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미로 3
“복학먼저 할래?” “아..니요...” “고시 준비부터 하거라” 범학 머뭇거린다.
“왜 대답이 없어?” “아버지 저는..” “잔말 말고 시키는대로 해”
“아버지 저는 고시 준비 하기 싫습니다 저는 그냥 여기에 남고 싶어요”
“이녀석이 그래도 정신을 못차리고, 너 약혼부터 해야 정신을 차리겠냐?” “아버지 약혼이라니요? 누구랑요?” “곽판사 딸 채경이 말이다 둘다 아직 어리니까, 약혼부터 해” “그쪽도 그러자고 합니까?”
“채경이는 너한테 호감이 있어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고, 재원에다가, 어디하나 빠질 때 없는 규수잖아 뭐가 불만이야?”
“제 마음은요 제일 중요한 제 마음이 빠졌잖습니까?”
“네 마음이 뭐가 중요해? 결혼은 집안끼리 하는거다 정이야 차차 쌓으면 되고, 자주 보면 정들게 되있어 너 혹시 따로 마음에 둔 여자가 있는거냐?” “있습니다”
“정리해라” “싫습니다” “말들어” “아버지는 어머니 사랑하셔서 결혼하셨잖아요? 근데 왜? 저한테는?” “니 엄마 사랑해서 결혼한거 맞다 하지만, 그전에 네 할아버지가 소개해주셨지 니 엄마를, 나는 니 엄마가 맘에 들었어 너도 채경이 자꾸 보면 맘에 들거야”
“저는 아버지랑 달라요” “다르기는 뭐가 달라? 너는 내 자식 아니냐?
풋사랑 그거 한때 춘정이야 춘정으로 장래를 결정해서는 안된다
채경이랑 약혼하고, 고시 준비 해라” “아버지” “내 말대로 해” 단호하다.
범학 더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안다. “들어가자” 앞장서서 걷는다
범학 힘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주차장 부근 저녁, 서하 범학부와 마주친다. 가볍게 인사한다. 범학부 눈인사 하면서 들어간다. 뒤따라 오는 범학을 본다.
서하 범학에게도 가볍게 인사한다. 범학 멈춰선다. “무슨?” “출판사에서 오신 분?” “네 비슷합니다 왜 그러세요?” “여기 자주 오실거에요?” “출판사에서는 자주 오실거에요” “네에” “아버님 많이 힘드세요?” “네?” “식당에서 봤어요 아버님 많이 완고하시던데” “네, 옛날 분이시니까요”
“범학씨 이제 여기 안 오세요?” “가끔 와야죠” “여기 좋아요?”
“네, 여기가 집 같아요” “집이요?” “네” “기운내요 범학씨” “고마워요”
“아참 제 소개가 늦었어요 단서하입니다 추리 소설 작가에요” “네에, 추리 소설 작가, 그 출판사에서?” “네” 명함을 건네준다
“혹시 연락하실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네” 명함을 본다.
멀리서 범학모 목소리가 들린다. “범학아 곽판사님 가신단다” “네에, 지금 갈께요” “그럼 살펴가세요” “네에..저..저기요..” 범학 성큼 성큼 걸어서 저만큼 가고 있어서 듣지 못한다.
서하 혼잣말이다. “범학씨,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밤거리를 달리는 차안에서 출판사 식구들과 같이 타고 있는 서하, 운전석에 앉아있는 직원만 빼놓고 다들 꾸벅 꾸벅 졸고 있다.
서하도 졸음이 밀려와서 살며시 눈을 감는다. 서하도 깜빡 잠이 든다.
오피스텔 앞에서 서하 내린다. 오피스텔 앞 계단에 취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준결, 서하 놀라며 준결에게 다가간다.
“준결아” 준결 서하를 덥썩 끌어안는다. 서하 영문을 모른채 안겨있다. “왜 그래 준결아” 계단에 앉아있는 준결을 일으켜서 오피스텔 앞 벤치에 앉는다. 준결, 많이 취해있는 목소리 “누나 우리 이쁜 서하 누나 왔어?”
“너 내일 밤에나 온댔잖아 왜 이리 빨리 왔어? 어디서 마신거야? 집에서? 집에서 마셨으면 여기까지 올 리가 없는데, 누구랑 마신거야?”
“누구랑? 걱정마 여자아니니까” “너는 농담이 나오냐 어디서 마셨어?”
“우리 형이랑 마셨어 형은 친구 만난다고 갔구 나는 일루 왔어” “왜 집에서 안 마시고?” “그렇게 됐어” “형은 아주 들어온거야?”
“아니..잠깐 들어온거야 형 결혼한대” “결혼? 거기 여자랑?”
“아니..여기 여자랑” “여자는 여기있었던거야?”
“그랬나봐 이번에 결혼해서 같이 들어가겠대”
“근데 왜? 어머니가 반대하셔?”
