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이덴티티 4
작업실로 돌아와서, 준결 피곤한 얼굴로 쇼파에 털썩 앉는다.
서하 역시나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앉는다. “어떻게 됐어?”
“아까 전화로 얘기한대로야 누나는?”
“나도..더이상의 진전은 없어” “어 “생각보다 쉽지 않네”
“그러네 이번 사건” “미진이...라는 여자가 헤어진 여친인데 어떻게 헤어졌는지 알 수 있다면, 가닥이 잡힐 수 있는데 말이야”
“그건 직접 듣는 방법밖엔 없겠다 한가지 의심가는게 있기는 한데 에이..설마..그건 아니겠지” “뭐? 뭔데?” “에이 아닐거야 내일 유찬씨 만나보자”
“뭔데 그래? 같이 좀 알자” “에이 아니래두 그러네 확실하지 않아 내일 되면 확실해지겠지” “거참네 되게 궁금하게 하네, 파트너끼리 비밀을 만드는거야?”
“비밀이라니, 확실해질때까지 추리는 그저 상상일뿐이다 추리의 두 번째 원칙, 증명되지 않은 추리는 그저 상상에 불과하다”
“역시 추리 소설가 답군..단서하씨” “그러는 너는, 추리 소설가 아니야” “나는 음악 치료사잖아 추리 소설 일은 누나 도와주는 거구” “너도 써보려고 시작한거 아니었어? 이제 슬슬 너도 써야지” “써야되는데, 아직은 뭔가 떠오르는게 없네 그때까지 누나 일이나, 열심히 도와주려구”
“사건 열심히 해결하다보면, 너도 뭔가 가닥이 잡히겠지 그때까지 파이팅이다 하준결~” “그래 누나도 파이팅하자”
따르릉 울리는 전화벨 소리 전화를 받는 서하 “네? 지금요? 알겠습니다” “왜?” “유찬씨인데” “그런데?” “목소리가 안 좋아” “왜?” “모르겠어 암튼, 지금 나가보자” “그래 서둘러”
서둘러 나가는 서하와 준결 다시 들어오는 서하, 뒤따라 들어오는 준결 “왜?” “시계..태엽 시계를 안 챙겼어” 태엽 시계를 가방에 넣고 나가는 서하와 준결 태엽 시계가 들어있는 서하의 가방이 반짝인다. 문이 닫히는 소리 들린다.
그리 늦지않은 시각, 사케집에서 유찬 벌써 많이 마신 얼굴로 앉아있다. 서하, 심호흡을 하면서 유찬에게 다가간다. 준결 역시 긴장된 표정이다. 유찬 두 사람을 본다. “어이 이게 누구야? 드디어 오셨구만 두 분” 유찬 많이 취한 목소리다.
"많이 드신것같은데, 그만 일어나시죠” “일어나긴 어딜 일어나 둘다 얼른 앉아” 서하 유찬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본다. 유찬의 손...한손은 투박한 손이지만, 왼쪽 손은 곱고, 매끈한 손이다. ‘음...그런거였군’
서하는 유찬 맞은 편에 앉는다. 준결은 유찬의 옆에 앉는다. 유찬은 둥근 테이블에 앉아있다. “미진씨...?” 유찬 서하를 무표정하게 본다. “이제 그만 나와요” 준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하를 본다. 유찬 서하를 여전히 무표정하게 보고 있을뿐 말이 없다. “미진씨 이제 그만 거기서 나와요 민유찬씨한테서 나와요”
준결 놀라면서 서하를 본다. 유찬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소리가 달라진다. 유찬, 여자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어떻게...어떻게 알았어요?” “손이요 바로 손을 보고 알았어요” 준결 그제서야 눈치채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왼 손이요 왼손이 너무 매끈하고 정갈했어요 투박한 오른 손과는 너무 대조적이 었죠 미진씨 그동안 얼마나 오래 거기 있었던 거에요?” 유찬 여자 목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칠년..칠년 사겼어요 결혼도 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얼굴 표정이 확 달라지면서 분노한다.
“삼년전쯤에 이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났어요 유라라구 나처럼 가냘프고 이쁜 여자였어요 그 여자한테 첫눈에 반해서는 나를 헌 신짝처럼 내던졌어요 삼년동안 나는 참고 또 참았어요 이 남자가 나한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참고 또 참았다구요 한 6개월 전부터 이 남자 나를 완전히 버렸어요 연락도 안 하고, 잠수해버렸다구요 유라..바로 유라라는 여자 때문에 나를 완전히 버렸다구요
그여자가 나한테 이제 비켜달래요 이제 그 남자한테는 자기가 있을테니까 완전히 떠나달래요 나는 그럴 수 없는데, 이 남자한테서 떠날 수 없는데, 그 여자는 이제 자기 자리라구 해요 내 자리인데 여전히 내 자리인데 이 자리는 영원히 내 자리인데..말이죠 그 여자가 너무 싫어요 유라..그 여자가 정말 싫어요 두 사람 나 좀 도와줘요”
서하의 손을 덥썩 잡으면서 “같은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불쌍하게 여겨줘요 그 여자가 내 남자한테서 떠날 수 있게 나 좀 도와줘요” 서하 유찬의 손을 다독이면서 “그래요 도와줄께요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어요? 말해봐요 미진씨 어떻게 도와줄까요?” 준결 놀라서 서하가 하는대로 보고 있다.
