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는 어린 시절에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 했었다. 검술을 가르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기와 함께 검을 배우던 동생까지. 아버지는 언제나 다정하게 이비의 손을 잡고 검을 휘두르는 법을 교정해 주었으며, 어머니는 검사이시지만 이비가 사랑하는 닭고기 수프를 정말 끝내주게 만들 줄 아셨다. 마지막으로 동생은 이비보다는 검술 실력이 떨어졌지만 항상 이비와 검을 맞부딪히며 대련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정식 기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평민이라는 한계상 하지도 못했지만, 이비는 가족들에게 배운 검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이비는 가족들이 가르쳐준 검으로 최대한 좋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비는 마을 주변에 일어나지만 기사들이 나서서 처리해 주지 않는 문제들을 자신의 검으로 해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개중에서 현상금이 걸린 일이 있으면 신전까지 가서 돈을 받으러 가곤 했다. 그것조차 없으면 다른 마을까지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해 주곤 했다. 이것이 그저 취미로만 대련을 했던 가족들과 다른 점이었다.
이비는 언제나 바빴고, 결국 누구나 한다는 예언조차 사정 때문에 받지 못했다. 동생은 받았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별로 낯빛이 좋지 않아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뒤로 예언이라는 전통에 대해 잊어버린 지 어연 4년이 지났다. 그런데 1년 전부터 시장에 가끔 나타나면서 친분을 쌓은 점쟁이 할머니 한 분이 자신에게 갑자기 예언을 해 준다고 한다. 이비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비의 심정을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듯, 점쟁이는 손바닥으로 굴러 들어온 뼈를 들어 불에 태웠다. 뼈가 불에 타면서 까득, 까득 소리를 내며 기이한 모양으로 갈라진다.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이비에게 점쟁이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더욱 주름지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같은 자들이 쓰는 ‘마나’라는 것을 우리 점쟁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뿐이라네. 자, 이제 볼까.”
점쟁이가 충분히 갈라진 뼈를 불 속에서 끄집어내며, 재를 털어 낸다. 그리고는 뼈의 모양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비에게 드디어 예언을 해 주었다.
“이비, 자네는 목숨을 걸 만한 남자를 만나 죽음 같은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대충 앞서 말한 칼베르크의 건립 이야기와 동일하다. 이후 류리크의 마녀로 인해 전란이 일어나고, 레가르드는 리쉬타 제국의 침략자들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했다.
당시 레가르드에도 대항할 수 있는 신이한 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레가르드에는 ‘마나’라는 것을 이용하는 방법이 존재했다. 마나란,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레가르드의 생물에서 저절로 생성되는 알 수 없는 힘이었다. 대체로 근력을 강화하거나 상처의 회복 속도를 높이는 데 쓰였다.
다만 생물마다 개인차가 있었으며 인간 내에서도 개인차가 존재하였다. 정식 기사들부터 점쟁이에 이르기까지 레가르드의 사람들은 마나를 다방면으로 운용했다.
그러나 레가르드의 인간들이 가진 마나는 리쉬타 제국의 침략자들이 쓰는 마력이나 류리크의 괴물들이 쓰는 기이한 힘보다 훨씬 힘이 약했다. 리쉬타의 침략자들을 자신들의 마력으로 레가르드의 기사들을 쓸어 버렸으며, 류리크는... 애초에 그 강대한 침략자들을 본거지에서 쫓아 버렸는데 오죽할까.
레가르드의 정식 기사들조차 그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마나라는 것에 크나큰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약해 빠진 힘이라며, 모두들 멸시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영웅인 이비와 시구르드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비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몸 안에서 생성해 내는 일종의 선택 받은 자였다. 이비의 가족들 자체가 대체로 그러했으나. 이비가 특히 강했다. 나머지 가족들이 생성해 내는 마나를 모두 합쳐도 이비의 마나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이비는 이 힘을 바탕으로 침략자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비는 자신이 지금까지 단련해 온 마구잡이식 검술로 침략자들을 쓰러뜨렸으며, 침략자들의 마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검을 휘둘렀다. 원래도 강한 힘이 강대한 마력을 입어 더욱 강대해졌으며 상처를 입더라도 회복 속도를 높여 치료하며 전장을 누볐다. 피 뭍은 금발을 휘두르는 그 모습은 적들에게 공포를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그렇게 전장을 누비기를 수년. 이비의 머릿속에 점쟁이가 해 줬던 예언 따위는 잊힌 지 오래였을 즈음이었다.
이비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레가르드의 회복을 위해 전장에서 싸우고 있다는 한 남자가 자신을 만나 회동을 맺기 위해 찾아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비는 그 소식을 들으며 별 생각 없이 피가 진득하니 묻은 머리카락을 쥐어 짜냈다.
하지만 이 때는 몰랐다. 이 남자가 바로 예언에서 나왔던, ‘목숨을 걸 만한 남자’인 ‘시구르드 글레이프니르 펜릴’이었던 것이다.
