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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상관없겠지.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운풍원주는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뒤를 따라 왔던 스무 명의 환교도들이 천천히 앞쪽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운풍원에 소속된 수하들로 방금 무영이 상대한 자들보다 적어도 두 단계는 상위의 무사들이었다.
무영은, 자신을 포위하기 시작하는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운풍원주를 직시하며 말했다.
“잔챙이들을 상대하려고 온 게 아니다. 교주를 불러.”
“훗! 외곽 경비나 서는 하급 무사들을 좀 해치웠다고 기고만장해졌군.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야.”
운풍원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한쪽 머리가 또 아파져 왔다.
분명 상대의 이름을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사과 한마디면 끝날 일을…… 쯧쯧.”
무영이 포위를 끝낸 환교도들을 훑어보면서 혀를 찼다. 운풍원주는 그 모습에 더욱 기가 막혀왔다.
“사과라고 했느냐?”
“물론, 예전에 너희들은 나와 내 여자를 죽이려 했으니까.”
“……?”
“그때 경고했었다. 오 년 안에 찾아가겠다고.”
“……!”
운풍원주의 뇌리에 방금 보았던 문서가 떠올랐다.
“오 년 안에? 아아! 너였구나. 고무영. 그렇지. 맞아! 무영이었어. 허허허.”
운풍원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묵묵히 포위망을 구축한 환교도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풍원주를 보았다. 마치 반가운 사람을 만난 모양 아닌가?
무영 역시 의외라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허접한 방파는 아니었군. 후후후.”
무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앞서 싸운 서른 복면인과의 싸움에서 좀 실망하고 있던 차였다. 지금 포위하고 있는 흑의인이나 저 초로인은 좀 나아보였지만 말이다.
무영도 잘 알고 있었다.
벽력문에 내려오는 많은 영약을 섭취하기는 했지만 그것의 반의반도 몸에 용해시키지 못한 자신의 내력으로는, 혼자서 환교를 박살낸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을.
싸우다가 내력과 체력이 먼저 바닥나 버릴 확률이 컸다.
그러나…… 확인하고 싶었다.
오 년 가까운 지옥 같은 수련의 결과를.
처음부터 무영이 환교 총타에 직접 쳐들어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 년간의 수련 기간 중 읽은, 강호 방파들에 관한 서적엔 환교관련 내용도 있었다.
그 책에서 환교 총타엔 의외로 적은 인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무영은 마음을 바꾼 것이다.
자잘한 분타 몇 군데를 부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총타를 박살낸다. 그것이 자신의 성격과도 맞았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무영은 몰랐다.
지금의 환교 총타가 다른 어떤 때보다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운풍원장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문을 잃어야 했다. 정말 놈이 오 년 안에 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였다.
미쳤거나, 아니면 많이 미쳤거나.
“젠장……. 무공을 모른다더니, 그동안 어디에 틀어박혀서 열심히 수련을 했나보군. 그러나 거기까지다. 애들아! 저런 미친놈은 고문해봐야 재미없다. 그냥 죽여라.”
운풍원장의 명이 떨어졌다.
차아아아앙.
동시에 병장기를 빼어드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타타타타타닥.
운풍원 소속의 흑의인들이 중심에 있는 무영을 향해 동시에 달려드는 소리가 대지를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영은 짜증어린 언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놈들은 아직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서른 명을 박살 낸 자신에게 이렇게 단순한 공격을 한다는 것은 모욕이 아닌가!
달려오는 환교도들의 동작은 너무 느려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오 년간, 사부의 눈부신 동작에 익숙해져 버린 무영에게 이건 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부우우웅.
무영의 주먹이 앞으로 다가오는 상대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주먹에 맺히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커다란 권영(拳影)을 만들며 상대의 도와 부딪쳤다.
퍼엉!
선두의 흑의인의 눈이 커져갔다.
폭음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거대한 힘! 내지르던 도는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했다.
“크어억.”
무영의 주먹에서 쏟아져 나간 권경(拳勁)이 도를 밀어내며 나아가 배에 쑤셔 박혔다. 흑의인은 단말마를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퍼퍼퍼퍼어어엉.
“커헉.”
“으아악.”
무영의 양 주먹이 교차하며 앞으로 계속 뻗어 나갔고, 폭음과 비명성이 그의 전면에서 계속 일었다.
쇄애애액.
무영의 옆구리와 등으로 파고 들어오는 공격들.
무영은 구혈구궁보를 이용해 발로 땅을 가볍게 툭툭 쳤다.
스르르르륵.
마치 무언가에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이동하는 무영. 앞으로 달려들던 이들은 모두 무영의 주먹에 의해 나가떨어지고 없었다.
홱! 홱홱홱!
목표를 잃은 도검이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그러나 어느새 무영이 다시 뒤로 돌아와 병장기가 지나간 자리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위치를 변화시킨 무영의 동작은 원래 그곳에 계속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환교도들에게 불러일으켰다.
