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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에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 시아에게는 휴대전화 볼 시간도 없이 바쁜 하루였다.
“그 얘기 들었어요? 그 배우 있잖아요, 누구더라.. 이름은 잘 모르겠고, 전에 그 어떤 드라마에 잠깐 나왔던 사람이라던데.. 아무튼 그 사람 오늘 자살했다나봐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하루, 유독 휴대전화 볼 시간도 없이 바쁜 하루였던 시아에게 우연히 들려온 동료교사의 이야기.
“아 진짜요? 어떡해..”
“나이도 어리던데.. 시아쌤이랑 몇 살 차이 안날걸요?”
“아 그래요? 에구.. 그런 사람이 오죽 힘들었으면..”
으레 ‘몇 년에 한 번 있는 연예인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저 바쁜 하루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시아였다.
“고생하셨어요- 내일 뵐게요-”
평소와 똑같이 인사를 하고, 평소와 똑같이 차를 몰고, 평소와 똑같이 집에 도착한 시아.
‘징-’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울리는 진동 소리.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고,
‘오빠한테 힘든 일이 생겼어..’
슬하로부터 온 짧은 한 문장의 메시지를 읽고 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시아의 눈에 들어온 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앉아 있는 이안이었다.
“오빠..?”
시아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드는 이안. 처음 이안을 만났을 때보다 더 흔들리는 눈빛, 슬하와 스캔들 기사가 났을 때보다 더욱 더 흔들리는 눈빛을 한 그가 시아의 앞에 있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천천히 이안의 앞에 마주 앉은 시아. 그런 시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이안.
“소리 내서 울어도 되요..”
시아의 이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모든 걸 쏟아내듯 소리 내어 우는 이안이었다. 시아는 그런 그를 말없이 토닥이며 위로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이안. 울 만큼 다 울었다 생각했는데 이안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정말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이안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시아. 쇼파에 이안을 앉히고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내밀었다. 시아가 내민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조금씩 진정이 되어 보이는 이안. 여전히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낮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사 내용, 슬하의 메시지, 그리고 이안의 모습. 그 모든 것에서 이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 것 같았던 시아는 그저 그의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길 기다려줄 뿐이었다.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시아에게 내미는 이안.
[항상 미안하고 고마웠던 내 친구 이안에게..
안녕, 이안아? 너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 난 아마 더 이상 너를 만날 수 없는 그곳으로 갔을거야.. 너.. 나 많이 미워했을 텐데.. 지금은 아마 더 미워하고 있겠지? 그래도 나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뿐이라.. 너한테만이라도 이렇게 편지 쓰고 싶었어.. 나 사실.. 너 많이 부러워하고.. 또 미워하기도 했다.. 같은 꿈을 꾸며 같이 꿈을 키웠는데 너는 저만큼 앞서 가 있고, 나는 아직 제자리 걸음이라 늘 부럽고, 늘 미웠었어.. 네 잘못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돌아보면 너랑 같이 연기 연습하고, 오디션도 준비했던 그 때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아마 나보다 너가 더 나를 미워하고 있겠지? 그래도 나 너무 미워하지마.. 그리고.. 나를 위로 하려했던 너의 마음.. 나 다 알고 있었고, 그 위로를 망설였던 너도 다 알고 있었어.. 전하지는 못했지만 그 위로가 나한테는 가장 큰 위로였어.. 고마웠어, 친구야.. 나에게 있지 못할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줘서.. 미안해서 얼굴 못 보고 가는 나.. 용서해줄거지? 그리고 연기자로써 꼭! 제일 높은 자리까지 올라줘! 강이안, 너라면 할 수 있을거야! 언제나 늘 파이팅이다, 강이안!]
이안이 내민 종이에는 그의 친구 현준이 남긴 편지가 있었고, 천천히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시아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자신까지 울어버리면 이안이 더 힘들거라 생각한 시아는 이안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고는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한 말투로 이안에게 이야기했다.
“친구, 이렇게 혼자 가게 놔둘 거예요? 어서 가서 친구 보내주고 와요- 미안해서 오빠 얼굴 못 보고 간다잖아요- 그럼 오빠가 더 용기 내서 얼굴 보여줘야죠- 자, 일어나요- 내가 바래다줄게요.”
아직도 고개를 숙인 채 울고만 있는 이안. 그의 얼굴 앞으로 시아의 손이 내밀어졌다. 손등으로 눈물을 한 번 훔쳐내고 난 다음, 시아의 손을 잡고 일어난 이안.
