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이덴티티 7
“지나간 시절을 되돌리려 주어진 한번의 기회를 잡아보지만
인간은 대부분 그 기회를 또다시 같은 실수로 놓쳐버리게 된다
그게 인간이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대부분 그러하다
지나간 시절은 흘려보내야한다
그 시절이 지나가야 다시 또 새로운 시절이 다가올테니
후회로 남을지라도 흘려보내야할 것은 과감하게 흘려보내야한다
우리네 인간은 후회하지 않으려 시절을 되돌아가도 또 다시 새로운 후회를 남기게 되거든, 인간이 후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후회로 남은 시절을 도려내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거야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며 그게 인간이 할수있는 최선이다”
나레이션은 이어지고 무대 위의 연극 배우들도, 관객들도 모두 숙연해진다.
막이 내려오고 연극이 끝난다. 관객들은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자신들의 후회로 남은 지난 시절을 떠올려보고 있다.
서하와 준결 역시나 말없이 막이 내린 무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서하와 준결은 밤거리를 터벅 터벅 걷는다.
거리 어딘가 레코드 가게에서 노랫 소리 들려온다. “사랑했지만”
서하 멈춰서서 노래를 듣는다. 준결 서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서하의 눈에 흐르는 눈물에 마음이 아파오는 준결 말없이 손수건을 건넨다.
서하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준결을 본다.
서하의 시선은 어느새 눈앞의 준결이 아스라하게 멀어지고
추억 속의 어느 날에 머무르면서 대학 시절 청춘의 한때를 장식했던
어느 남학생에게 닿아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서하, 남학생과 나란히 걷는다.
걷다가 멈춰서는 두 사람 “나 결정했어” “정말 갈거야?”
“너도 같이 가자” 서하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나 꼭 돌아올게 기다려줘” 서하 고개를 끄덕인다.
거슬러 올라간 기억 속의 시간은 다시 흐르고 이십대 후반으로 보여지는 서하, 공항에서 예전의 그 남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와 마주보면서 서있다.
“나랑 같이 가자” “안돼” 고개를 젓는다 “왜 안된다는거야?”
“나 너따라 이민가면, 우리 부모님은 어떡해? 부모님한테는 나밖에 없는데”
“나 너 때문에 들어온거야 너 데려가려구 들어온거라구 이렇게 나혼자 돌아갈거면, 나오지도 않았어”
“미..안해...나 부모님 여기 두고 너 따라 갈 수 없어”
“너..나랑 헤어질거야? 이대로 나 영영 떠나보낼거야?” “미..안..해...”
“너무 한다 너..” 눈물이 흐른다 서하도 눈물을 흘린다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 들려온다. 남자 서하를 힘껏 끌어안는다. 서하 안겨서 울고 있다.
남자 서하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간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남자, 돌아본다. 서하 울면서 손을 흔든다.
거리에서는 여전히 사랑했지만이 흐르고 서하의 시선은 다시 서서히 준결에게 닿아있다.
차에 타는 두 사람, 운전하는 준결도 옆자리에 타고 있는 서하도 말이 없다. 붉어진 눈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 서하, 준결 서하의 곁에서
아무 말없이 운전 중이다. 서하 눈물 한 방울이 맺힌 눈으로 준결을 본다.
말없이 운전 중인 준결의 옆모습이 슬퍼보인다.
서하 가만히 준결의 손을 잡는다.
준결 서하의 손을 더 꽉 잡아준다. 서하 준결의 말없는 위로에 따스하다.
‘고마워 준결아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아서’ 준결 서하의 손을 계속 꽉 잡고 있다.
‘누나의 슬픔은 뭘까? 누나의 말하지 않은 슬픔은 뭘까?
내가 물어볼 수 없는, 쉽게 파고들 수 없는 슬픔은 대체 뭘까?
누나와 나는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걷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더 다가가면 누나는 저만큼 밀어낼 것 같아서, 더 많이 다가갈 수 없는, 늘 장난처럼, 다가갈 수 밖에 없는 나를 누나는 모르겠지?’
