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인질극(人質劇)
-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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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고 싶으냐? 그렇다면 허공에 살려달라고 크게 외치거라.
무영은 자신의 귓속을 파고들어 오는 음성에 굵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혼전의 와중에 들려오는 소리는 무영을 당혹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자신을 향해 말한 사람은 없었다.
‘환청인가?’
무영은 피식 웃으면서 언제든지 비수를 뻗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영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작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노파와 빙령의 공격권 밖으로 빠져나가면 그 순간 목이 떨어져나갈 것이기에 그 중간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간간히 신신 파파와 빙령의 틈을 노리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병장기를 쳐내거나, 두 여인의 허점을 막는 것.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니 그것도 실상은 벅차기 그지없었다.
이들은 자신이 상대하던 뒷골목의 왈패와는 수준이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그렇기에 대두에게도 절대 자신의 등 뒤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경고하며 상황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살폈다.
‘이백오십에서 삼백 가량? 이대로는 곧 지쳐서 죽는다.’
무영은 신신 파파와 빙령의 호흡소리가 점점 불규칙해지는 것을 들으며 입 안의 침이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위기의 상황을 넘겨왔던 무영에게도 지금은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무영의 얼굴에 암담함이 어리는 순간, 갑자기 한 줄기 기광이 눈에서 번뜩였다.
“다르다!”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두워졌던 무영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동시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인해야 했다.
목숨을 건 도박을 하기 위해선 신중해야 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일지라도. 자신의 예상이 틀리다면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차아아앙. 퍼퍼펑.
신신 파파의 몸이 비틀거렸다. 지친 그녀의 가슴에 한 복면인의 장력이 적중한 것이다.
“신신 파파!”
“헉! 할머니!”
빙령의 외침과 대두의 기겁성이 동시에 터졌다. 그러나 신신 파파는 한 걸음 뒤로 밀렸을 뿐 다시 자세를 추슬렀다.
“아, 아직…… 괜찮습니다.”
고통을 참고 있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핏물과 함께 신신 파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하얀 백지와 같았다.
그때 빙령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신신 파파로 인해 그녀의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진 순간, 뾰족한 검첨이 그녀의 허벅지를 향해 쏘아져 들어온 것이다.
퍽!
빙령의 신형이 흔들리듯 뒤로 빠져 검을 살짝 벗어났다.
그러나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빙령은 반대쪽에서 들어온 발에 옆구리를 채이고 말았다.
“큭!”
빙령은 아득한 고통으로 인해 넘어지려던 몸을 가까스로 세우고는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 상대를 뒤로 물리쳤다.
“헉헉…… 아가씨. 괘, 괜찮으신 겁니까?”
“나, 난 괜찮아. 신신 파파는…….”
서로 마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신 파파와 빙령은 안타까운 어조로 말을 나눴다.
대두가 어깨를 들썩이다가 소리를 질렀다.
“이런 나쁜 놈들! 내가 죽어도 너희 같은 놈들은…….”
“대두!”
대두의 분통서린 외침은 무영의 차가운 고함에 막혀버렸다. 대두는 억울한 눈빛으로 무영을 보았다.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뒷골목에서 살면서 늘 죽음은 함께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이렇게 예쁜 선녀님을 공격하는 놈은 필시 아주 나쁜 놈이리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무영은 대두를 향해 말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비수로 한 바퀴 원을 그렸다.
휘리리릭. 홱!
“……!”
무영의 돌연한 행동에 대두가 눈을 치켜떴다. 아니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던 복면인들조차 일시에 동작을 정지했다.
무영의 비수!
그것은 빙령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뭐, 뭐하는 거죠?”
고통을 참고 검을 휘두르고 있던 빙령은 말을 더듬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후후후, 난 살아야겠거든.”
무영이 그녀의 바로 뒤에 붙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서슬 퍼런 비수가 그녀의 목에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혀, 형님! 비겁하십니다!”
“네 놈이 감히!”
대두가 놀라 소리를 쳤고, 신신 파파도 입 안에 고인 피를 고스란히 밖으로 뱉으며 분노했다.
