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옥면공자(玉面公子)
- 넌 인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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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남동쪽에 위치한 강서성(江西省).
강서성의 성도인 남창으로부터 남쪽으로 한나절 거리를 달리다 보면 옥화산(玉化山)이란 곳이 나온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산줄기가 넓게 굽이굽이 펼쳐져서 장관을 이뤘고,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로 수목이 무성한 곳.
그 옥화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으로 커다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장 정도의 낮은 담벼락에 둘러싸여, 안에 위치한 이십여 개의 전각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특이한 구조.
바로 강호 최고 여고수인 검후(劒后) 이화영(李華嶺)이 궁주로 있는 만검궁(萬劒宮)이었다.
궁도수는 이백오십여 명으로 대방파는 아니었지만, 그들 모두가 정예라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검후 이화영이 존재했기에 어느 곳도 그들을 업신여기지 못했다.
무림은 그런 곳이었다.
하오문이 수하 인원이 아무리 많다 해도 늘 괴롭힘을 당하는 이유가 초고수가 없고, 절정고수가 적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고수를 가지고 있는 방파는 그 인원이 적어도 당당히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또한 만검궁에는 검후 외에도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었다.
소검후(少劒后) 빙령.
검후의 직전제자 중 둘째자리에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으로 대사형 옥면공자(玉面公子)를 제치고 후계자인 소궁주 자리를 차지한 여인.
누구라도 그녀를 보게 된다면 반할 수밖에 없다는 미모로 무림화(武林花)란 별호를 가졌었던 여인.
만검궁의 궁도수가 이백오십이라 하지만, 그것은 검후 이화영이 궁도를 받음에 있어서 철저하게 능력을 보고 뽑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들어오는 대로 다 받아준다고 했다면, 그 수는 족히 천 명을 넘어 대방파로 불리었으리라.
그만큼 소검후 빙령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무사들의 숫자는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저력이 있는 만검궁에도 그늘이 찾아오고 있었다.
검후 이화영.
그녀의 대내외적인 활동이 삼 년 전부터 거의 사라진 것이다.
늘 원기왕성하고, 어떤 장부보다 호연지기가 컸던 검후가 자신의 방 속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인들은 검후가 자신보다 윗 단계라는 삼삼인(三三人)의 초인 수준에 들어가기 위해 폐관수련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방파 수장의 실제적인 공석이 삼 년이 넘어가면서, 만검궁의 위세는 현저하게 약해지고 있었다.
“아가씨. 서, 설마…… 벌써 끝내신 겁니까?”
신신 파파의 음성이 자못 떨렸다.
옥화산의 청월봉 중턱에 위치한 동굴 앞.
이곳은 만검궁의 제자가 궁주의 명을 받아 폐관수련을 할 때 쓰이는 곳이었다.
빙령은 때에 찌든 낡은 무복을 입은 채, 땅바닥에 누워서 허공을 보고 있었다.
한여름이라 일찍 떠오른 햇살이 그녀에게 쏟아져 내렸다.
이미 동이 트기 전부터 나와 있었던 그녀를, 아침 식사를 가져오던 신신 파파가 보게 된 것이다.
삼 년하고도 한 달 전 즈음, 검후는 빙령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절기인 만검화(萬劒華)의 비급을 주면서 말했었다.
‘빙령아. 네가 만검화를 익히기엔 아직 너의 내공이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검에 대한 오성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난 안다. 내공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수련해라. 일단 육성까지만 익히면, 너의 공력이 쌓이면서 차차 대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너라면 만검화 육성의 수준까진 오 년 안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빙령은 감격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아직 검후의 나이 오십으로 한창이었다. 갑자기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생각에 이상했지만,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런 궁금증은 이내 묻혀버렸다.
물론 대두 문제 때문에 삼 년만 나중에 하겠다고 몇 번 주장하긴 했으나 검후의 명은 철회되지 않았었다.
“안녕! 신신 파파.”
빙령이 상반신을 일으키며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신신 파파는 그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삼 년 넘게 수련을 하면서 그녀의 얼굴은 약간 창백하다 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약간 수척해진 것도 같았다.
빙령의 나이 어느새 스물여덟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엔 십 년은 더 어려 보였다. 그러면서도 28년의 세월이 주는 성숙함이 그녀의 전신에서 은연중에 풍겨 나왔다.
