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
낮은 소음과 함께 벽장이 벽의 한쪽으로 사라지며 커다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말대로구나. 하지만 조금은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으냐?.”
고개를 끄덕이며 팽문기는 자신의 품속에서 하얀 환약(丸藥) 하나를 꺼내 팽현수에게 내밀었다.
“젠장!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건가?”
마현은 혀를 차며 침상의 좌우를 오갔다. 일곱 혼천살영을 보낸 지 벌써 이각이 지나고 있었다.
지금껏 혼천살영들에게서 일각 이상 버틴 상대가 없었던 터였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기에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마현은 저도 모르게 손톱 끝을 이빨로 깨물었다. 기분 나쁜 이물감이 전신을 자극해왔다.
덜컹!
그때였다. 문이 활짝 열리고 피투성이의 소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옥의 악귀와도 같은 소년의 모습에 마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네놈은 뭐냐?”
소년은 아무런 대답 없이 한 걸음 다가왔다.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지독한 살기에 마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뿌득 이를 갈며 마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런 애송이에게 이 내가……. 설마 혼천살영들이 모두 당했단 말인가?’
마현은 놀람을 감추고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마현도 한 걸음 다가갔다.
“뭐냐고 물었다.”
절로 어깨가 떨릴 정도로 싸늘한 마현의 음성. 하지만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무심한 눈길로 마현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유령살막의 머리인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소년의 목소리. 마현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대가 소년이 아닌 노강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현은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꼴을 보아하니 혼천살영들을 모두 쓰러뜨렸나 보군. 하지만 그 몸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그리고 질문은 내가 먼저 했을 텐데……?”
“팽현수.”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어디선가 들어 본 듯 익숙한 이름이었다. 소년이 다시 한 걸음 다가오자 마현은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그 이름을 끄집어냈다.
“사가 계집이 말하던 팽가의 그 애송인가?”
“사가 계집? 사아란…… 을 말하는 건가?”
팽현수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흘러나오는 음성은 더욱 싸늘해져갔다.
마현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베어버릴 것 같은 살기를 느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글쎄……? 내가 대답해 줘야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묻겠다. 날 죽이라고 의뢰한 게 사아란인가?”
“이거야…… 원. 의뢰주에 대한 걸 묻다니. 날 업계에서 매장할 셈인! 큭!”
이죽거리며 대답하던 마현은 저도 모르게 신음성을 토해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으로 어느 샌가 달려든 팽현수의 도가 자신의 목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베고 지나갈 것 같은 날카로운 예기에 마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답하라.”
“큭! 대단한 실력이로군. 도무지 사가 계집이 말하던 그 애송이라고는 볼 수 없겠는걸. 그런데…… 이걸로 이겼다고 하고 싶은 거냐?”
싸늘한 마현의 음성. 동시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
팽현수가 들어온 것과 동시에 뽑아든 마현의 비수가 팽현수의 배에 닿아 있었다.
“훗! 비겼군.”
팽현수의 시선이 배에 닿은 비수에 닿자 마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팽현수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아니……. 네가 졌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현의 목에 닿은 도가 조금씩 깊이 들어왔다. 미약한 통증과 함께 피가 배어나왔다.
당황한 마현이 들고 있던 비수를 찔러 넣었다.
하지만.
팅!
미약한 금속성과 함께 비수가 밀려났다.
팽현수의 싸늘한 미소.
마현은 그대로 비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회심의 한수였지만 비수로 쇠를 뚫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마현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훗! 네 말대로군. 내가 졌다.”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다.”
“좋아……. 원하는 게 뭐라고 했지? 널 죽이라고 의뢰한 자의 이름?”
마현의 목을 파고들던 팽현수의 도가 멈춰 섰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팽현수를 향해 마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
마현의 대답에 팽현수는 확신했다.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한 것이 자신의 계모인 사아란인 것을.
핏줄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머니 아닌가. 평소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죽이려 할 줄이야.
예상은 했었지만 그저 아니기만을 바랬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실로 밝혀지자 분노가 아닌 허탈함이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동생, 팽현성을 가주로 만들어야만 했던 것인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묻고 싶었다.
그때였다. 마현의 음성이 귓가로 날아들었다.
“훗! 덤으로 하나 더 가르쳐 줄까? 어렸을 때부터 영약을 많이 복용했을 텐데 아무런 효과도 없지 않았던가?”
“……?”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팽현수는 말없이 마현을 바라보았다. 마현은 히죽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그것도 사가 계집이 우릴 통해 손을 쓴 것이지. 영약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독력으로 그것을 억눌러 두게 한 것이거든. 보아하니 지난번에 쓴 독 때문에 그것도 중화된 듯 하지만.”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가 마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현의 목에 닿은 팽현수의 도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기회다.
팽현수의 동요를 눈치 챈 마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통이 넓은 소매 속에 감춰둔 세침을 꺼내들기 위해서였다.
스륵!
살짝 손목을 흔들자 자연스럽게 세침 하나가 마현의 손에 떨어져 내렸다. 세침을 손에 든 채 마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도의 미세한 떨림이 멎었다. 고개를 들자 팽현수가 자신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경고 했을 텐데……. 쓸데없는 짓은 죽음을 부를 뿐.”
목에 닿은 도가 조금씩 다가왔다. 이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다간 헛되이 죽음에 이를 뿐이었다.
마현은 그대로 세침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빈틈이 전혀 없군, 그래. 관두도록 하지. 그런데 말야 이제 이건 좀 치우는 게 어때? 어차피 원하던 건 다 얻은 게 아닌가?”