‘준결아 나도 time을 들어야할까봐 네가 그랬잖아 시간은 고여있으면 썩는다구 나도 이제 내 시간을 멈춰두지 말아야겠어 내 고여있는 시간을 나무라줘서 고마워 나도 이제 시간을 흘러가게 둬야겠어’
작업실 앞 주차장에 멈춰있는 준결의 차..
서하, 준결을 보면서 “너는 안 내려”
준결 그대로 앞을 보면서 “어..그냥 갈게”
서하 왠지 아쉬워서 준결에게 다시 묻는다. “정말 안 내릴거야?”
준결 서하를 안 본다. “어...오늘은 갈게..잘 들어가 누나”
서하 양손으로 준결의 얼굴을 살짝 돌려서 자신을 향하게 한다.
“야아..보면서 얘기해 왜 그래?”
준결 서하의 손길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누나..는..남자를 너무 몰라” “뭐어?”
준결 갑자기 짓궂은 얼굴로 “여자가 이러면 말이야 남자는 여자가 다음 행동을 기대하나 지레짐작하게 되거든” 서하 준결의 말뜻을 알아듣고 재빨리 잡고 있던 얼굴을 놓는다. “너는 말이야 너무....아니..됐어”
“너무 뭐? 너무 잘 생겨서 설레시나?” “푸훕..그래 잘 생겨서 좋겠다 하준결 농담하는거 보니 기분 풀렸나보네” “풀리고 말고 할게 어딨어? 누나..나 농담한거 아니야” “그래 나도 농담한거 아니야 너 정말 잘 생겼어” “왜 이러시나 이런 식으로 올라가자고 꼬드기면 말이야 내가 넘어가줄 것 같아? 왜 이래 나도 자존심이 있어 넘어가줬으면 하면 제대로 해봐”
“올라가자 준결아~오늘 작업할 것도 많은데, 나혼자 다 어떻게 하냐 준결아~~아~~“ 애교스럽게 준결을 부른다 “좋아..오늘은 내가 요정도로 넘어가준다 올라가자 누나” “예스~~” “그렇게 좋아?” “웅 오늘 할거 많아서 혼자서 다 어찌하나 고민됐거든” “그런 식으로 둘러대지 않아도 괜찮아 누나..나도 다 알아” 장난스럽게 서하의 어깨를 두드린다.
“푸하하하 네 덕분에 내가 웃는다” 주거니 받거니 장난치면서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 서하와 준결, 경비실 앞에서 체조를 하고 있는 경비 아저씨한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준결 꾸벅 인사한다. “늦으시네요”
“아네” “내일 옆집에 이사들어올거에요” “408호요?” “내일 이사하니까, 좀 어수선하더라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네”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서하와 준결,
오전무렵 준결 밤샘 작업하느라, 부스스한 모습으로 분식을 사들고, 오피스텔 앞에 서있다.
이사하는 분주한 모습..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멀리서 걸어온다.
준결 무심코 한번 쓰윽 보다가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가려한다.
여자 준결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저기 옆집에 사는 분이세요?” “네...오늘 이사오신다는?” “네...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네..그럼 수고하세요” 준결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바쁜 오전이 지나고 작업실 쇼파에서 곤하게 잠들어있는 준결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는 서하, 벨이 울리는 소리 들린다. 준결이 깰까봐 서둘러 문을 열어준다.
옆집에 이사온 여자가 시루떡을 들고 서있다. “누구..” 시루떡을 보면서 “아..이사오신 분..이사 잘 끝나셨어요?”“네..덕분에요 이거 좀 드시라구요” 떡을 내민다. 서하 받아든다. “잘 먹을께요”
“아까는 남자분이 들어가셨는데, 아..신혼부부시구나” “신혼부부요?” 화들짝 놀라면서 손사레를 친다. “아니요...절대..아니에요” “그럼? 애인? 이런..제가 초면에 실례가 많았네요”
“같이 일하는 동료에요” “네” 부스스 일어나는 준결 잠이 덜깬 목소리로 “누구야?” 여자, 당황하면서 “바쁘실텐데 들어가세요 그럼”
여자 인사를 꾸벅하고 옆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서하 떡을 테이블 위에 놓는다.
