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소검후(少劍后) 빙령(冰靈)
- 정말 더럽게 예쁘군.
1
쏴아아아.
거센 빗방울이 온 세상을 적시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연일 뜨거워진 태양에 달구어졌던 대지는 모처럼 내리는 소나기에 생기를 되찾았다.
반 시진 정도 쏟아졌을까?
순식간에 모여들었던 먹구름이 그 짧은 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잎새와 가지마다 매달린 이슬방울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어느 산속.
“낭패야. 땅이 질어졌어. 함부로 움직였다간 놈들에게 우리의 흔적이 쉽게 드러날 거야.”
산기슭의 커다란 떡갈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두 사람 중, 젊은 여인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백색의 비단 당의를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리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고개를 돌려 노파를 보았다. 한 손에 용두선장을 쥐고 있는 노파가 초조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이곳에 죽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곧 이곳까지 놈들이 몰려올 터, 어떻게 해서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어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해야…….”
“맞아. 그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 문제지.”
면사여인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노파도 고개를 떨궜다.
둘의 신색은 형편없었다.
짙은 남색 옷을 입은 노파는 그나마 나았다.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것 같은 비단 당의를 입고 있는 면사여인은 흙과 피로 범벅이었다. 거기에다가 비까지 고스란히 맞았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인의 모습은 고혹적이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초롱초롱한 큰 눈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비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의 영향이 컸다.
그녀의 몸매는 환상이란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들어가야 할 데는 확실하게 들어갔고, 나와야 할 곳은 거침없이 나왔다.
기다란 목과 섬섬옥수는 아름다움을 넘어 우아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낭랑하나 무척이나 거칠었다.
“죽여서 씹어 먹어도 성이 안찰 놈들 같으니. 도대체 그 놈들 정체가 뭐지? 신신 파파(辛辛婆婆)!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계속 이렇게 도망만 다닐 수는 없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닷새째라고.”
“아가씨…….”
신신 파파의 눈이 흔들렸다.
면사여인의 음성이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신신 파파라 했는가?
그녀는 강서성에 위치한 만검궁의 호법으로서 이미 이십 년 전에 고수의 반열에 오른 자다.
이미 세수 팔십을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녀가 아가씨라는 표현을 하며 공손히 받들 인물이라면?
한 명!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소검후(少劍后) 빙령(冰靈)!
만검궁(萬劍宮)의 소궁주로 다음 세대 강호를 이끌어갈 열 명의 후기지수 중 일 인이며, 한때는 무림화(武林花)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미모를 가진 여인.
신이라도 반할 외모만큼이나 왈가닥 성격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자신이 무림화라 불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능력으로 평가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리고 실력으로 그것을 입증한, 겨우 스물세 살의 여인.
만검궁의 궁주이며, 천하최고의 여고수라 불리는 검후(劒后)가 작년에 공식적으로 빙령을 후계자로 선포하고 소궁주로 삼았다.
그러자 빙령의 별호는 무림화에서 소검후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소검후 빙령.
강호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우상인 그녀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에서 노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복면인들의 실력이 제법인데다가 인원도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실력으로 따지면 빙령이나 신신 파파의 상대가 되진 않았다. 그러나 인해전술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소검후 빙령과 신신 파파가 체력이 소진해 쫓겨 다닐 만큼 말이다.
“신신 파파, 우린 놈들의 정체를 아직 모르지만, 중요한 건 아주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는 거야. 나를 잡기 위해서.”
신신 파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을 집요하게 노리는 복면인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오랜 기간 준비해왔다는 빙령의 말이 옳았다.
산을 내려가는 모든 길목에는 그들이 존재했고, 시간이 갈수록 포위망은 좁혀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물샐 틈도 없이 완벽하게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산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둘은 오히려 깊은 산속으로 쫓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단, 빙령을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놈들은 벌써 전면적인 공세로 나왔을 것이다. 분명 지치게 한 다음 인질로 생포할 작정이리라. 소검후 빙령이라면 어마어마한 인질의 가치가 있으니.
“아가씨, 무슨 묘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정면 돌파!”
“힉!”
신신 파파는 자신도 모르게 기겁하여 눈을 화등잔 만하게 떴다.
빙령은…… 역시 빙령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겁을 상실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젊음이란 것이 좋기는 좋았다. 자신도 예전엔 저렇게 물불 가리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빙령이 주먹을 불끈 쥐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은 안 돼! 이렇게 도망만 다니다가는 지쳐 죽을 거야. 그전에 살길을 찾아야지.”
“아가씨! 그래도 그건 좀 무모해 보입니다. 분명 지금쯤이면 본궁에서도 뭔가 낌새를 알아챘을 겁니다. 이틀마다 보내던 전서구가 끊겼으니까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셔야 합니다.”
“본궁에서 전서구가 도착하지 않은 바로 다음날 구원대를 파견했다고 해도……, 아무리 빨라도 여기까지는 열흘이 넘게 걸려. 무엇보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육포가 다 떨어졌어. 아아, 배고파.”
“…….”