“아!”
끼니때마다 식사를 가져올 뿐, 직접 본 것은 삼 년만이었다. 그러나 워낙 오랜 시간 빙령과 함께 있었기에, 빙령이 주는 아름다움에는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인데, 사내들이 빙령을 보면 어떨까?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단순한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청초함과 신선함, 성숙함이 묘하게 보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신신 파파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신신 파파! 궁에는 별일 없지? 궁주님은?”
빙령이 반가운 어조로 물으며 다가섰다. 신신 파파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던 자신을 책망하며 대꾸했다.
“예, 이제 내려가시면 다 아시게 될 텐데요. 그런데 벌써 6성까지 다 마치신 겁니까? 아직 이 년은 더 수련해야…….”
“훗, 왜? 안 믿겨? 그나저나 오늘 아침 식사는 뭘까?”
빙령이 웃으며 신신 파파가 들고 있던 쟁반을 받아들고는 위를 덮은 보자기를 젖혔다.
“정말 다 마치신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어.”
“예?”
“만나기로 한 녀석이 있거든. 그 사람이 왔을 때, 내가 없으면 좀 그럴 거 같아서. 하하하, 그래서 죽기 살기로 했지. 뭐.”
“……!”
신신 파파의 눈살이 살짝 찡그려졌다.
분명 오 년 전, 정신을 잃기 전에 잠시 보았던 초절정 왕 싸가지, 무영을 말함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놈의 기지 때문에 살아났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건만, 빙령이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으니 그 뒷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그놈의 의동생이란 대두까지 본궁에 데리고 와서 무공을 가르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뭐,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생명의 은인인 건 확실하니까.
빙령의 성품상,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 년 뒤에 찾아오겠다는 무영을 기다리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빙령의 태도가 단순히 생명의 은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빙령은…… 그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신신 파파의 머리가 아파왔다.
빙령이라면 천하의 최고 기재들, 천재들 중에서 고르고 고를 수 있었다. 집안 좋고 능력 좋은 귀공자들이 많고도 많은데, 왜 그런 삼류 건달 놈을 기다리는지…….
“우와! 오늘 웬일이야? 고기반찬이 다 있네. 오늘도 전부 풀만 있으면 내려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후후후, 신신 파파가 여기까지 들고 온 성의를 봐서 맛있게 해치워주겠어! 아자!”
빙령이 젓가락을 들더니 기쁜 표정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마치 선머슴 같은 그런 행동은 지금 빙령의 외모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또 다른 빙령의 매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신신 파파는 잘 알고 있었고, 말린다고 듣는 빙령도 아니었기에 그저 빙그레 웃었다.
‘빙령 아가씨와 무영이라……. 아아. 너무 그림이 안 나와. 그건 절대 안 돼! 아가씨는 너무 순진해서 오히려 무례한 놈이 신선해 보인 거야. 맞아. 그거야.’
신신 파파는 정신없이 식사를 하는 빙령을 보며 결론을 내렸다.
빙령은 열 살이 넘어가면서부터 수많은 귀공자들을 보았다. 또한 그 주변으로는 항상 예의가 깍듯한 인물들만 있었으니, 무영이 신선해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절대로, 둘이 맺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비록 나이를 잔뜩 먹은 노파였지만, 이건 같은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그리고 빙령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 신신 파파였다.
연예는 몰라도, 결혼이란 것은 호기심이나 충동으로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 옛날, 신신 파파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다. 그리고 은자도 주고 밥도 줬다. 그런데…… 그 남자가 천하의 바람둥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슬픔이라니.
무영 같은 뒷골목 출신의 놈은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의 옛 남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으리라. 그때의 싸가지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세상에서 최고로 훌륭한 남자와 짝을 맺어야 합니다. 무영…… 그놈은 정말 아니에요. 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셔야 할 텐데.’
“아, 수련을 마치고 먹는 식사란 역시 꿀맛이구나. 그런데 신신 파파. 대두는 잘 있어? 지금쯤이면 일류 수준까지 왔을까? 녀석도 무영을 닮아 독종이고 힘이 엄청 장사잖아. 킥킥킥.”
“……!”
