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시험이 끝났다. 이비에타는 칼베르크의 견습 기사 임명식을 치르고 견습 기사가 되어 칼베르크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다만 수석으로 들어가지는 못했고 차석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비에타가 시험에서 보여 준 실력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처사였다.
그게 꽤 회자되었는지 기사단 내에서는 기사단장이 일부러 발뭉까지 동원해서 찍어 누르려고 했는데 실패하니까 화가 나서라는 이야기도 나돌았고, 수석으로 뽑으면 자기가 임명식을 직접 해 주어야 하는데 저런 무시무시한 여자에게 차마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랬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어쨌든 이비에타는 차석으로 수습 기사 엔트리에 들어갔으며 칼베르크의 견습 기사들에게 배정되는 방도 부여받게 되었다.
이비에타는 솔직히 걱정부터 앞섰는데, 지금까지 칼베르크에서 보아 온 기사들이 하나같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 기사가 건립자임에도 여성 기사에 대한 태도가 아주 대단한 기사단인데 어느 여성 기사가 들어오려 하겠는가. 뭐 최소 한 명은 여성 기사에 대한 태도가 정상인 것으로 보이긴 했다만...
이러다가 룸메이트도 남자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몰라, 하고 이비에타는 걱정을 한다. 단순히 다른 성이 같은 방을 쓴다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이비에타가 기사단으로 온 이유가, 남자를 피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망할 놈의 예언 때문이야. 젠장... 어떻게 전생 때부터 줄기차게 쫓아다닐 수가 있는지.’
갑작스레 예언에 대해 떠오르는 바람에, 이비에타는 잠시 옛날 생각에 빠져들었다.
*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전란이 시작하기 직전 평화롭던 시기. 류리크의 마녀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저녁이었다. 날은 맑지만 구름이 많이 끼어 있어 산 저편으로 지는 노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던 날로 기억하고 있다.
옆으로 익어가는 밀들이 빼곡하니 나열되어 있는 밭이 펼쳐져 있는 작은 공터 위에 시장이 열려 있었다. 며칠마다 한 번 상인들이 와서 여는 가시장으로, 주변 마을 사람들이 와서 먹을거리라던가 평소에 보기 힘든 물건들을 사 갔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생필품을 팔았으나, 가끔 다른 마을이나 나라에서 가져왔다는 기이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단연 인기가 높은 상인은 다름 아닌 점쟁이였다. 점쟁이가 시장에 나타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레가르드의 건국 때부터 내려오는 특이한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레가르드는 건국 때부터 재미있는 전통이 하나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건 바로 ‘15세가 되는 아이는 누구든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이런 전통이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레가르드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독특하다면 독특한 전통을 따랐다.
귀족들은 이 전통에 따라 수도 중앙에 위치한 신전의 고위 신관들을 찾아가 자제들의 미래를 물었다. 고위 신관들이 말하는 예언이 매우 정확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민들은 신전에까지 가기에는 돈도, 시간도 없었다. 거기다가 고위 신관이라는 자가 평민들을 받아 주는 경우도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했기에, 평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전통을 지켰다. 바로 점쟁이에게 아이를 데려가 미래를 묻는 것.
물론 제대로 된 점쟁이가 몇이나 될까마는, 평민들이 전통대로 예언을 성취하는 방법은 이 방법 외에는 사실상 전무했던지라 다들 시장에 좌판을 펼치는 점쟁이만 나타나면 구름떼같이 몰려들어 자기 자식들의 미래를 물었다. 15살이 이미 지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들 별 상관 없어했다. 15살에 딱 맞춰 점쟁이가 나타날 확률은 정말 낮았으니까 말이다.
그날도 전통에 따라 예언을 듣고자, 사람들이 점쟁이 앞에 몰려들었다.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얼굴 위에 낡았지만 아직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는 로브를 뒤집어 쓴 노파가 좌판 앞에 앉아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초록색 바탕에 노란 색 실로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양탄자 같은 게 좌판을 덮고 있었으며, 기이하게 생긴 뼈 몇 조각과 거북의 등껍질로 보이는 것이 그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겨우살이 나뭇가지와 낫 한 자루가 놓여 있었고 말이다.
“저걸 봐, 점쟁이의 표시인 겨우살이 나뭇가지와 낫이야!”
한 사람이 옆에 있던 사람에게 속닥였다. 그러자 듣던 사람이 되받아친다.
“흠, 그러게 말이야. 정말로 자연과 통하는 자들만이 겨우살이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어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옆에 놓여 있는 뼈는 뭘까?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용골(龍骨)인 거 아냐?”
점쟁이 처음 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다들 점쟁이 앞에서 왁다글닥다글 하며 종알종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늙은 점쟁이가 한 마디 했다.