신신 파파는 할 말이 없어졌다. 물론 식량이야 사냥을 하면 된다. 이 둘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그건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 다니는 주제에 사냥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짓이다. 설사 몰래 사냥에 성공하더라도 문제다. 사냥감을 날 것으로 먹을 수는 없으니 불을 지펴야 하는데 그거야 말로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알리는 바보 같은 짓이다.
“더 이상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 전에, 최소한의 힘이 남아있을 때 싸워야 해. 그게 최선의 방법이야. 놈들은 우리가 계속 도망 다닐 거라 여기고 있을 테니까 방심한 틈을 노리는 거지. 호호호. 이 자식들. 나 소검후 빙령이 호락호락 당하진 않는다.”
“공격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씀이군요.”
신신 파파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모한 방법이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해볼 건 해 봐야 한다.
“그래, 신신 파파와 내가 힘을 합치면,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처음부터…… 이래야 했어. 적의 수가 많다고 우리가 너무 겁먹은 것이 실수였어. 흠, 생각하니까 더 열 받네. 우리가 사냥감이야? 점점 궁지로 몰아넣게. 이런 썩을 놈들 같으니라고!”
빙령은 분기에 찬 음성으로 말하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곳에 적이 있는 것처럼.
“아가씨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신신 파파의 표정도 결연해지며 용두선장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 어차피 한 번 사는 거, 까짓 거 죽어도 멋있게 죽어야지. 도망만 다니다가 죽으면 궁주님을 볼 면목도 없을 거야. 아무리 최악이라고 해도 죽기밖에 더하겠냐고? 신신 파파, 우리 최소한 본궁의 명예를 더럽히지는 말자. 응?”
빙령이 허리춤의 검파를 만지작거리며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빙령을 보는 신신 파파의 눈에 한순간 암울함이 스쳤다.
죽기밖에 더하겠냐고? 이 무슨 순진한 생각인가?
빙령 같은 미녀를 쉽게 죽일 남자는 단언컨대 천하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내가 남자라도…… 인질이 된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아아, 그리고…….
‘이,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에고 망측해라.’
신신 파파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빙령은 그런 신신 파파가 자신처럼 분노해서 전의에 불타는 것으로 착각하고는 앞으로 주먹을 내보이며 웃었다.
“아자!”
“예……. 아자.”
“아자! 아자! 아자!”
“예……. 아자, 아자, 아자.”
맞장구를 쳐주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빙령이기에 신신 파파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주먹을 흔들었다.
적어도 암울한 상황에 풀죽어 있는 것보다는 이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아마도 빙령의 속내도 사실은 비참함과 두려움에 빠져있지 않을까? 태어나 이런 위기는 처음일 테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신신 파파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일부러 자신의 사기를 진작시켜주기 위해 쾌활한 척 하는 것이 아닐까? 왈가닥으로만 치부하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은 깊은 것이 아닐까?
팔십을 넘은 자신을 위해 겨우 스물세 살 먹은 소궁주가 이런 배려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졌다.
지금 상황은 생사가 어찌 될지 모르는 불분명한 위기상황이다. 이럴 때에는 강호 경험이 많은 자신이 독려를 해도 모자를 판이거늘……. 과연 소검후란 별호가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 아닌가!
그릇이 달랐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아니 원래 여장부였으리라. 자신이 그동안 못 봤을 뿐.
“아, 아가씨. 저는 아가씨의 그 담대한…….”
“선두는 신신 파파가 서. 자신 있지? 혹시 모를 암기 조심하고.”
“…….”
“아자!”
“예……. 아자.”
신신 파파의 얼굴에 암담한 그늘이 드리웠다.
* * *
“무영 형님.”
“왜?”
“이 월화산(越華山) 주변으로는 인적이 드물다고 하지 않으셨소?”
오 척이 조금 넘는 단신에 커다란 머리를 가진 대두가 옆에서 걷고 있는 무영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둘은 무영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무덤에 갔다 하산을 하는 길이었다.
정오 무렵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인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던 그들의 모습은 다시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그랬지. 그런데 그건 왜 뜬금없이 묻는데?”
“이상한데요. 보이지는 않는데…… 무림인들이 산 도처에 있어요. 우리 같은 노골적인 살기가 아니라 아주 깊숙이 숨겨있는 살기들이라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분명 살기에요.”
“그래? 살기란 말이지. 으음, 계속 뭔가 찝찝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살기였군. 무림인이라…….”
무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무영이 대두에게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천부적인 살기 감지 능력이었다.
함께 악양에서 불곰파와 싸웠던 시절.
무영에게는 많은 위기가 있었다.
예를 들면 불곰파는 무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고용하거나 잘 다니는 길목에 수하들을 매복시키는 등 여러 차례 기습을 꾸몄다.
하지만 대두의 예민한 살기 파악 능력으로 인해 불곰파는 번번이 허탕만 쳤다.
그런 능력을 높이 산 무영은 대두를 무척이나 아꼈고, 대두 역시 자신보다 두 살 더 많은 무영을 친형처럼 따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를 노리는 놈들은 아니니까.”
“그걸 형님이 어떻게 알아요?”
대두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훗, 사월회는 나를 죽이자고 무림인 살수를 고용할 처지가 아니야. 불곰파와 생사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 천오백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
“그럴까요?”
