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같은 건 안 하기로 맹세했었는데. 절로 입에서 ‘X발’ 소리가 튀어 나왔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비에타! 너 지금 뭐라 한 거니? 세상에...”
어머니께서 호들갑을 떨며 이비에타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이비에타는 끌려가면서도 욕을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신관이 신들린 목소리로 예언을 했다면 이비에타는 얼빠진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 예쁘고 곱상하게 생긴 요조숙녀 아가씨가 예언을 받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욕설을 내뱉었으니. 주변에서 예쁘다며 추근거리던 몇몇 귀족들도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이 작은 소란은 어머니가 이비에타의 입을 틀어막고서야 중단되었다.
그러나 욕이 중단되었다 뿐이지 심란한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이야기는 단연코 아니었다.
400년 전, 자신의 끔찍한 최후를 예견했던 예언이 환생을 하고 나서도 그대로 따라왔다. 자신이 환생을 하고 싶어서 환생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눈 떠보니 환생해 있었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저주가 따라 다니는 건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며 힘이며 다 가지고 태어난 것까지는 무어라 할 말이 없는데, 전생의 운명까지 똑같이 따라오는 건 어느 악마새끼의 농간이란 말인가?
이비에타는 불현 듯 전생에서 시구르드에게 농락당했던 때를 떠올렸다. 시구르드. 행복하게 살던 자신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며 죽는 그 순간까지 이비에타를 농간했던 개자식이다. 한낱 인간에게 농락당하는 것조차 이비에타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자신을 장기말로 쓰며 내려다보는 미친 신이 하나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철저히 자신을 농락하며 즐기고자 하는 존재가 있는 것만 같다... 이비에타로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일이었다. 인간에게 농락당하는 것조차 괴로웠는데, 운명을 조종하는 무언가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역겨운 일을 당하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공포와 무력감이 이비에타를 덮쳤다. 또 다시 운명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는 잔혹한 상상이 이비에타를 마구 괴롭혔다. 이비에타는 예언을 받은 날 이후 검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마치 마약을 찾듯이 밤중에 밖으로 나가 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 대기를 반복했다. 무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젠장 나보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다만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와중에도 단 한 가지 원칙을 만들기는 했는데, 내용인즉슨 최소한 남성을 사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언대로라면 목숨을 걸 만한 ‘남자’를 만나 인생 끝장나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까 말이다.
남자는 가까이 하지 않겠다. 가까이 하게 되더라도 사랑하지 않겠으며, 당연히 결혼도 하지 않을 것이다 - 라고, 이비에타는 단순한 원칙을 세웠다.
운명이 어떤 식으로 다가와 자신을 찢어발기려 들든 아예 그 가능성을 원천봉쇄함으로서 막겠단 심산이었다.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도 당연히 들었다. 정해진 운명을 범인이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비에타는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저번 생처럼 모든 것을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물 앞에 조그만 모래성을 쌓아 흐름을 막겠다는 멍청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에 의해 농락당하며 죽더라도, 최대한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 보다가 지쳐 최후를 맞는 것이 낫다고 이비에타는 생각했다. 저번 생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허무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작은 원칙을 하나나마 세웠다.
구혼하겠다는 남자들이 오면 그들에게 자신이 요조숙녀가 아니라는 티를 팍팍 내거나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했다. 상대가 졸부라면 그들을 가차 없이 까내렸다. 이비에타의 어머니는 이비에타의 기행에 미치고 팔짝 뛰었지만, 이비에타는 이렇게 소문을 일파만파 퍼뜨려 자신에게 기웃거리는 놈들 따위 얼씬도 않게 하고자 했다.
실제로도 꽤 효과를 보여서, 기행을 부려댄 지 얼마지 않아 이비에타에게 기웃대던 졸부 귀족 나부랭이들은 싹 사라져 버렸다. 이비에타의 부모님들은 얻어낼 신부 대금이 다 사라지게 생겼다며 절규하고 이비에타를 원망해 댔으나, 이비에타 입장에서는 매우 호재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비에타는 앞으로도 이렇게 해서 구혼자 같은 거 없이 평생 독신으로나 살아 보겠다고 나름 희망까지도 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상황이 유지가 되었다면 이비에타가 칼베르크로 올 일도 없었을 터다.
이비에타가 17살이 된 해이자 칼베르크에서 시험을 치기 3일 전,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하나 터져 버리면서 잠시 멈춰 있는 듯 했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예상치 못한 사건이란, 구혼자고 뭐고 다 끊겨 있던 라르힐리덴 가에 갑작스럽게 구혼 신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대금과 함께. 이비에타와 결혼을 약속하기를 원한다는 요청이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이비에타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딴 기행이나 부려 대는 망한 가문 영애가 뭐가 좋다고? 구혼을 청한 가문이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가문인지 궁금해져서 그 가문에 대해 알아보려 하기도 했다. 돈만 많은데 자식이 개망나니인 가문이라도 되는 게 아닐까.
일전에 왔었던 구혼자 중 하나는 사지 멀쩡하고 가문도 번듯해서, 왜 저런 놈이 이런 망한 변경백 가문 사람이랑 사귀려 하나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새끼는 타국 출신의 여인을 이미 애인으로 삼고 있었다. 라르힐리덴 가의 영애에게 구혼 신청을 한 것은 그저 외부 전시용 부인이 하나 필요해서였을 뿐이었고 말이다.