등을 노렸으나 아슬아슬하게 놓친 흑의인 중의 하나가 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렸다. 무영의 손이 어느새 가슴의 안쪽으로 들어와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커헉!”
어떻게 대응할 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수준 차이가.
이자는 애초에 자신들이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퍽퍽.
탁.
멱살을 잡지 않은 무영의 주먹이 배를 연달아 두 번 치고는 허리를 움켜잡았다.
부우우웅.
아득한 고통 속에서도, 흑의인은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무영이 자신을 던져 버린 것이다.
퍼퍼퍼어억.
“크아아악.”
던져진 흑의인의 몸이 주변의 몇몇 동료들을 뭉개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퍼퍼퍼퍼어엉.
던져진 동료를 피한 환교도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무영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환교도들은 무영의 쾌속한 주먹에 얼굴과 몸을 고스란히 내주며 날아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스무 명 중 열다섯이 부상을 당하거나 기절해 버렸다. 그러나 무영은 멈추지 않았다.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던 자의 얼굴 가운데를 주먹으로 찍고는 멍하게 있는 나머지 환교도들의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쇄애애액. 퍼퍼퍼퍽!
무영의 발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려지는 선 위에 있던 환교도들의 신형이 마치 던져진 인형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져 내렸다.
“……!”
운풍원장은 귀가 왱왱거리는 것 같았다.
숫자를 빠르게 센다면 오륙십까지 셀 시간일까?
그런 시간에 자신의 직속 수하들 스물이 모두 누워있었다.
“이젠 교주를 불러줄 건가?”
무영이 싸늘하게 말하며 운풍원장에게 천천히 다가들었다. 그러나 운풍원장은 도망가거나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서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퍽!
멍하니 서 있던 운풍원장의 머리가 마치 수박처럼 깨져나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쏴아아아아!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혈우(血雨)!
이 장 반의 거리까지 접근하던 무영은, 그 끔찍한 광경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환교 정문 위의 기와에, 남색의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인이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매우 잔인한 미소였다.
“이 녀석의 잘못은 두 가지야. 상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과,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이지. 그거면 죽을 이유가 충분하지 않나?”
슈르르르륵. 탁.
운풍원장의 머리를 터트린 기이한 무기가 중년인의 손으로 회수됐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된 쇠 구슬.
성인 주먹 절반만 한 크기의 쇠 구슬은 앉아있는 중년인의 손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덜컹! 타타타타타닥.
중년인의 밑쪽에 있는 환교의 정문이 열리면서 흑의인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무영은 등장하는 그들을 잠시 보다가 다시 중년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원래 수하를 그렇게 죽이나? 네가 교주인가?”
“건방진 녀석. 교주님은 이곳에 없다. 그러니 현재 이곳에선 내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지. 크크큭.”
중년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키득거렸다. 무영은 교주가 없다는 말에 허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중년인에 못지않은 차갑기 그지없는 미소.
“재수 없는 놈. 네 행동을 보니 사과로 끝낼 수 없게 됐다. 너 같은 쓰레기를 보면 심사가 뒤틀려서 말이야.”
중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그의 잔인한 얼굴이 더욱 삭막하게 변해갔다.
무영은 그를 쏘아보면서 덧붙였다.
“여기 있는 수하가 다 이것뿐인가? 그렇다면 너는 오늘 죽었다. 날 원망 말고 네 싸가지를 원망해라.”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군. 그게 마음에 들어. 크하하하.”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그리고 웃음을 마치고는 어느새 주욱 늘어선 수하들 중 한 노인을 향해 말했다.
“총관! 놈을 죽이진 마라. 단, 한두 군데를 자르는 건 상관없어.”
“예.”
노인이 무영을 보며 낮게 대답하고는 주변의 수하들에게 외쳤다.
“놈을 잡아라!”
“옛!”
칠십여 명에 이르는 환교도들이 일제히 대답하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무영은 허리춤에 있는 금강저를 천천히 빼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제야 제대로 몸을 풀겠군. 이대로 끝났다면 난 지난 오 년간이 너무 억울해 미쳤을 지도 몰라.”
무영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물론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사실상 그가 강호 출도한 이래로, 처음으로 맞는 제대로 된 싸움인 것이다.
다가오는 무리들 중, 서너 명의 노인과 오륙 명의 장년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방금까지 상대했던 이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고수였다.
그리고 정문의 지붕 위에 있는 저 중년인.
우르르릉.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무영의 몸에서 나지막한 천둥소리가 일었다.
분명한 건, 자신의 사부와 비교하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안 되는 이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인원과 수준이라면, 결코 체력이나 내력이 부족할 염려는 없었다.
남은 것은 좋은 실전 경험을 갖는 것과 복수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로 이들은……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최적의 상대들이었다. 무엇보다 쓰레기들이란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쓰레기는…… 치워야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