시구르드와 처음 만났던 날은 그저 전쟁의 판도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연합하면 좋을지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린 날이었다. 임시로 만들어진 거처에 대충 놓인 둥그런 원탁 주위로 몰려 든 자들은 하나같이 기사단장 아니면 꽤 직위 있어 보이는 귀족들이었다. 이비만 유일하게 평민인 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피곤해 보였고, 힘없이 축 늘어진 얼굴이었다. 다들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저런 괴물들과 싸워서 국토를 회복한다는 게 꿈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비는 그런 축 늘어진 분위기에 실망하며, 설마 시구르드라는 자도 자신에게 이딴 분위기에 편승하도록 종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기우였다. 시구르드가 원탁 앞에 등장했을 때, 이비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흰 피부, 그리고 늑대를 연상시키는 회색 눈동자의 남자.
그의 회색 눈동자가 의지와 자신감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지금 주어진 상황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고, 당연히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 모두가 협력하고 노력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 말에 힘이 느껴졌다.
이비는 그의 말에 말도 안 된다고 외치며 항복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한다는 자들을 뒤로하고, 시구르드에게 다가가 자신과 함께 하기를 결의했다. 그 때가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둘은 전장의 동료로서 서로의 등을 맡기고 전투를 진행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상대를 베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시구르드는 이비에게 좀더 고등적인 마나 운용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이비는 그에게 아름답지는 않을지라도 실용적인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시구르드가 이비의 가족들과 마을이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기에 둘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이비가 가끔 ‘먼저 죽지나 마. 시체 치우기 귀찮으니까.’ 따위의 말을 하며 골리면 시구르드는 ‘그대를 지켜 주어야 하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라며 받아치곤 했다. 그럼 이비는 왠지 부끄러워져서 누가 지켜 달랬냐며 당황해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서로 사랑이 싹트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던 싸움 끝에 침략자들을 바다 저 너머로 쫓아내고 나서, 시구르드는 이비를 가문의 영지로 데려와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했다.
이비는 아직도 기억한다. 새하얗게 눈이 덮인 펜릴 공작가의 성이, 수도 남단 이비의 고향 마을 쪽에서만 볼 수 있는 새빨간 장미로 가득이 덮여 있던 모습을 말이다. 이비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 이비의 발이 닿는 곳부터 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미꽃송이가 붉은 카펫처럼 펼쳐져 있었다. 성 또한 하얀 눈 대신 붉은 장미꽃으로 덮여 있어, 이 성이 설원에 위치해 있는 것이 맞는 건가 의구심이 들게 하는 수준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맞아준 자들은 바로 자신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었다. 시구르드와 만나 동행하며 싸운 이래로 오랫동안 여기저기의 전장을 누비느라 마을에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던 이비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들 모두 시구르드가 전달한 것으로 보이는 좋은 옷을 입고 있어 이비를 기쁘게 만들어 주었다.
이비가 반가움과 동시에 이 엄청난 물량에 놀라 있는 사이, 시구르드가 이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구르드, 이게 도대체 무슨... 뭐 한 거야?”
“이비, 이건...”
시구르드가 잠시 뜸을 들인다. 뭔가 부끄러운지 땅만 바라보고 있는데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설마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준 거야? 마을 사람들까지... 나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이비, 그건... 갚지 않아도 됩니다.”
“아냐, 난 빚은 꼭 갚아야 하는 주의라서 말이야.”
그 말을 한 순간 시구르드가 이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비가 뭐 하는 거냐며 놀라 허둥대는데, 시구르드가 손을 내밀어 이비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비는 무어라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손을 그대로 내주고 말았다.
내밀어진 손에 끼워진 것은 - 반지였다. 붉은 색 커다란 루비가 중앙에 박히고 하얗게 부서지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주변으로 세 개씩 박힌 반지. 황금으로 된 링에는 조그맣게 무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어, 어... 시구르드, 이거 대체...”
이비가 너무나 놀라 혀가 꼬일 대로 꼬인 발음으로 어물어물 말을 했다. 시구르드는 다시 일어서서는 이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비 게르헨 라르힐리덴,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너무나도 과분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저를 받아들여주시겠습니까?”
이비가 이 프러포즈를 받아 들였음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비는 시구르드를 받아들였고, 둘은 이후 무수한 축복 속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시구르드는 이후 이비가 자신이 받은 영지인 게르헨과 성인 ‘라르힐리덴’을 사랑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성을 버리고 라르힐리덴 가문의 일원으로 입적했다. 레가르드의 여인들은 공신가이자 여엿한 공작가인 펜릴 가의 공작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이비 백작과 함께하는 것을 결정한 그를 진정한 애처가라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행복했었다. 그 날의 파국이 도래하고, 시구르드라는 작자의 추악한 본성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