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약속(約束)
- 오 년, 오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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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 길게 땅거미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벽력군은 시간을 재촉하는 무영이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환술이 최고의 힘을 발할 때는 어둠이 깔린 밤이었다.
산의 어둠은 다른 어떤 곳보다 더 일찍 찾아오는 법.
벽력군은 무영이 정한 시간 때문에도 그랬지만 최대한 속전속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순식간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고, 그렇다면 환교도들의 힘은 몇 배 더 강해질 것이다.
벽력군은 평소처럼 혼자가 아니었다. 지켜야 할 존재들이 무려 넷이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소검후의 실력이 제법이라는 점이었다.
내력이나 체력이 떨어진 게 아쉽긴 했지만,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끌어줄 능력이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무영이었다.
저놈을 제자로 삼아서 지금까지 보여준 싸가지 없는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상당한 괴롭힘을 주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벽력군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무영을 안전하게 이곳에서 내보내야 했다.
우르르릉.
벽력군의 몸에서 갑자기 기괴한 소리가 일었다.
그것은 천둥소리였다.
환교도들은 그 소리에 바짝 긴장을 하며 숨을 들이켰다. 노인의 신형에서 거대한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무영의 지시에 따라 신신 파파를 업던 대두도 화들짝 놀라며 벽력군을 보며 말했다.
“속이 안 좋으세요?”
벽력군은 순간적으로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기가 막혀 냅다 호통을 치려 할 때, 대두가 잇달아 말했다.
“냄새는 없네요. 그럼 많이 나쁜 건 아니죠.”
벽력군은 울고 싶어졌다.
스스로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는 벽력신공(霹靂神功)을 어찌 한낱 방귀로 몰고 간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소검후 빙령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검을 곧추 세워 경계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몸 안의 내력, 즉 단전에 모아두신 힘을 힘껏 끌어올리시는 거야. 좀 독특한 운기행공을 하시는 것 같아.”
대두는 다행이라는 듯이 함박웃음을 짓다가 곧 얼굴을 찡그렸다. 단신의 흑의인이 공격의 명을 내린 것이다.
“유혼수라진(幽魂修羅陳)을 펼쳐라!”
타타타타타~.
삼백의 복면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하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실제 달려들지는 않으면서 열심히 제자리 뛰기를 하는 그들을 보면서 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펼쳐질 것임을 직감한 무영은 빙령의 옆에서 비수를 단단히 잡았다.
주변으로 흙먼지가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삼백여 명이 발로 경력을 내뿜으면서 주변의 공기를 묘하게 흩트리고 있었다.
우르르릉.
벽력군의 신형에서 나오는 천둥소리가 더욱 커져갔다. 어느새 뿌옇게 올라온 흙먼지는 대지에 내려앉는 어둠과 함께 무영 일행의 시야를 흐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지를 쿵쾅거리던 발소리가 그들의 모습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무영은 난생 처음 보는 기이한 사술에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반 각 남았습니다.”
“허! 고놈 정말이지. 진짜 고약한 놈일세. 안다. 알아. 우물가에서 고량주를 찾을 놈이 아닌가? 소검후!”
“예! 어르신.”
빙령이 긴장한 음성으로 즉시 대꾸했다.
그녀 역시 환교도가 펼치는 진법에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그건 벽력군이 등장할 시에 보여준 가공할 무위 때문이었다.
“네가 앞장을 서라!”
빙령의 아미가 심각할 정도로 구겨졌다.
“제가요?”
빙령은 문득 신신 파파에게 앞장을 서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신신 파파가 자신을 속으로 얼마나 많이 원망했을까?
“앞만 보고 뛰어라.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내가 뒤에서 치워주겠다.”
“아!”
잠시 어두워졌던 빙령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벽력군의 존재는 든든함 그 이상이었다.
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벽력군에게 말을 건넸다.
“믿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엄호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포위망을 뚫으면, 후위를 철통같이 막아서 단 한 명도 통과시켜선 안 됩니다. 명심하십시오.”
벽력군은 무영의 냉정하면서도 뻔뻔한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어둠과 흙먼지에 몸을 숨긴 환교도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쏴아아아!
쇄애애액!
사방에서 병장기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그 중에는 장력도 있었고, 암기도 있었다.
벽력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어서 뛰어라! 벽산막(霹霰幕)!”
노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며 들고 있는 몽둥이와 다른 한 손이 양 옆으로 뻗어져 어지럽게 흔들렸다.
번쩍!
손과 몽둥이에서 빛이 연달아 일렁였다. 마치 시퍼런 불꽃이 얇게 퍼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잇달아 터져나가는 그 모습은 장관을 연출했다.
빛의 향연인가?
푸르스름한 빛이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고는 상대의 기습을 차단하고 있었다.
째째째애애앵.
퍼퍼퍼펑.
철음과 폭음이 잇달아 무영 일행의 주변에서 터져 나왔다.
“어서!”
벽력군이 다급하게 외쳤다.
치고받고 싸우는 거라면 모를까?
자신도 아닌 남을 지키는 것은 영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경험이 전무한 탓이었다.
빙령은 칠흑같이 어두워진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적들의 공격에 나갈 때를 찾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때 무영이 앞으로 뛰어 나가며 빙령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자!”