“고마워..”
시아를 품에 안으며 진심을 담은 한 마디를 전했다.
시아의 차를 타고 현준의 장례식장에 도착한 이안. 아직도 흐르는 눈물과 떨리는 손은 멈추질 않았다. 시아는 그런 이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씩씩하게! 보내주고 와요-”
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
“보내주고 올게, 씩씩하게-”
그리고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를 따라 시아도 힘겹지만 해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사에서만 접하던 ‘어떤 연예인의 이야기’ 그 현실을 마주한 시아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잘 보내주고 왔어. 씩씩하게-”
그 어느 때보다 편해 보이는 미소를 하고 시아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이안.
“잘했어요-”
시아는 이 한마디와 함께 조용히 이안을 안아주었다.
***
그 어느 때처럼 찾아온 평범한 주말, 시아와 지희는 평일에도 모자라 주말에도 만나 쇼핑을 하고, 맛집도 가고,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중이다. 그렇게 지희와 함께 있는 틈틈이 이안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아. 이안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또 답장을 보내는 시아의 입에는 계속 미소가 걸려있다.
“누구랑 그렇게 웃으면서 메시지를 주고 받는거야? 전에 그 선봤다던 차민우씨?”
“응? 누구..? 아- 그 사람? 아니야-”
지희의 물음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메시지에 집중하며 대답하는 시아.
“그럼? 누구야? 혹시.. 이안오빠?”
“응? 응-”
이번에도 지희의 말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메시지에 집중하며 대답하는 시아.
“너 요즘, 이안오빠랑 엄-청 잘 지내는 거 같다?”
“그래 보여?”
이번에도 지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하는 시아.
“너.. 그러다가.. 이안오빠랑 사귀는 거 아니야?”
순간적으로 핸드폰을 놓칠 뻔한 시아.
“그럴 리가- 에이- 그럴 리가 있냐- 오빠가 나 같은 사람이랑 어떻게..”
이번엔 메시지가 아닌 지희와 눈을 마주하는 시아. 그 눈빛이 조금은 떨리는 걸 지희는 느낄 수 있었다.
“너가 어때서-”
“내가 어떻긴- 평범하지- 지극히.. 아주 지극히 평범 그 자체-”
조금씩 떨리던 시아의 눈빛이 더욱 떨려오기 시작했다.
“너도 어디서 빠지는 얼굴은 아니다?”
“말이라도 고맙네요, 친구님- 그래도 그건 아닌거야-”
지희의 위로 아닌 위로의 말에 피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가는 시아.
“그런가..?”
“그렇지..”
“......”
“그런데 있잖아.. 가끔 그런 상상을 하기도 해.. 오빠랑 나랑 뭐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는? 다들 그런 상상 한 번쯤은 하잖아 좋아하는 연예인이랑 연인이 돼서 손잡고 데이트하는 그런 상상? 하지만.. 그건 항상 상상일 수 밖에 없는 거잖아.. 이만큼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여도 현실은.. 너무 멀어.. 설령 만난다 해도 있지..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계속 불편할지도 몰라..”
떨리는 눈빛이 체념으로 바뀌고, 시아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그 눈빛과 미소를 읽은 지희는 그 체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생각했다. 잠시 창밖을 보며 마음을 정리하는 듯한 시아. 지희는 그 정리의 시간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지희 또한 누군가의 팬으로 똑같은 상상을 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꼈었기 때문에..
***
그 날은 시아에게 있어 유독 ‘바쁜 하루’였다. 어린이집 내에서 맡고 있던 일을 구청에 보고해야 하는 일이 생겼었고, 그 일에 관해서는 원장보다 시아가 더 잘 알고 있어 시아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지희도 연차를 사용한 날이라 더욱 정신이 없었던 하루,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을 꼼꼼히 챙기기 위해 노력했던 시아였지만 결국 사건은 발생하고 말았다.
“박시아 선생님, 전화왔어요-”
교실에서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고 있던 중 시아를 찾는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은 시아는 다른 때보다 격양되어있는 정민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 혹시 점심에 정민이 약 먹이지 않으셨나요?”