하지만 팽현수는 도를 거두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마현의 목을 벨 듯 도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날이 마현의 목을 살짝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이, 이러지 말라고. 여기서 날 죽이면 유령살막의 남은 살수들 전체가 네 뒤를 쫓을 거야.”
“이곳에 있는 살수들이 전부 아닌가?”
“이런……. 이래 뵈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살막이라고. 여기 있는 인원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걸.”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마현의 얼굴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조금씩 마현의 목에 파고들던 도가 멈춰 섰다.
마현의 말대로다. 팽현수 자신이 알고 있는 유령살막의 규모는 일급 살수만 최소 이 백이 넘는 수였다.
자신이 상대한 살수들은 고작 오십 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마현을 만나기 직전 상대한 살수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급 살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거참, 말이 안 통하는구만. 이대로 그냥 돌아가 준다면 다시는 너와 관련된 의뢰는 맡지 않겠다. 이 정도면 어때?”
“…….”
팽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가? 이대로 날 죽였다간 평생 동안 살수들에게 암살의 위험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만 약속해라. 앞으로 다시는 팽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물론. 안 그래도 너와 관련된 일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냐. 팽가가 있는 하북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으마. 그럼 만족하겠나?”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팽현수는 경계의 눈빛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상대는 살수. 찰나의 순간이라도 방심을 하게 되면 자신이 당하고 만다.
“이런…… 살막의 소막주가 하는 말이다. 믿어도 되지 않겠나? 아니면 살막의 명예라도 걸어야 하나?”
“어디 한 번 걸어 보시지.”
팽현수의 말에 마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좋다. 내 살막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지금부터 팽가와 관련된 어떤 일도 관여하지 않겠다. 만약 이 약속을 어긴다면 살막의 명예는 물론 내가 소막주로서 쌓아온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정도면 됐나?”
마현의 말에 팽현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마현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봐…….”
“우선은 믿어 보도록 하지. 하지만…… 그 말을 반드시 시킨다는 신표 같은 것은 없나?”
나직한 팽현수의 목소리.
“쳇! 나이답지 않게 빈틈없는 성격이시로구만.”
마현은 저도 모르게 투덜대며 자신의 품속에서 작은 나무조각을 꺼내들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삼두사(三頭蛇)의 문양이 새겨진 나무였다.
팽현수가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자 마현이 입을 열었다.
“살막의 손님이라는 증표이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살막의 살수들에게 당할 일은 평생 없겠지.”
“어디 한 번 믿어 보도록 하지.”
짧은 대답과 동시에 마현의 목에서 도가 떨어졌다. 도를 회수한 팽현수는 그대로 돌아서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현은 그대로 돌아선 채 걸음을 옮기는 팽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매 속에 감춰 둔 세침을 모두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세침 네 자루.
그 뾰족한 끄트머리는 해약이 없는 치명적인 독을 발라두었다.
맨살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채 열 걸음을 가기 전에 죽음에 이를 정도의 엄청난 극독.
무슨 일이 있어도 팽현수를 살려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방심한 상태였다지만 팽현수의 기이한 신법에 너무도 쉽게 목을 내준 마현은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수 백 여 년의 역사를 가진 유령살막을 총괄하는 자. 모든 살수들의 정점에 선 자 아니던가.
살막의 손님이라는 증표를 주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자신 뿐. 죽인 후에 다시 회수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구겨진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마현은 저도 모르게 뿌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금세 마현은 감정을 조절했다.
살기를 품게 된 다면 놈이 눈치 챌지도 모른다.
마현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자연스럽게 주위의 어둠에 몸을 동화 시켰다. 분명 그 자리에 서 있음에도 마현의 존재감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주위와의 완벽한 동화. 마현의 존재감이 사라지며 마현의 몸은 그대로 어둠속에 녹아들었다.
이미 마현의 머릿속에는 팽현수와의 약속 따위는 지워진 지 오래. 오로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준 팽현수의 죽음만을 바라고 있었다.
마현은 조금의 자취도 남지 않게 은신법을 극한으로 운용하며 천천히 팽현수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삼십 보정도 떨어진 곳에서 팽현수의 등이 보였다.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세침을 던져 맞출 수 있는 거리였다.
마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천천히 세침을 들어 올렸다.
한없이 자연스러운 움직임. 숨을 쉬는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분명 팽현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현은 그대로 세침을 팽현수를 향해 던지려 했다.
순간.
“큭!”
엄청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러 왔다. 마현은 비틀거리며 손에 든 세침을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어느 샌가 팽현수는 마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 젠장……!”
마현은 저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신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현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때였다.
전형적인 강직한 무인의 인상을 가진 중년 사내가 마현의 압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은 상대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위가 느껴지는 중년 사내의 모습에 마현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큭! 아무래도 오늘은 재수가 옴 붙은 날인가 보군. 애송이 놈에게 어이없게 당하지 않나, 엄청난 고수를 만나지 않나……. 그래, 도대체 뉘시오?”
비밀 통로에서 나오는 팽현수의 뒷모습을 보며 팽문기는 짐짓 감탄했다.
‘상대의 내공을 폐할 정도로 망설임 없는 독심. 게다가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살막의 소막주마저 제압했단 말인가……. 무림초출이나 마찬가지인 아이가 어찌…….’
분명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유령살막의 살수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남음이 있었다.
아무리 살수라고는 하지만 절대적인 강함을 지닌 무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일.
하지만 저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기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너무도 노련한 움직임을 보이는 팽현수의 모습에 팽문기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새삼 팽현수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장난처럼 팽현수의 뒤를 따라오긴 했지만 원래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팽문기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소막주를 만나기 위해 몸을 이동시켰다.
그때였다.
팽현수의 뒤를 쫓는 검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