이비에타는 정원에서 그 놈을 접대하게 되었을 때 단검을 두 개 휙휙 돌려 대며 묘기를 보여 주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몸을 틀어 단검 하나를 그의 옆에 있던 바위로 던져 버렸다. 단검은 이비에타의 괴력에 의해 던져진 모습 그대로 바위에 꽂혀 버렸다. 두부에 바늘 꽂힌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놈이 놀라워 할 겨를도 없이 나머지 하나는 놈의 바짓가랑이 아래로 던져 버렸다. 검은 가랑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통과하여 그대로 정원 바닥에 꽂혔다. 스치지도 않았기에 다치는 일은 전혀 없었다만 ‘쩍’소리와 함께 정원의 돌바닥에 금이 생겨났고, 그대로 그 형편없는 자식은 걸음아 날 살려라 꽁무니를 뺐다. 이비에타는 돌바닥에 꽂힌 단검을 빼내며 ‘병신’이라고 중얼거렸고.
그런 놈들을 몇 번이고 만났더니 나중에는 대충 가문만 봐도 어떤 쓰레기인지 알아볼 수가 있는 경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도 보나마나 뻔하지 않을까. 이비에타는 이딴 가문 놈팽이 때문에 자신의 작은 원칙마저 깨질까 두려워졌다. 남자 안 사귄다고! 결혼도 당연히 안 한다는데 왜 이리 괴롭히려 난리인지. 가문에 대해 조사해서 맞춤 깽판(?)을 치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그런 쪽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이비에타의 부모들은 구혼한 가문이 어느 가문인지 알려 주려 하지를 않았다. 보여 줬다가는 이비에타가 또 기행을 부려 구혼을 망치려 든다고 판단하기라도 했나보다.
신부 대금을 많이 챙겨 먹어야 하는 부모들 입장에서는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겠다만 이비에타의 입장에서는 절대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결국 이비에타의 의견도 듣지 않고 오케이! 라 답을 보냈고, 3일 후에 신랑 될 이가 찾아 와 데려가 결혼식 전 만남을 갖고 마음을 틀 시간을 가질 거라는 이야기를 이비에타에게 뭐가 좋다고 조잘조잘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딴 이야기가 제대로 들릴 턱이 없었다. 3일 후에 모든 게 끝장이 난다. 원칙이고 나발이고 부모들이 자길 심부 대금용으로 팔아먹으려 하는데 어떡한단 말인가. 이대로 3일이 지나면 이비에타는 뭣도 모르는 놈팡이를 만나 시시덕거리며 호호호 우리 결혼할 사이랍니다 반가워요 하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결국 남자랑 만나서 죽음 같은 사랑... 아 젠장. 아비에타는 머리가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예언대로 끝나 버리는 인생을, 농락당하는 인생을 더 이상 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비에타는 지금까지 최대한 하지 않으려 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최대한 사람들과 덜 만나고 덜 타면서 살고자 했기에 걷지 않으려 했던 바로 그 길로 말이다.
그건 바로 기사단에 입단하여 기사가 되는 길이었다.
누구든지 일단 기사단의 일원이 되면 제아무리 권력자라 하더라도 일원 된 자를 마음대로 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사란 싸우는 존재이고, 나라를 지키는 자이기에 그런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매우 오래 된 유서 깊은 전통이자 규율이었기에 아무도 기사를 함부로 막 대하지 못한다. 기사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모를까...
이비에타는 이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기사가 되어 기사단의 일원이 되자. 그러면 겨우 나 이 아가씨랑 혼인할거야! 그러니까 전역시켜줘! 란 이유 따위로 붙들어 데려오지 못한다. 설사 그 망할 가문이 공작가라 할지라도 말이다. 공작가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긴 하지만. 게다가 이 생각에는 다른 수도 존재했다.
400년이 지난 현재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여기사를 신부로 꺼리는 거지같은 풍토가 있었다. 보통 문관이 되기에는 머리가 딸리고 그렇다고 결혼을 일찍 시키자니 흠결이 있는 여자들이 기사를 지망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팽배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개소리였지만, 이비에타는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결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평판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미 그녀의 평판은 내려갈 곳도 없었다.
계획이 대충 그려지자 이비에타는 17년 동안 살아오면서 꾸준히 모아 왔던 공고문들을 펼쳤다. 각 기사단들의 시험 날짜가 적혀 있는 입단 시험 홍보 공고문들. 펜릴 기사단부터 가장 근방의 칼베르크에 이르기까지 다섯 개 가량의 기사단에서 만든 홍보 용지였다. 당연히 이번 연도의 것들도 있었다.
대체로 비슷한 일자에 입단 시험이 치러지는데, 홍보지를 보아하니 운이 좋게도 세 개의 기사단이 앞으로 3일 안에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수도 북부의 펜릴, 수도 서부의 아스렌. 그리고... 칼베르크까지. 세 곳의 기사단에서 시험을 치른다고 되어 있었다.
이비에타는 잠시 고민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이로울까? 홍보지에 붙어 있는 지도를 보아하니 게르헨에서 가장 먼 곳은 펜릴 기사단이고, 아스렌 기사단도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둘 중 하나를 가는 것이 껄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칼베르크라는 이름이 이비에타를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칼베르크는 어떻게 변했을까. 칼베르크의 건물은 잘 있을까... 꼴통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애착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가깝다는 것도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일단 기사단에 들어가면 어느 기사단이든지 잡혀 가는 걸 막아 주는 효과를 발생시키므로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이비에타는 칼베르크를 선택했고, 칼베르크로 가서 시험을 치렀다. 그 뒤의 이야기는...
회상이 현실을 따라잡음에 따라 다시 이비에타의 정신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칼베르크의 거무튀튀한 복도 건물. 시험장도 그렇고 거무튀튀한 암석의 본성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거지같은 꼴통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젠장. 이비에타는 시간에 쫓겨 있는 상황이었다지만 자신이 한 선택이 좀 많이 멍청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애착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던지라... 결국 말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방을 찾아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