“어?”
쩡쩡!
무영을 노리고 들어오던 암기 두 개가 벽력군이 쏘아낸, 빛처럼 보이는 기이한 장력에 의해 튕겨나갔다.
홱홱.
대두도 무영과 빙령의 뒤를 쫓아 대지를 힘껏 박찼다. 업혀진 신신 파파가 생각보다 무겁긴 했지만, 대두의 힘은 어렸을 때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퍼퍼퍼펑.
벽력군의 장력이 쉬지 않고 선두에 있는 무영과 빙령의 주변으로 달려와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휙휙휙~.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매서웠다.
무영의 눈에는 일 장 안의 거리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벽력군의 엄호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마치 상대의 공격이 훤히 보인다는 듯이.
“벽력문(霹靂門)이라…… 괜찮군.”
무영은 앞으로 뛰면서 피식 웃었다.
벽력군은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벽력문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벽력군이 앞장을 서고 빙령에게 후위를 맡기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처음 나타날 때 보여준 가공할 무위로 압도하면서 길을 트는 것이 유리했다.
그라면 전면과 좌우측뿐만 아니라 후위의 빙령까지 수시로 도와줄 능력이 있을 테니까.
쨍!
무영의 전면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던 도 하나가 빙령의 검에 맞고는 튕겨져 나갔다.
“무영! 조심해!”
“이번 만이다.”
“뭐?”
“네 도움을 받는 것.”
“……!”
빙령의 눈동자가 얼핏 흔들렸다.
전면을 주시하며 달리고 있기에 무영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무영의 낮지만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음성은 초조한 빙령의 입가에도 미소를 안겨주었다.
“그래, 너라면…… 충분히 날 능가할 거야. 삼백 년쯤 후에는.”
자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빙령이었다.
쨍쨍쨍, 퍼퍼펑.
달리는 그들의 주변은 마치 수십, 수백의 반딧불이가 떠도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터지는 불꽃들은 무시무시한 살기와 필사적으로 막겠다는 의지가 충돌하면서 허공을 수놓았다.
“그대로 돌파해라!”
벽력군의 고함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일 척 길이의 묵빛 몽둥이가 빠져나왔다.
슈슈슈슈슈우우웃.
빙빙 돌면서 앞으로 나가는 몽둥이는 빙령과 무영을 지나쳐 전면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또 다시 펼쳐지는 이기어저(以氣馭杵)!
“크아아악.”
“으아아악. 마, 막아라!”
모습뿐만 아니라 일체의 소리조차 드러내지 않던 복면인들의 비명이 잇달아 터졌다. 무영은 포위망의 지척까지 근접한 것을 직감하고는 빙령에게 소리쳤다.
“지금이야. 네 최고의 검술을 앞으로 펼쳐!”
“좋아!”
빙령이 호기롭게 말하며 검첨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복수의 때가 온 것이다.
도무지 보이지 않던 전면의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며 복면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빙령은 얼마 남지 않은 내력을 검에 주입했다.
“천검만화(天劍萬花)!”
떨어지는 검.
그 검신에서 수십 개의 검화(劒花)가 피어오르며 앞으로 쏘아졌다.
파파파파아아아.
공기를 찢어버리는 파공성과 함께 검화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목표는 하나였다.
앞을 막는 것은 모조리 치워버리겠다는 것.
“크아아악!”
“피, 피해라!”
가뜩이나 미친 듯이 움직이는 벽력군의 몽둥이로 인해 흐트러진 복면인들은 예상치 못한 빙령의 검화에 불귀의 객이 되어갔다.
스으으으으.
어둠이 본격적으로 걷히기 시작했다. 유혼수라진이란 기이한 진법이 힘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무영의 뒤쪽 어둠 저편에서 악에 받친 흑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거냐? 죽여, 죽이란 말이다. 뭣들…… 으에엑!”
그의 고함이 비명으로 끝맺었다.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벽력군의 번개를 내쏘는 듯한 장력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다는 것을.
무영은 벽력군의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하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어느새 그들은 포위망을 막 빠져나온 상태였다.
“벽력군님!”
“뭐, 뭐냐?”
무영의 말대로 후위를 차단하느라 힘을 쓰고 있던 벽력군이 크게 대꾸했다.
“제가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무영의 말에 벽력군의 눈가에 웃음이 깃들었다. 벽력문의 계승자가 되겠다는 동의의 뜻이었다.
“노부가 백 년 걸린 것이나, 넌 오십 년이면 족할 것이다.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여주마. 클클클.”
“그렇군요. 음……, 환교도는 들어라!”
“죽여라! 죽여!”
무영의 말을 듣는 이들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무영은 어깨를 펴고 외쳤다.
“오 년 뒤, 환교에게 오늘의 죄를 묻겠다.”
“……!”
앞에서 계속 달려 나가던 빙령이나 대두도 그리고 놀라운 실력으로 환교를 막고 있던 벽력군도 눈을 치켜떴다.
“나 무영은…… 오 년! 오 년 뒤에 너희를 찾겠다!”
환교도들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정작 더 기가 막힌 건 벽력군이었다.
“오십 년이래두!”
그러나 이미 무영은 뒤돌아서서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