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은 입을 꾹 다문 채 눈동자를 계속 움직였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침묵의 운동이 5분가량 지속되었다.
수희가 손가락 움직임을 멈추자 아버님은 양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셨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탄식을 쏟아냈다.
“내가 거의 정신을 잃을 무렵 저 사람이 나를 물 밖으로 끄집어 냈어요. 빈 코트만 있는 걸 보고 소리를 지르며 저 사람이 다시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하도 물을 마셔서 구역질을 하면서 본 하늘이 참 파랬어요. 주경이가 살아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나는 죽어도 좋다, 주경이가 살아서 다행이다....... 혜인이만 이제 살면 된다.......저 사람이 나중에 혜인이를 건졌는데...... 숨을 쉬지 않았어요, 끝내. 이따금 이미 숨도 안 쉴 애를 물 속에서 안고 나오던 저 사람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미안해서.......”
아버님은 숨을 차마 내쉬지 못했다. 미안해서, 정말로 미안해서, 당신은 내 자식을 구해주었는데 나는 그러질 못해서 미안해서 당신은 아마 때때로 숨을 못 쉬고 길을 가다가도 가슴을 부여 쥐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아버님, 어머님이 어떤 이유로 혜인씨 대신 주경씨를 구했는지는 이제 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듯 어머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러하니까요. 아버님이 어머님을 이제까지 연민으로 보았듯, 엄청난 괴로움을 감추며 살아오신 어머님을 불쌍하게, 가엽게 보아주세요. 어머님이 한동안 엄청나게 괴로우실 거에요. 그 때 아버님이 옆에서 따스하게 돌봐주셔야 합니다. 아버님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어머님에게.”
아버님이 천천히 손을 얼굴에서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희는 길고 긴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병실을 나서려는 수희에게 아버님이 품 안에서 흰 봉투를 꺼내 건넸다.
“주경이 출장 진료비로 넣었는데, 제 건 안 들어 있습니다.”
수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봉투를 받아 병실에서 나왔다.
고통스러운 진실이 밝혀졌다. 주경씨는 이제 죄책감을 덜고 똑바로 현실을 보게 되리라. 고통을 딛고 새로운 가족으로, 새로운 관계 속에서 서로를 아끼게 되길 수희는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결코 예전과 같아지질 않으리란 것을. 주경은 새엄마를 볼 때마다 자신이었을 아이를 발로 밀어넣는 걸 때로 생각할 것이다. 아버님은 아내가 주경을 살리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때로 생각하며 부인의 눈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님은........
결국 친딸도 의붓딸도 잃어버리게 된 어머님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희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한참을 심호흡하며 서 있었다. 몹쓸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절망과 질병을 가져온 판도라의 상자를 생각하며. 끝내 남아 있었던 희망을 희망하며.
병원을 나서 전철역으로 향하던 수희는 정 원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눈이 저절로 감길 정도로 피로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허리가 굽어지는 할머니와, 더워지는 날씨에 벌써 짓무르기 시작했을 화상 환자 아빠를 뵙기 전에 숨을 좀 돌리고 싶었다.
정 원장은 단골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뭐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가 다 있냐? 친딸인 줄 알고 건졌는데 의붓딸이었다니, 이야.”
진심으로 감탄한 듯 정 원장은 휘파람까지 불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 표정이냐?”
“똥 마려운 강아지 본 적이나 있어요?”
“어허, 봤지. 울 집이 예전부터 진돗개를 길렀어요. 똥 마려운 강아지, 오줌 마려운 강아지, 눈도 못 뜨고 비척대는 강아지, 기타 등등의 강아지를 질리도록 봤지. 개 돌보는 게 내 담당이었거든. 아 씨 개 똥 치우다 보낸 내 세월을 생각하면!”
정 원장은 아직도 똥 냄새가 손에 배있기나 한 듯 손바닥을 킁킁거리더니 뻘건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오호!”