“6개월...6개월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로 돌아가서 유찬씨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요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유찬씨는 나한테 돌아올거에요”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요 그때는 어떡할거에요?” “돌아..오지 않으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무거운 목소리로 “그 여자한테 얘기할거에요 유찬씨를 잘 부탁한다구” “유라씨가 싫다면요 유찬씨 싫어한다면요?” “그러면...나한테 돌아올까요?” “돌아오지 않는다면요? 그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요?”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나..그냥 떠날거에요 나도 이제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 만나서 행복하고 싶어요 유찬씨가 나 싫다고 하면 나 떠날거에요 그 여자와 안된다고 하여도, 유찬씨가 나 안 잡으면 나 떠날거에요 유찬씨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미안했다구 그 얘기가 꼭 하고 싶었어요 미안하다는 말 듣고 나면, 유찬씨도 나도 편해질거에요 유찬씨도 나한테 미안할지도 모르잖아요 유찬씨도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하면, 나 그냥 떠날거에요” “그 말 진심이에요? 떠난다는 말 진심이에요?” “네...나도 이제 그만 쉬고 싶어요”
“유찬씨 만나면 다시 맘 바뀌는거 아니죠? 그럴거라면, 안 돌아가는게 나아요” “아..니요..이제 다 피곤해요 칠년 동안 나도 너무 지쳤어요 이제 쉬고 싶어요” 서하 준결에게 눈짓한다. 준결 알아듣고 태엽 시계를 꺼낸다.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에요”
준결 태엽 시계를 돌린다 푸른 안개 깔리고 서서히 흐려진다.
사케집, 밤이다 유찬 술을 마시고 있다 유경 들어와서 앉는다.
“어서와 유라야..” 많이 취한 목소리다 “유라..라니요? 저 유경이에요”
“아..유경아 내가 많이 취했나봐” “우리 언니 이제 가망없대요” 유경 무거운 목소리다 “가망..없대? 병원에서 그래?” “네...이제 그만 언니 보내는게 어떨까요?”
“너 그러면 안돼 언니라면..너를 그렇게 보내겠어? 너 그동안 니 언니가 니한테 해준걸 생각해봐 니 언니는 너한테 뭐든 다 해줬어 어린 너를 어린 니 언니가 키웠다구 니한테는 부모나 다름없는 언니야 근데, 그런 말이 쉽게 나와?” “쉽게 하는 말 아니에요 언니 때문에 아저씨한테 폐만 끼치잖아요 아저씨한테 부담만 드리잖아요 저 그거 싫어요 아저씨한테 평생 부담주면서 그렇게 살 수는 없다구요” “아저씨라 생각하지마..우리는 이미 가족이야 너도 혼자, 나도 혼자 우린 둘다 혼자야 가족들은 우리를 모두 다 떠났어 먼저 떠나버린 가족들을 원망하면서 그렇게 외로움에 길들여진 사람들이야 우리 곁에 남아있는 한 사람, 그래..네 언니, 너와 나의 가족이 끈을 놓으려하고 있어 그 끈을 우리라도 더 꽉 붙들어줘야지 그게 가족이 해야할 의무야” “아..저..씨...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눈물을 흘린다.
“미안한건 나야 네 언니를 놓지 못하고 편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한건 바로 나라구 나한테는 미진이가 있는데 미진이도 네 언니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놈이 바로 나라구” “미..진..이?” “오랫동안 만났었던 얼마전에 헤어진 연인이야”
“칠년을 사귄 여자가 있어 그 여자 속 정말 많이 썩였는데 헤어지기도 많이 했고, 그러다 다시 만나고, 그런데 이제는 그 여자한테 너무 미안해
미안해서 이제 그 여자 보내주려구 보내주고 그만 잊으려구”
“아저씨 그 여자분 많이 사랑하셨나봐요”
“사..랑..했었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어 혼자인 나한테 언제나 위로해주는 가족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가족같았던 그 여자를 내가 먼저 떠나는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래도 떠날 결심이면 헤어져야죠” “그래야지 유경아 유라씨 일어날거야
우리 그렇게 믿으면서 쫌만 더 버텨보자” “네..아저씨...그럴께요”
“그만 일어나자” 유찬은 일어나서 비틀거린다. 유경은 얼른 비틀거리는 유찬을 부축한다.