그러나 무영은 태연자약했다. 아니 그의 입꼬리에 말려가는 차가운 미소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도, 동생……. 아니 무영!”
빙령은 목에 닿는 서늘한 비수의 감촉에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돌려 무영을 보았다. 그녀의 큰 눈에 들어오는 무영의 눈빛.
그것은 사람의 안광이 아니었다.
감정이 없는 듯한 무심한 동공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빛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게 만들었다.
이런 남자였던가?
비록 하류층의 사내 같기는 했지만, 그 배짱과 담대함이 왠지 모르게 자신을 끌었었다.
그런데 오판이었던 건가?
비열한 인간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팔에 내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복면인에게 죽을지언정 이런 사내에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후후후, 재미있군. 왜 공격을 하지 않지? 오히려 이건 너희들에게 기회가 아니던가?”
무영의 말에 복면인들이 움찔하는 태도를 보였고, 그제 서야 빙령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력을 모은 팔로 무영을 기습하려던 것을 잠시 멈춘 빙령은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며 주변을 훑었다.
무영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자신의 예상을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너희들은 이 빙령이라는 여자를 죽여서는 안 되는군. 인질로 잡아야 하는 건가?”
“…….”
“이상하다 싶었어. 죽이려면 아까 전에도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어선 안 되지. 그리고 공격이 너무 달랐어. 이 할멈과 빙령에게 하는 공격은…… 겉보기엔 모두 파상적으로 밀어붙였지만, 후후후…….”
무영의 웃음소리가 산길을 휘돌다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복면인들의 난감해 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내가 할멈을 도와준 것이 네 번. 빙령을 도와준 것이 두 번. 그런데 내 비수에 닿는 힘이 달랐다. 너희들이 빙령을 찔러오던 것은 대다수가 허초였어. 마지막으로 빙령을 위기에 빠트린 검도 사실은…… 내가 막을 수 없었지.”
“음…….”
복면인들 여기저기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후후, 그런데 그 검이 빙령의 옆구리 직전에서 현저하게 속도가 떨어지더군. 마치 내가 막아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그녀를 죽이면 넌 죽는다.”
결국 복면인 중 하나가 앞으로 한 발 나와서 이를 갈며 말했다. 무영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나야 어떻게든 죽겠지. 너희들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여인이니까. 난 너희들 같은 놈을 잘 알아. 후후후.”
“으음…….”
앞으로 나온 복면인의 신음성이 더 커졌다.
그들로서도 지금 이 눈앞의 사내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빙령과 신신 파파는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을 알고는 숨을 죽였다. 이 사내로 인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봐. 난 무림인이 아냐. 너희들과 은원도 없는 날, 굳이 죽여야겠냐?”
“…….”
“또한 나에겐 이 여자도 의미 없어. 날 살려준다면…… 이 여자는 곱게 넘겨주지.”
이번엔 신신 파파와 빙령이 놀랐다.
무영의 말은 복면인들과 빙령 일행을 번갈아 가며 기겁하게 만들고 있었다.
신신 파파가 대경하여 무영을 향해 장력을 내뻗으려는 순간, 그녀의 귓속으로 빙령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 신신 파파! 잠시 기다려 봐요. 어쨌거나 시간을 끌어주는 것은…… 우리에게 나쁜 일이 아니에요.
빙령의 전음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 둘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내력과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시점인 지금으로서는.
선두에 있던 복면인은 어깨를 크게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몇 차례 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녀를 내놓는다면 너희 사내놈들은 살려주겠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
너무 빠른 결정에 빙령과 신신 파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무영은 피식 웃었다.
“날 바보로 아는 건가? 난 너희들 같은 놈을 잘 안다고 말한 것을 벌써 잊은 건가? 내가 이 계집을 풀어주고 열 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내 몸은 너희들의 검에 의해 갈가리 찢어지겠지.”
“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
“간단해. 내가 안전한 곳까지 이동할 때까지…… 이 여자는 내 인질이 되는 거지.”
