경모, “그렇다면 다행인데, 괜히 우리끼리 밀어붙이는거 아닌가 해서”
“엄마 염려마, 범학씨 곧 나 좋아하게 될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게 엄마 걱정마”
범학모, “아휴..시원 시원, 적극적이라..좋다 채경이는, 우리 범학이한테, 딱이네” 범학부, “그래 채경아 너만 믿는다 우리 범학이 맘 꽉 잡거라” “네 염려마세요 아버님” 범학부, 아버님 소리에 기분이 좋은 듯 보인다 “허허허허”
곽판사, “이 녀석이 벌써부터” 서운한 듯 말하지만, 웃음 띈 얼굴이다. 범학부 전화벨이 울린다. 범학부 일어난다. “어디 가나 자네” “잠깐 전화 좀 받고 오겠네, 회사 일이라서...” 범학부 밖으로 나간다. 한식당 바깥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그래 공장에 연락해봐 내 다시 전화하지” 범학부 전화를 끊는다 범학, 바깥을 보면서 서있다.
“너 이자식...어른들 계시는데 무슨 짓이냐?”
범학, 돌아보면서 “아버지” “너 아직도 그 여자애 만나고 다니는거냐?”
“아버지..갑자기 약혼이라니요..당황스럽습니다”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당황스럽다니?” “채경씨랑 얘기 한번 제대로 못 나눠본 사이에 약혼이라니요?”
“얘기야 약혼하고 차차 나누면 되고, 왜 자꾸 맘을 못 잡고 그러는거냐?
범학아 너는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다사시 패스에, 결혼에, 아버지 사업도 물려받아야 하고, 엉뚱한데 시간 낭비하지 마라”
“아버지 저는”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싫습니다 사시 준비하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아요 저는 그냥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봉사하면서, 평범하게, 소박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그게 좋아요 아버지”
“미쳤구나 너..이 애비가 다 준비해놓은 상에 앉아서 그저 먹기만 하면 되는데..다 차려놓은 상을 엎으려고 해? 감히 니가? 너는 내 아들이다
평범하게 사는거? 그런건 너한테 가당치도 않은 일이야”
“아버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금이야 젊으니까, 객기로 그럴 수 있어, 그게 얼마나 가겠냐? 한때의 객기는, 지나고 나면, 다 후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