유찬은 취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간다. 유경은 유찬을 부축하면서 따라 나간다.
푸른 안개가 깔리면서 시야가 흐려진다 푸른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
유찬, 유경의 부축을 받은채로 정지되어있다. 유찬 또다른 유찬을 본다.
유찬 놀라지않는다. “어서 가봐요 유찬씨에게 하고 싶은 말 맘껏 해봐요”
유찬 또다른 유찬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멈춰선다.
준결 엠피쓰리를 꺼내서 저장되어 있는 노래를 검색한다.
서하 유찬을 바라본다 유찬 여전히 가냘픈 여자 목소리다.
“유찬씨 나왔어 미진이 왔어” 유찬 정지된 그대로 멈춰있다.
유찬 유경을 보면서 “유라씨랑 같이 있었네 그래 유찬씨 선택은 그렇구나 알겠어 나한테서 말없이 떠났던 이유를, 차마 말할 수 없던 이유도 알겠어 나한테 미안했구나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여야하는데 나한테 떠난다고 말하기가 미안해서 그동안 내 연락을 피했구나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유찬씨가 흔들리고 있는 줄만 알았어
그래서 잡으면 다시 잡을 수 있을줄 알고, 서둘러서 돌아왔는데 돌아올 필요가 없었네 아니다 잘된거야 돌아와서 이렇게 확실하게 알게 됐으니까, 잘 된거야 그렇지 유찬씨?” 유찬, 여전히 유경의 부축을 받은 채로 멈춰서있다.
“미안..했어...그 말을 하고 싶었어 유찬씨 힘들게 하면서, 유찬씨 곁에 있어서 많이 미안했어. 내가 빨리 더 빨리 떠났다면, 유찬씨 편해졌을텐데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떠날 수 있었다면, 유찬씨는 더 빨리 행복해졌을텐데
미안했어...나 이제 떠날거야 정말 떠날거야 나도 이제 사랑받으면서 살고 싶어 유찬씨도 이제 나 잊고 사랑하면서, 사랑받으면서 살아” 준결 유찬에게 다가가려한다. 서하, 유찬의 말을 막지말라는듯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준결을 만류한다.
“유찬씨도 나한테 미안하지? 온전하게 사랑받았던 나를 떠나려니까 미안하지?
유찬씨는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유찬씨한테 온리 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거든, 유찬씨를 온전하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니면, 곁에 두지 않거든 나는 유찬씨한테 그런 사람이어서 칠년 동안 유찬씨 곁에 있을 수 있었지만, 나도 그동안 순간 순간 질식할 것 같았어. 한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한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유찬씨 만나면서 끝없이 되묻고 또 되물었어 유찬씨의 그 강박같은 사랑의 완벽한 기준에 항상 내가 못 미치는거 아닌가 불안했거든 기준에 미치지 않으면, 너는 탈락이다 유찬씨는 나를 항상 이렇게 봐왔잖아 나도 많이 힘들었다구 유찬씨 유라씨한테는 그러지마” 서하 가만히 듣고 있다.
“누군가에게 완전하게, 완벽하게 사랑받고 싶다는거 그거 역시 탐욕이야
받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받고 싶고, 더 갖길 원하는 탐욕말이야
탐욕..은...어쩌면 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결과물이야 내가 하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해서 상대에게는 더 받길 원하는거야 모두 자신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거, 자신이 받고 있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해서 생기는 결과물이라구 탐욕..은 인간을 망가뜨려 유찬씨를 봐 그리고 나를 봐..우리 이제 그만 편해지자 나도..유찬씨도 편해지자 유찬씨가 나를 먼저 떠났다고 미안해하지마 나도 유찬씨를 이제 떠날거니까, 우리 서로에게 이제는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자
행복해야해 유찬씨 나도 행복할게” 준결은 유찬에게 다가가서 말없이 엠피쓰리를 건넨다. 유찬 고마움이 담긴 눈빛으로 준결을 본다. 서하는 다가가서 유찬을 안아준다. 유찬 서하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린다.
푸른 안개가 깔리면서 서서히 흐려진다
오전 무렵의 병실 안, 유찬 유라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간호사 하얀 천을 덮는다. 유경 유찬을 끌어안고 같이 흐느낀다.
유찬, 유경을 지켜보는 서하와 준결도 눈물을 흘린다. 장례식이 끝나고 유경은 기숙 학교로 들어가고 유찬은 라면 가게를 정리해서 시골로 내려간다.
농장부근 경치 좋은 한가로운 요양원에서 풍광을 감상하면서 엠피쓰리의 음악을 듣고 있는 유찬, 멀리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젖소들을 본다.
49일간의 시간 - 미풍 legends of the fall - 가을의 전설 ost
going home - libera boys choir something good - 자우림
준결이 선곡해준 노래를 반복해서 들어보는 유찬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