“어, 그 여자는 안된대 형이 좋다는데, 왜 그러시는지”
“너 그것 때문에 이렇게 마신거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그것도 다 옛말이야 우리 어머니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야
우리 형 반대하는데도 결혼하면, 안보시겠대
아들은 나 하나인걸루 하시겠대”
“휴우..어렵구나 어려워 부모님 맘에 흡족한 배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몰라, 어머니 눈에 좋은 여자가 우리 형한테도 좋은 여자는 아닌데,
우리 어머니는 당신 뜻만 고집하시니, 우리 형도 그렇구”
“두 분 사이에서 너만 더 힘들겠네 어쩌냐”
“몰라 나두 될대로 되라지 나도 나 편할대로 살아버릴까
그랬으면 나도 형처럼 포기하셨으려나” “준결아”
준결 하늘을 올려다본다. 둥근 보름달이 떠있는 밝은 가을 밤이다.
“우리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우리 아버지 계셨으면,
우리 어머니 저렇게까지 완고하지는 않으셨을텐데,
혼자 계신 세월이 우리 어머니를 아프게 한건가,
아버지 어머니 곁에 조금만 더 계시지 그러셨어요 오래 좀 계셨으면,
어머니가 덜 짝사랑하셨을텐데, 우리를, 아버지한테 가야할 사랑을
모두 우리에게 쏟아부으시니, 우리는, 형이랑 저는, 많이 버겁습니다
아버지는 못난 녀석이라고 퉁주시겠지만,”
서하 준결이 많이 안쓰러워서 지쳐보이는 준결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다. 준결 서하가 하는대로 가만히 기댄다.
“준결아, 부모는 말이야 그런 것 같아 자식은 나만큼 힘들지 않고, 지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시행착오 겪지 않고,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거, 그 마음인데, 그 마음 하나뿐인데, 정말 그 마음뿐일텐데, 그게 정말 자식이 원하는 것인지는 헤아려보지
못하는거 같아 넘어지고, 부딪히고, 그러다 다시 낫고, 이만큼 성장하고, 그런거 하나하나가 모두 다 자식에게는, 자식 입장에서는, 필요한 일인데도, 부모가 되면, 내 자식은, 나보다 편하게 살기를, 나보다 덜 힘들어하면서 살아가기를, 나보다 더 평탄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되거든 그래서 자식에게 좋은 걸 찾아주고 싶은거야
자식이 원하는게 아니라, 당신이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좋은걸 찾게 된다구 어쩌면 부모는 모두 바보들인거야” “바보들?”
“그래 바보들...분명, 자신보다 행복하길 바라는거, 그거 하나인데, 정작 자식이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거야 물어보면 될텐데, 자식에게 물어보면 쉬울텐데, 물어보고 원하는대로 할 수 있게 해주면 되는데, 그러다 나처럼 실수하지 않을까 그러다 자신처럼 시행착오로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거야 그래서 그래 짝사랑으로 자신만의 생각으로만 자식을 보니까 그렇다구”
“누나..부모님 속을 어찌 그리 잘 알아?” “우리 엄마가 하신 말씀이야”
“누나 어머님 뵙고 싶다” “아서라 우리 엄마 눈 높으셔”
준결 술이 확 깨는 듯 하다, 기대고 있다가 발끈하면서 서하를 본다.
“누우나..왜 이래 나도 꽤 괜찮은 남자거든” “그래 너 괜찮은 남자야 누가 뭐래? 근데 우리 엄마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잖아 우리 엄마 사윗감에 대한 희망사항이 많으시다” “거봐 누나 어머님도 모두 다들 똑같으시다 어머님들은”
“그럴지도 모르지 배필은 까다롭게 골라주고 싶은게 엄마 마음이니까...” “더 노력해야겠다 하준결” 파이팅을 하면서 “파이팅!”
“잠깐 거기서 스톱! 뭘 파이팅해? 뭘 더 노력해?”
“어허 왜 이러실까, 우리 사이에” “우리가 어떤 사인데..?”
“우리? 우리 사이 좋은 사이 아주 좋은 사이 정말 좋은 사이 너무 좋은 사이” “말장난은, 술 다 깼구나 그만 들어갈까?” “어허 어딜 들어가? 아직 말이 다 안 끝났는데” “뭔말이 안 끝났어?” “우리 좋은 사이라구 그래? 안그래?”
“그래 좋은 사이야 그게 뭐?” “좋은 사이라 함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사이로, 지금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진전될 수 있는 사이란 뜻이지”
“발전가능성, 진전..? 내가 개발 도상국이냐?”
“누나는 개발이 좀 되어야돼 너무 황무지야 이건 뭐 연애세포는 싸그리 다 어디다 뒀어?” 가방을 본다. “여기다 넣어놨어? 지금 좀 꺼내봐”
“사랑은 말이야 그런게 아니야 분위기 잡고, 말고 할게 없다구, 애써 그러지 않아도 저절로 영화를 찍게 되거든, 로코에, 코메디에, 어떨땐 스릴러까지, 사랑은 말이야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구, 하준결 니가 사랑을 알아? 니가 사랑을 아냐구?”