“최소한 당분간은 확실하지. 사월회가 불곰파에 비해 막강했다고는 하나 이번 악양루 일로 인해 전력이 비슷해져 버렸어. 사월회는 수장뿐만 아니라 수뇌부의 칠 할을 잃은 상황.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내부에서 권력다툼까지 일고 있다는군.”
“아! 그래요? 역시 형님이요! 언제 그런 것까지 파악한 거요?”
대두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대두가 보기에 무영은 고향에 와서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무영은 하루에 꼭 한 번씩 태을리를 지나가는 상인들을 통해서 악양의 소문을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악양의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지금 사월회가 일시적으로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살모사가 여간내기가 아니잖아. 분명 그가 사월회주의 자리에 오르고 결국 불곰을 밀어낼 거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헉! 그, 그러면…….”
대두의 작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자 그의 검은 동자가 확연히 그 모습을…… 조금 드러냈다. 머리가 유달리 커서인지 작은 눈이 더더욱 작아 보이는 대두였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살모사 지부장님은 무서운 분입니다. 어서 이곳을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 그분은 형님의 고향인 이곳도 수색을 할 거예요. 암살자를 파견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 그 전에 이곳을 떠야…….”
“아니.”
무영이 대두의 말꼬리를 자르며 씩 웃었다.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차가운 미소.
무영의 그 냉소에 대두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무영의 저런 미소는 언제 보아도 기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은 늦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하고 서늘해졌다. 그런데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만약, 만약에 말이야. 살모사가 날 위협할 거라 생각했다면…… 난 그날 밤 그 자리에서 그를 죽였어. 내 팔다리를 하나씩 잃는다고 해도,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난 그를 죽였어.”
“……!”
“살모사는 아주 냉정한 인간이지. 그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를 적으로 만들지 않아. 그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거든. 자칫 나를 잘못 건드려서 내가 불곰파 쪽에 붙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악몽이 될 지 잘 아는 인간이니까.”
대두는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절대독종 고무영의 존재는 호남성의 뒷골목에선 신화나 다름없었다. 그런 고무영이 배신을 했기 때문에 사월회 하부 계층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을 터였다.
“지금의 나에겐 무식한 다른 지부장들보다 살모사가 필요해. 그래서 그를 살려둔 거지. 그는 신중하니까. 후후후. 살모사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건 불곰을 완전히 몰아내고, 사월회를 완벽하게 장악한 뒤나 될 거야. 살모사가 있으므로 해서 나는 시간을 버는 거지.”
“그렇군요.”
대두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씩 웃었다. 과연 자신이 모시는 형님이라는 생각에 괜히 흐뭇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두는 곧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시 말문을 뗐다.
“어쨌거나 언젠가는 이곳을 떠야 한다는 말이잖아요?”
“그래. 결국은 떠야지. 이곳은 아픈 추억이 너무 많아.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찾아봐야지.”
무영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들어 창공을 보았다. 세시진 전 내린 비로 인해 하늘은 지독하게 맑았다. 하지만 그런 맑음이 싫은 무영이었다.
세상은 더럽기 그지없건만, 자신만 깨끗함을 강조하는 것 같은 하늘을 부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형님! 그럼…… 그건 그거고, 이제 우리는 뭘 해 먹고 살죠? 수중에 있는 은자도 거의 떨어져 가는데.”
“그걸 생각 중이다. 요즘.”
“저도 생각해 봤는데 사냥꾼이 어떨까요? 형님이나 내가 잘하는 건 싸움질뿐이잖아요.”
“녀석아. 사냥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아직 은자가 약간 남아있으니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알았어요. 단, 무조건 형님하고 나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거로 하는 겁니다.”
대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에 차가운 무영의 표정에도 슬며시 미소가 피어났다.
“훗, 녀석. 내가 그렇게 좋으냐? 다른 이들은 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데…….”
“히히히. 다른 사람들이야 형님의 속마음을 모르니까 그러죠. 나는 다 알아요. 형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원…….”
무영은 기가 막혔다.
어쩌면, 예전에는 그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님을 눈앞에서 저승으로 보낸 이후로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무서워 질 때가 있는 무영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으니까.
“자자, 어서 내려가자. 산의 밤은 일찍 찾아오니까.”
무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쫓아라!”
“잡아!”
커다란 고함소리가 무영과 대두가 가고 있는 방향의 고개 뒤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곧 그들의 시야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십여 장 정도 떨어진 거리.
한 노파와 젊은 여인이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고, 그 뒤로 족히 오십은 넘어 보이는 흑의 복면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젠장.”
무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을 향해 질주해 오는 이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실력의 무림인들이었다.
땅을 박차고 달리는 속도가 자신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경지였으니까.
“혀, 형님!”
대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무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허리 뒤에 가지고 다니던 조그만 쌍도끼가 잡혀 있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무영은 이를 갈며 자신 쪽으로 달려오는 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두 여인을 쫓는 이들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 말은 정체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부류라는 뜻이다.
결론은?
이 장면을 목격한 대두와 자신도 살려두지 않을 공산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