“당신들 아이들에게 예언을 받게 하려는 거지?”
“뭐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할머니.”
아주머니 한 분이 왜 묻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한다. 그러자 점쟁이가 가느다랗고 쭈글쭈글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좌우로 흔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점쟁이 할머니,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미안하지만, 내가 예언을 해 줄 수가 없구려... 오늘은 단 한 명만 받는다오.”
“네? 그게 무슨...”
다들 예상도 하지 못한 반응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뭔가 대단한 점쟁이인거 같은데, 그리고 그런 점쟁이가 눈앞에 있는데 정작 예언을 받질 못하다니! 다들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다.
“아니, 그럼 그 한 명이 누굽니까?”
결국 참다못한 사람 하나가 점쟁이에게 묻는다. 그럼 왜 이리 거창하게 좌판까지 벌이셨냐 이거다. 점쟁이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얼굴로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기, 저 아가씨라네.”
그 말과 함께 점쟁이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여자 한 명이 점쟁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들 그 모습에 ‘으악’소리를 내며 물러가 버렸다.
이 여기사가 바로, 400년 전 전란 시대의 영웅인 이비였다. 후에 이비 게르헨 라르힐리덴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라르힐리덴 가의 초대이자, 칼베르크를 설립한 여기사.
그리고... ‘이비에타 아르티스 라르힐리덴’의 전생이기도 한 자다.
“할머니, 한참 찾았잖아요. 시장 구석에 쪼그려 계시면 찾기 힘들다구요.”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말거나 이비는 웃는 얼굴로 점쟁이에게 다가간다. 한 손에는 피가 잔뜩 묻은 검을 들고, 한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죽자루를 든 채 다가가고 있었다. 가죽 자루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피가 계속 한 방울씩 똑똑 떨어져 나와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간신히 남아 있던 몇몇조차도 결국엔 질겁하며 도망을 쳐 버렸다.
이비의 생김새는 400년 후 현재의 이비에타와 다른 점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다만 금색의 머리카락이 좀 더 길게 늘어져 내려와 포니테일로 묶었음에도 허리까지 닿는다는 점과, 목 언저리에 베인 흉터 자국이 있다는 점은 달랐다.
“자, 오늘도 짐승의 뼈를 잔뜩 가져왔으니까. 잘 써주세요, 할머니.”
이비는 웃으며 뼈 몇 조각을 점쟁이 할머니에게 내민다. 피가 잔뜩 묻어 있고 군데군데 살점이 엉겨 붙어 있는 기다란 뼈. 방금 잘라 내서 살을 발라 낸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점쟁이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검은 색 천을 내밀어 뼈를 받아 가방 안에 넣는다. 그렇게 세 개 정도 받고 나서 질문을 던진다.
“가죽 주머니 안에 뭐가 더 든 거 같은데. 그건 짐승의 머리인가보지?”
“아, 그렇죠. 잘 아시면서... 이건 도시에 있는 신전에 가서 신고할 거에요. 이 짐승새끼가 사람을 몇이나 잡아먹었는지, 현상금이 걸렸었거든요.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증거 하나 정도는 가지고 가야죠.”
“그래... 항상 마을을 위해 열심이구나.”
“뭘요. 그저 현상금 받으려고 하는 것뿐인걸요. 현상금 없는 놈들 처리하는 거는 그냥... 무뎌지면 안 되니까. 그래서 연습하는 것뿐이에요. 몸이 피곤하니까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신전까지 강행군해야죠, 뭐.”
이비는 그 말을 끝으로 집에 가기 위해 빙글 몸을 돌렸다. 도시에 있는 신전에 가야 현상금을 받을 수 있는데, 도시까지 가는 길이 매우 멀기 때문에 미리미리 체력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었다. 오늘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어나 꼬박 하루 정도 강행군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점쟁이가 집으로 향하려는 이비의 손을 붙잡는 것이었다. 노인답지 않게 강한 손힘에 이비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할 말이라도...?”
“이비야, 너 나이가 이제 몇 살이니?”
“18... 아니 이번에 생일 지났으니까, 19살이에요. 왜요, 할머니?”
“너, 아직 예언 들어 본 적 없지?”
“네?”
이비는 당황한 표정으로 점쟁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비에게 점쟁이는 좌판에 아까 진열해 놓았던 뼈와 나뭇가지를 늘어놓으며 말한다.
“오늘 네가 예언을 듣고 갔으면 좋겠구나. 아니, 들어야만 한단다.”
그 말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늘어져 있던 뼈 중 하나가 빠직 소리를 내며 점쟁이의 손바닥 쪽으로 굴러 들어온다.
“어... 네, 뭐 그럴까요?”
이비는 약간 당황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점쟁이의 예언을 듣기 위해서. 그것이 앞으로의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