“어허 이 누나 보시게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시네 좀 촘촘하게 봐주시지
나도 알만한건 다 아는데” “뭘 다 안다구?”
“좋아하면 말이야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다구” 준결 순식간에 서하 입술에 쪽하고 뽀뽀한다.
“봐봐 자연스럽잖아” 시원시원한 웃음소리, “야아” 서하 당황 더하기 쑥스러움 더하기 설레임이 적절하게 뒤섞여있는 표정이다. 준결 벌떡 일어나서 멀리 달아나면서 “나 먼저 들어간다” “야아..같이가..” 서하도 달려간다.
범학, 채경과 둘이 타고 있다. ‘어머니는 왜 꼭 따로 데려다주라는거야?
아까 같이 보냈으면 되는데‘ 찌뿌린 얼굴로 운전중인 범학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건넨다. “범학씨 첫만남은 우리 별로 유쾌하지 못했죠? 조만간 유쾌하게 데이트해요 우리” 범학 말이 없다. “대꾸도 하기 싫어요? 나 안 괜찮아요?
에이 범학씨 매너없다” “채경씨 다왔어요”
채경의 집 앞에 멈춰있는 범학의 차, 범학 먼저 내려서 차문을 열어준다.
채경 내린다. “들어가요” 차에 타려한다. 채경 당돌하게도 처음 만난 범학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춘다. 범학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
“우리 또 봐요 운전 조심하세요” 채경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흔들어보이며 집으로 들어간다. 범학 기분 나쁜 듯 볼을 닦는다. 범학의 차 출발한다.
준결 쇼파에 널부러져있고, 서하 꿀물을 한잔 타서 가져온다.
“마셔봐” 준결 일어나서 마신다. “시원하다” “좀 괜찮아? 한잔 더줄까?” “좋다” “뭐가?” “챙겨주는 사람 있어서” 지긋이 바라본다. “누나가 꼭 내 아내같다” “아내? 푸훕 술 좀 깨셨구나 느물거리기 시작하시네” “더 취했으면 좋았을텐데...” “왜?” “그랬으면 취한척하고 더 들이대보는건데” “취해서 들이대는 남자 매력없어”
“맨 정신으로 들이대는 남자는 매력있어?” “둘다 매력없어” “보면, 누나는 고수야 고수” “뭐가?” “남자 마음을 간지럽힐 줄 안다니까..그러다 적당할 때 한템포 늦춰주는 센스 누나 혹시 선수였어?” “뭐어? 선수는 너였겠지”
“나? 선수 아냐 선수인척 하는 것 뿐이지 나 보기보다 꽤 순정남이다”
“순정남..푸하하하” “왜 웃어? 안 믿어져?” “웅 절대 안 믿어져”
“첫사랑도 이 나이에 해보는 남자가 흔한 줄 알아?”
“첫..사랑? 예전에 좋아하는 사람 있었잖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건 달라 누나는 그 차이를 알아?”
“좋을 호와 사랑 애의 차이겠지” 가볍게 대꾸한다
“좋아하는건 말이야 설레기만 해 보면 그냥 좋고 설레여서 마음이 막 간질거리거든, 근데 사랑하는건 달라 설레이다가도 아려와 그러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심장병을 앓는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파, 심장이 시시때때로 아파와서 편하게 있을 수가 없거든, 사랑하면 편해야하는데...이상하게 사랑하는데 편하지를 않아 오히려 좋아할때가 더 편하거든, 그래서 착각하게 돼 편하지 않구나 이건 사랑이 아니겠다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어 심장이 덜컥 거리지않아서 편한거, 좋아하는걸 사랑이라고 오해하게 되고”
“사..랑....심장병에 걸린 것처럼 가슴이 아파오는 사랑을 사람들은 왜 하려하는걸까?” “그래야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심장이 뛰고, 아파야,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아까 사랑을 아냐구 한 말 취소할게 너 사랑해봤구나”
준결 눈빛이 촉촉하다. “누나는 가끔 사람 헷갈리게 하더라”
“내가? 뭘?” “어떨때는 좋아하는 것 같다가, 또 어떨때는 아닌 것 같구”
서하, 말이 없다. “가끔은 말이야 우리가 정말 연인인 것 같을때가 있는데..또 어떨때는 그냥 동료같아 근데 이상하지? 그게 너무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구?” “우리가 마치 연인처럼 가깝게 느껴질때도,
동료처럼 마냥 편하게 대해질때도, 둘다 너무 자연스럽다구”
“사랑과 우정 사이 뭐 이런거” 역시나 가볍게 넘기려한다.
“누나 나 지금 진지해 무지 진지하다 농담처럼 넘기지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