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저 계집애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비에타가 그 말을 하고 나서 1분가량은 지나고 나서야 한 명의 기사가 간신히 말을 떼었다. 그것도 상당히 어눌한 말투로 말이다.
“그, 그러니까 말이야. 미친 거 아냐?”
그리고 그 말을 맞받아치는 자가 나오는 데는 또 1분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또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부끄러움을 알아챈 것일까. 한 기사가 흠, 흠, 하고 헛기침으로 운을 떼어 보이더니 소리를 지른다.
“그래서 언제 시작한다는 거야? 이딴 거에 시간 허비할 만치 시간이 많은 줄 알아? 빨리 시작해!”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기는 했다만 아까까지만 해도 찌그러져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당당한 목소리. 그제야 다른 기사들도 ‘맞아’, ‘맞아’, 소리를 내며 다시 시험장을 시끄럽게 만들기 시작한다. 다시 야유가 넘쳐흐르고, ‘그딴 검으로 뭘 이겨 보이겠다는 거냐! 허세도 정도껏 부려라.’ 따위의 고성이 오간다.
그러나 이비에타의 눈에 그들의 모습은 그저 ‘겁먹지 않았어. 쫄지 않았다고.’라고 온몸으로 주장하며 발악하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새끼 고양이가 털을 잔뜩 세워 위협을 하는 것처럼. 이비에타는 더 이상 볼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말없이 검을 들어 올린다.
그런 이비에타의 앞으로, 거구의 견습 기사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3차 시험 규칙은 간단하다. 1차와 2차 시험을 통과한 지원생은 견습 기사와 맞붙는다. 이기는 조건은 두 쪽이 모두 동등하다. 상대방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거나, 포기시키거나, 장외로 이탈시키거나. 이 셋 중 하나를 먼저 달성시키는 쪽이 이긴다.
물론 당연하게도 견습 기사는 지원생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해야 한다. 견습생이 무기를 고르면 견습 기사는 그보다 열화된 무기를 고르는 것이 규칙으로 제정되어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타의 기사단의 실기 시험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레가르드의 기사단 중 최고의 실세인 펜릴 기사단(앞서 펜릴 공작가가 운영한다고 기술된 수도 북단의 기사단이다.) 또한 실기 시험에서 같은 방식을 채용한다.
그러나 칼베르크의 3차 시험은 다른 기사단의 시험과 다른 고유한 규정 하나가 더 추가되어 실시된다. 그 규정이란, 세 가지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규정이다. 그런 고로 칼베르크의 3차 시험에서는 상대방의 목을 조르든, 물어뜯든, 흔히 말하는 ‘기사도’란 것에 어긋난다 할 만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
초대가 나라를 지키는 이라면 전투 중에 격식을 차리는 게 아니라 일단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였고, 그 정신을 고스란히 실천하여 전란의 시대 나라를 구원하였기에 이런 특이한 규정이 존재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래봤자 지금의 부패한 칼베르크에서 제대로 지켜지는 규정이라고는 앞서 언급된 특이한 규정 하나뿐이지만 말이다. 발뭉이 든 무지막지하게 큰 검만 봐도 현재의 칼베르크에서 규정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눈치 채기에는 충분했다.
방금 전 무기를 고르게 했던 시험관이 시험장 중앙으로 나왔다. 시험관이 선 자리는 시험장의 정중앙이자 발뭉과 이비에타, 두 남녀 사이이다. 시험관은 시험에 앞서 쓸데도 없는 규정들을 읊어준 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격식을 차려 인사하도록 명한다. 지원생과 견습 기사가 서로를 마주하고, 잠시 서로를 바라본 후 지원생이 먼저 인사하면 뒤이어 견습 기사가 인사를 하는 식이다.
격식에 따라 이비에타와 발뭉 또한 서로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이윽고 적당한 거리에 도달했을 때, 둘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 순서는 상대방에게 존중하라는 의미에서 나온 순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비에타는 이 순서를 이용해 발뭉의 신체를 천천히 훑어보며 이것저것 체크하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자른 갈색의 머리카락과 원래 꽤나 희었을 것 같지만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 그 위에 자리 잡은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의외로 멀리서 봤을 때의 인상과는 달리 선량하게 생긴 미청년이다. 다만 훈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피로한 기색이 꽤 역력해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눈빛에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비에타가 주목한 쪽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몸이었다.