평소 소아간질을 앓고 있던 정민은 점심식사 후 꼭 약을 먹어야 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발작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시아도 꼭 빠지지 않고 먹이고 있었다. 유달리 정신없었던 오늘, 정민이 약을 먹이지 않은거냐는 물음에 하루를 곱씹어보는 시아.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자신이 정민에게 약을 먹인 건지 먹이지 않은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독 그 기억만큼은 새하얀 백지같았다. 그렇게 시아가 한참동안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선생님!!! 정민이 가방에 약이 그대로 있었어요!! 정민이.. 약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선생님이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약을 안 먹이시면 어떡해요!!!!”
“...어머님..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만..”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하셔도 정민이 약만큼은 잊지 않으셨어야죠!!! 지금 정민이.. 병원에 왔어요!!! 저녁 먹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구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을 향해 울분을 토해내는 정민의 어머니.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연신 ‘죄송합니다’를 이야기하는 시아.
“내가 지금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고 전화했냐구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정민.. 이는.. 괜찮은..”
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린 정민의 어머니. 시아의 눈에서는 쉴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는 했지만 스스로가 용서가 되지 않는 시아였다.
“무슨 일이예요, 시아선생님?”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시아의 교실로 온 시아의 어린이집 원장.
“원장님.. 저 어떡해요.. 아니, 정민이 어떡해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제가.. 정민이 약을.. 안먹였어요..”
“정민이 약을..?”
“...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울고 있는 시아를 다독이는 원장. 누구보다 정민이를 아꼈고, ‘정민이’라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 대해 알아가려고 했던 그런 시아의 모습 덕에 그 어떤 학부모들보다 가까워 보인 시아와 정민의 부모였던 것을 원장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더욱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괜찮을 거예요..”
그런 시아에게 원장은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눈물 닦고, 나랑 같이 정민이 병원에 가봐요.”
원장과 함께 정민이 입원해있다는 병원을 찾아갔지만 정민의 부모는 그들을 만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정민도 정민의 부모도 만나지 못하고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원장은 집으로 돌아갈 힘조차 없어 보이는 시아를 어렵게 일으켜 집까지 바래다줬다.
집 앞에 도착해 원장의 차에서 내린 시아. 한 발짝도 떼기 어려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었다. 가방 안에서 진동소리가 나긴 했지만 그걸 받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너 왜 전화도 안받고..”
시아의 집 현관 앞에 서 있던 이안. ‘왜 전화를 받지 않는거냐’며 장난 섞인 말투로 쏘아붙이려 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시아의 모습에 그만 멈추고 말았다.
“너 왜,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지희의 사건이 있을 때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처음 마주한 시아의 모습에 이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그치듯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시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응? 응? 시아야-”
“...나 좀..”
“...응..?”
“...... 나 좀.. 그냥 놔둬 줘요..”
“...아니, 그래도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아야지.. 너.. 지금 너무..”
“...나 좀.. 그냥 놔둬 줘요.. 제발..”
“시아야..”
“그냥 좀 놔두라구요..!!!!!”
복도가 가득 울릴 만큼 소리지르듯 이야기하는 시아. 이안은 그런 시아가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제발..!!”
귀까지 막아버리는 시아.
“...시아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연예인 쫓아다니는 줄 알죠? 당신은 그냥 힘든 내 일상을 위해 내가 만든 탈출구일 뿐이에요! 일부일 뿐이지 절대 전부가 될 수 없다구요!! 내가 당신 팬이라고 늘 당신만 생각하는 줄 알아요? 나도 내 삶이 있고 내 일이 있어요! 그 일에서 인정받고 싶어요.. 내 삶에.. 그만큼 끼어들었으면 됐어요.. 그 이상 넘어서려고 하지마요!!”
눈물 섞인 목소리로 이안에게 쏟아부은 후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시아. 이안은 그런 시아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시아를 붙잡을 용기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이안.
“... 나는.. 나는.. ”
시아에게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 어느 때처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 날 그렇게 헤어진 후,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오가는 메시지도, 전화도 없었다. 정민의 사건은 다행히 정민이 깨어나면서 바로 시아부터 찾았고, 그런 정민을 위해 정민의 부모가 시아를 부르면서 다시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를 맞았다. 힘들고 어려웠던 일이 그럭저럭 잘 해결되었지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남아있었다. 자신의 힘든 감정 때문에 이안에게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렸다 생각한 시아는 사과를 위해 몇 번이고 이안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 모르겠다아..”
결국 며칠이 지나도록 이안에게 사과하지 못하는 시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