“뭐?”
선두의 복면인은 기가 막혔다. 비수나 도끼를 휘두르는 모양으로 보아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놈이 아니었다.
아마도 어느 뒷골목에서 조금 이름 좀 날리는 놈인 듯싶었다. 그런 천한 놈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 매우 기분 나빴다.
“곧 날이 어두워질 거야. 난 밤을 산에서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무영은 태연하게 말했다. 반면 복면인들의 고뇌는 더욱 깊어졌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꼬인 것인가?
“우린…… 그냥 다 죽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무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복면인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애초에 협박 같은 것이 통하는 놈이 아니었다.
* * *
“허, 저놈 잔머리 굴리는 것 좀 보게.”
묵빛 몽둥이를 가지고 놀던 노인은 혀를 차며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고.
이제야말로 놈이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이야.
“비상한 놈이야. 흐음, 하지만 곧 살려 달라 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놈!”
혼자 중얼거리던 노인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미간을 접었다.
지금까지 세 번이나 놈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녀석은 묵묵부답이었다.
물론 무공을 모르는 무영이기에 전음을 환청이라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었다.
냉정한 무영이라면 슬슬 노인의 전음이 환청이 아니고 누군가가 특별한 방법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젠 결정적인 순간 다시 한 번 전음을 날리면 분명 대꾸가 있을 것이다.
근방까지 온 커다란 날파리들이 끼어들면……, 무영의 저 얄팍한 수는 곧 사장되어버릴 테니까.
“흐으음, 어디 나도 슬슬 준비를 해볼까? 저러다가 녀석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안되지. 놈을 기다린 세월이 얼마인데…….”
얇은 가지 위에 몸을 기대고 있던 노인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문득 무영을 처음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 무영을 보았을 때, 노인은 무영의 근골과 근성에 기쁨을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벽력문의 무공을 익히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훌륭한 근골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노인은 이를 하늘에 감사했다.
벽력문의 벽력신공(霹靂神功)은 다른 내력을 가지고 있다면 익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무영을 계승자로 최종 낙점하기 전, 주변을 맴돌며 무영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했다. 그리고 무영이 복수를 위해 암흑가에 몸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도와주면 복수는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영이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은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무영은 복수를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자신의 개입이 무영의 의심을 살뿐더러, 놈의 성격상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복수를 뒤로 미루고 수련하러 가자하면…… 절대 갈 놈이 아니었다.
결론은 무영이 복수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후에 무영을 벽력문의 계승자로 데려가면 되는 것이다.
또한 노인은 무영을 진득하게 관찰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무영이 벽력문의 계승자가 될 인물인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무영의 잔혹한 성격 때문에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가만히 보면 무영의 잔혹함은 그럴만한 대상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무영의 복수기한을 삼 년으로 잡았다. 삼 년은 기다려준다.
그러나 그 기한이 지나가면 자신이 무영 몰래 초은곽을 죽일 셈이었다.
기다려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이제 그 모든 기다림은 끝이 났다.
그러나 복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무영을 아직 데려가지 못했다.
무영의 독한 근성과 불굴의 의지는 복수를 향한 것이었는데, 그 복수가 끝나자 평범하게 살 궁리만 하는 것이었다.
무영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예전의 근성과 독기를 회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벽력문의 혹독한 1단계조차 통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뭔가 동기부여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고민에 빠져들어 있을 때, 무영에게 닥친 위기는 노인에게 놓칠 수 없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클클클. 드디어 도착했구나.”
노인의 만면에 웃음이 걸렸다. 큰 날파리들이 도달한 것이다.
노인의 몸이 분주해졌다.
그는 기척도 없이 허공을 타고 나무사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영은 결코 뒷골목 건달에게 죽을 놈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림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강한 놈에겐…… 자신이 어떻게 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노인의 지난 세월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노인이 큰 날파리를 경계하는 이유였다.
무영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도울 수 있었다. 그게 벽력문의 율법이었다. 벽력문의 계승자가 되기를 거부한 자는…… 오히려 자신이 죽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