이비에타는 여자 치고는 굉장히 키가 큰 편이다. 17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통 남성들의 키에 그렇게까지 꿇리지 않는 수준의 키를 가지고 있다. 아마 앞으로 더 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비에타가 보기에도 발뭉은 보기 드문 거구의 남자였다. 키가 이비보다 머리 한 개 반은 더 큰 수준이다. 그러나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온몸에 탄탄한 근육이 고루고루 덮여 있어 전체적으로 강인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거기다 검을 쥔 손 가득이 박인 굳은살까지. 그의 몸의 모든 부분이 그가 얼마나 단련을 해 온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눈길이 가는 곳은 그의 거대한 체형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든 검은 보통 칼베르크의 기사들이 차고 다니는 보석 박힌 검과 달리 순수 철로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장식이 하나도 없었으며 밋밋한 회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크기가 이비에타의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회색으로만 이루어진 검의 길이가 거의 그의 삼분의 이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그 너비 또한 상당히 널찍하고 두꺼워서 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철판에 가까워 보였다. 강철 몇 근은 족히 부어 만들었을 것 같은 모양새로, 저 검에 죽는다면 베이거나 찔려 죽기보다는 찍혀 죽는다는 것이 맞을 듯 했다.
검날이 고르지 못하고 날이 잘 서지 않은 것을 보아 하니 진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형식을 쓰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걸로 내리치면 땅에 계속해서 찍혀 무뎌질 게 뻔하니까 말이다.
‘흠, 예상보다 괜찮은 놈도 있었군.’
이비에타는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기죽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봤자 이 검으로 충분하겠어. 오히려 상대에 맞게 잘 골라졌는데?’
라 생각할 뿐이다.
상대를 보며 생각에 잠시나마 잠긴 건 이비에타 뿐이 아니었다.
앞에 선 소녀는 17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큰 키를 가지고 있다.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것이 인상적인 소녀. 약간 탄 피부에 반짝이는 금발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호박색의 눈이 소녀의 미모를 더욱 드높이고 있었다. 가문의 문장인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붉은 색으로 새겨진 검은색 복장이 딱 맞게 입혀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키가 크다는 것과 바지를 입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또래 여느 소녀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예쁜 소녀다. 이 자리가 아니라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고 있어야 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다른 기사들이 하대하던 것과는 달리 발뭉은 이비에타에게서 여느 소녀들과는 다른 점을 발견했다. 그 다른 점이라 함은 바로 이비에타의 몸에 있었다.
이비에타에게 딱 맞게 입혀진 복식 아래로, 여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근육이 고르게 입혀져 있다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복식이 워낙 딱 맞춰 입혀져 있어 근육의 굴곡이 그대로 노출되었는데, 여자의 근육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발뭉이 보기에도 매우 단단해 보이는 골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락부락하다는 것은 아니어서 절대 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미가 넘쳐 보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과 필적하는 수준으로 손에 굳은살이 가득 박여 있다.
발뭉의 나이가 올해로 22세고, 칼베르크에 들어올 때 나이가 18세였다. 칼베르크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죽도록 연습했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기사단들은 자신 같은 평민은 받아 주지 않는다. 평민을 받아 주는 기사단은 오로지 펜릴 기사단과 칼베르크 기사단뿐이었다.
그러나 수도 북단에 있는 펜릴 기사단은 병으로 앓고 계신 어머니를 두고 가기에는 너무나도 멀었다. 거기다가 펜릴 기사단까지 가는 데 드는 경비는 턱없이 커서, 만약 그 돈이 있었다 할지라도 어머니의 약값으로 쓰고 없었을 것이었다.
칼베르크에 대해서 주변의 아는 친구들이 ‘킬베르크’라 부를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으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칼베르크의 부당한 대우를 뚫고 들어갔다. 발뭉은 저 소녀와 똑같은 상자를 열었고, 그 때 철갑 빠진 건틀릿을 끼고 상대를 때려 눕혀서 칼베르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녀의 손은 그 때로부터 4년여가 지난 지금의 자기 손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백작가의 영애로서 곱게 자랐을 소녀가 얼마나 미친 듯이 수련했으면 이 정도의 손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을 잡고 휘둘러 물집이 맺히고 터지고를 수십 수백은 반복해야 나올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소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기만 한 이비에타를 보며, 발뭉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철없는 귀족 영애가 기사단을 우습게보고 시험을 보러 왔다 생각하며 그녀를 낮잡아보던 자신을 자책했다. 그리고 이비에타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자신이 시험을 보았을 때는 제대로 차리지도 않았던 격식을, 지원생 앞에 서서 차린 것이었다.
이비에타 또한 그런 발뭉을 보며 격식을 올린다. 몇몇 놈들이 ‘발뭉 놈 먼저 인사하는 거 봐, 지원생이 먼저 인사하는 건데 순서 틀렸군.’ 이라거나 ‘평민 출신은 어쩔 수 없어. 노예근성이 뿌리까지 박혀 있다니까?’ 하고 웃어젖혔지만, 둘은 상관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시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