“누나 뭐야?” “이사떡이야” “맛있겠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서하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따라서 준결 앞에 놓아준다.
“먹어봐 맛있네” 서하도 같이 먹는다.
<또 다른 이야기 - 안녕. >
안녕
"안녕"
국립 도서관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긴
여자는 밝은 웃음을 머금으며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처음 보는 여자의 인사에 당황한 남자는 머뭇거리며 여자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다음날 남자는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본다.
남자보다 몇분 늦게 도착한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안녕"
남자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서 쑥스러울텐데도 어제의 멋쩍음은 남아있지 않은 듯 여자의 밝은 웃음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남자는 왠지 여자의 인사를 받아주기가 망설여진다.
몇초간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건너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본다.
오늘은 늦잠을 자서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다.
남자는 평소와는 다르게 두리번거린다.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듯 보인다.
남자는 왠지 모를 안도감에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본다.
잠시후 여자가 들어와서 남자에게 평소와 똑같이 밝은 인사를 건넨다.
"안녕"
남자는 예전과 다르게 여자의 인사가 왠지 반갑다.
하지만, 오늘도 여자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왠지 모를 머뭇거림이 예전과는 다른 쑥스러움을 덧입고 있지만,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자라에 앉아서 책을 본다.
다음날 여자는 남자보다 일찍 도착한다.
남자가 항상 앉는 자리 건너에 앉아서 책을 본다.
남자가 도착했다.
남자는 평소와 다르게 자신보다 먼저 와있는 여자가 왠지 반갑다.
평소와는 다르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에 여자에게 한발 다가간다.
하지만, 오늘도 또 남자의 마음은 머뭇거린다.
몇초의 망설임 끝에 남자는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혹시나 여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잠시동안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아무 미동도 없이 책만 본다.
가벼운 아쉬움의 한숨이 남자의 입가에 맴돌지만,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책을 본다.
여자는 등뒤로 남자의 머뭇거림을 본다.
하지만, 여자는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남자의 머뭇거림이 길어질수록 남자의 마음은 자신에게 한걸음 더 다가오리라는걸 안다.
오늘 여자는 남자의 마음에 물음표를 남긴다.
남자는 궁금해할것이다.
여자가 오늘은 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는지..
내일이 되면, 혹시 남자가 먼저 여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지도 모른다.
혹시 인사를 건네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남자는 이미 여자를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여자는 그걸로 충분하다.
남자의 물음표는 어느날, 말줄임표가 될것이며,
말줄임표를 따라서 남자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올거다.
남자의 말줄임표가 하나씩 지워질수록 남자는 여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것이며,
남자의 말줄임표가 다 지워진 어느 날에는 남자에게 여자는 느낌표로 남게 될것이다.
남자에게 느낌표를 남긴 여자는, 이제 결정할거야.
남자와 느낌표를 이어갈지, 마침표를 찍으며 안녕을 고할지,
아마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 밝은 웃음을 머금으며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넬거다.
남자는 평소와는 다르게 여자의 인사를 기다렸다는듯
반갑게 받아들이겠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이제 서로에게 쉼표가 될거다.
책을 보다가 커피 한잔을 건넬 수 있는 쉼표,
책을 보다가 출출함을 함께 채울 수 있는 쉼표,
책을 보다가 무료함을 함께 달랠 수 있는 쉼표,
책을 보다가 피곤함을 함께 휴식할 수 있는 쉼표,
여자가 건넨 "안녕"은, 남자에게 쉼표로 남게 된다.
남자와 여자, 모든 관계는 “안녕”이라는 가벼운 인사에서 시작된다.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