수희는 와인을 디켄팅 잘 된 풀 바디 와인을 한 모금 넘기며 대충 장단을 맞췄다.
“오호? 뭔 의미야? 나처럼 귀티 좔좔 흐르는 애가 그런 거 했다는 게 안 믿긴다는 의미?”
디켄터를 집어 들어 맥주 따르듯 한 가득 와인을 잔에 들이부으며 정 원장이 이죽거렸다.
신 주경씨 어머니는 괜찮으실까?
수희는 차마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가슴팍만 부서져라 내리치던 주경 어머니의 텅 빈 눈동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근무 시간 외에 외부에서 환자 만나고 그러는 거 오바야. 그러면 이 일 오래 못한다.”
정 원장의 질책에 수희는 정신을 차렸다. 와인 한 병을 거의 다 비웠으면서도 눈이 맑았다.
“니 보기엔 내가 술이나 좋아하고 도박이나 좋아하는 개차반이겠지만 짬밥이 괜히 있는 줄 아냐? 정신이야, 정신. 우리가 치료하는 게 정신이라고. 부러져서 캐스트 해주면 더 강하게 붙는 뼈같은 것이 아니라고 정신은. 퍼석한 두부같은 것에 우주와 오만 망상과 귀신까지 담고 있는 게 정신이야. 그러면서 단순한 전기 자극에도 오줌 지릴 정도로 황홀감을 불러 일으키는 뇌라고, 정신이. 그러니까 퇴근하면 좀 다 털고 당신 정신도 좀 챙기시라고.”
정 원장이 잔을 들어 수희의 잔에 챙 하고 부딪쳤다.
수희는 피식 웃으며 남은 와인을 다 비웠다. 목에 넘어가는 와인의 풍미가 다른 때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선배는 어떤 때 보면 해탈한 현자같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초탈해 질 수 있는 거지?”
선배가 검지 손가락을 들고 까닥거렸다.
“간단하지. 부자집에서 태어나 돈 걱정이라고는 생전 안하고 살다가 도박으로 한 재산 날려보면 이렇게 될 수 있어.”
그러면서 한 잔 가득 있는 와인을 맥주 마시듯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다.
“선배, 약도 먹으면서 이렇게 술 많이 마시면......”
“응? 간 작살난다고? 근데 어쩌냐? 눈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빙빙 도는 바카라판 지우려면 내가 어째야겠냐? 이이제이 전략을 쓰는 거지. 도박 충동조절장애를 알콜 충동조절장애로 극복하는 전략. 어때?”
정 원장이 실실거리며 또 한잔을 다 비웠다.
최악보다 차악을 선택하는 삶.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이란 게 거의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의 수인지도 모른다.
네가 기억의 문을 한사코 열지 않는 것처럼.......
왼손이 허벅지에서 꿈틀거렸다. 수희는 제길, 낮게 욕을 내뱉으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허벅지 위에 단단히 눌러붙였다.
“왜, 또 경련이야? 너 혹시.......”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언제부터 눈치를 챈 걸까?
내 왼손이 해리 현상을 나타낸다는 걸.......
수희는 긴장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파킨슨? 헌팅턴? 수전증? 정밀 검사 받았어?”
수희는 긴장을 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단순 수전증. 그래서 외과 못 갔어요. 미리 말씀 못드려 죄송해요, 선배님.”
“단순 수전증? 그래도 환자한테 주사줄 때는 방 실장이나 허 간호사 시켜라. 괜히 사고치지 말고.”
“원장님이야 말로 어때요? 날트렉손 효과 좀 나요?”
수희는 얼른 화제를 선배에게 돌렸다.
“견디며 사는 거지. 사람마다 건너는 고해의 바다는 다 다르니까.”
당신은 도박 중독의 바다를 건너고 있고, 나는 또 무슨 바다를 건너는 건가.
각자의 바다를 건너면서 가끔 이렇게 중간 중간 섬에서 만나 와인 한잔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는 사람만 있어도 삶은 버틸만한 것이라고 수희는 생각하며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