신신 파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젓가락을 입 안에 넣고 빠끔히 올려다보던 빙령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빙령의 눈썹이 조금씩 구겨졌다.
“뭐야? 대두 잘 있냐고? 신신 파파.”
“그것이…….”
신신 파파는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빙령은 폐관수관 들어가기 전인 이 년 동안, 직접 또는 다른 무공교두에게 부탁하며 대두를 가르치는 일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대두의 나이를 감안하면 내가고수가 되기는 힘들다.
그러나 대두의 힘이 타고난 신력인 것을 안 빙령은 외공(外功)에 치중하도록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친동생이나 연인같이 신경을 쓰는 모습에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기도 했고, 빙령 같은 미녀의 관심을 받는 대두를 부러운 시선으로 보았었다.
“신신 파파! 날 똑바로 봐.”
빙령은 먹던 것을 중지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물론 고기는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신신 파파의 얼굴이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길을 피했다.
“아가씨, 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아이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는 지.”
“신신 파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가씨…….”
신신 파파는 말을 흐리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 모습에 빙령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영이나 대두가 없었다면, 신신 파파나 나는 그때 죽었어. 그걸 잊은 거야? 사람이라면 절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지.”
“…….”
“난 신신 파파가 좋아. 신신 파파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기에 신신 파파도 내 의견을 존중해 주고, 내 뜻을 따라주었으면 좋겠어.”
신신 파파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럴수록 빙령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말해 봐. 신신 파파. 대두는 어디 있지? 어떻게 지내고 있지?”
“휴우, 죄송합니다. 저도 말리려고 했지만…….”
신신 파파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얘기가 진행되면서 빙령의 얼굴이 끓어오르는 분기로 붉어졌다.
“사형이 그랬단 거지. 자식이 죽으려고! 내가 소궁주가 된 것이 좀 미안해서…… 웬만하면 대충대충 넘어가 주려고 했건만.”
말을 다 들은 빙령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신신 파파는 여전한, 아니 더욱 거칠어진 빙령의 말투에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혀를 찼지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려가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본궁은 옥면공자님께서 전권을 다 장악하고 계십니다. 아가씨가 폐관수련에 들어간 이후, 궁주님께서도 삼 년 동안 도대체 방 안에서 나오시질 않으니…….”
빙령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궁주님께서?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하신거야?”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만사가 귀찮다고…….”
“그래? 노처녀(老處女)라 인생의 회의가 든 건가? 그래도 삼 년은 너무 길잖아.”
“아, 아가씨. 무슨 그런 망발을.”
신신 파파가 당혹스러워하며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나 빙령은 고개를 흔들며 주먹을 쥐었다.
“어쨌거나 대두가 그렇단 말이지. 내가 잘난 건 없어. 하지만 대두를 그렇게 취급하는 건, 소궁주란 권위에 대한 도전이야. 아무리 사형이라도 이건 묵과할 수 없어.”
빙령이 발을 옮기기 시작하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또한…… 미안하지만 사형은 아니야. 내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왜 소궁주가 된 줄 알아? 그건 사형이 정말 아이었기 때문이야. 그 인간이 나대고 다니면 본궁이 망하는 건 순식간이야.”
“아가씨! 지금의 본궁은 예전의 만검궁이 아닙니다. 옥면공자께서 수뇌부 일부를 장악하시고…….”
신신 파파는 답답함에 언성을 높이며 외쳤다. 잘못하면 소궁주의 자리를 뺏길 수도 있었다. 그만큼 옥면공자의 힘은 커져 있었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만검궁주 검후의 태도였다.
그녀가 비록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궁 내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 보고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예전부터 거만한 옥면공자를 호되게 꾸짖던 검후는 이제 없었다.
그런 것이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검궁의 수뇌부들과 간부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소궁주의 자리를 소검후에게서 옥면공자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냐는 억측이 무성해졌고, 결국 삼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는 상당수가 옥면공자에게 줄을 서고 있었다.
“상관없어! 내 성질 몰라? 아자! 아자아자!”
빙령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신신 파파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급히 빙령의 뒤를 따라나섰다.
최소한 일이 너무 커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에.
빙령의 성격이라면 정말 끝도 없이 폭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었다.
소궁주 자리에서 쫓겨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