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카페 플루토의 공기가 제법 훈훈했다. 약 봉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청명이 구석진 자리를 찾아 의자를 끌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두꺼운 뿔테 안경에 부스스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니트 차림의 여자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청명은 떨떠름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다리를 꼬았다.
“로스코스모스에서 연락 안 오는 거 보면 아시잖아요. 저 데리고 가봐야 얻을 게 없습니다.”
“어차피 로스코스모스 말고 나사랑 협력하는 임무예요.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비행사 교육 받은 사람이 드물다는 거 알면서 그러세요. 그마저도 자식이 있어서, 배우자가 있어서, 하며 다 포기했어요. 그렇지만 약속드릴 수 있어요. 박사님이 걱정하시는 그 어떤 상황도 일어나지 않을 임무예요.”
“제가 뭘 걱정했는데요?”
“이를테면 뭐, 폭발 사고나, 돌아오면 백 년, 이백 년이 지나갔다거나, 하는 무서운 이론적 가능성….”
청명이 따뜻한 에스프레소를 빨대로 젓다가 한 모금 마셨다.
“한 십 년은 흐르겠죠.”
“그래서 저희가 박사님께 러브콜을 보낸 거죠.”
“아, 가족이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요, 하며 연구원이 곤란하게 어물거렸다. 이윽고 무언가 떠오른 듯 여자가 파일을 뒤적거렸다.
“박사님께서 종종 작성하신 논문 모두 읽었습니다. 우주의 형태에 대한 이론적 전개가 흥미롭더라구요. 이런 가설들은 지구나 국제우주정거장에선 입증할 수 없지만, 웜홀을 통과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어요. 특히 윤형 교수님과 박사님이 공동으로 연구하시던 주제들에 관해서도요.”
연구원은 머리를 고무줄로 단단히 묶고 논문 스크랩을 테이블에 펼쳤다. 시종일관 지친 얼굴이던 청명의 낯빛이 바뀐 것은 그때였다. 청명이 자세를 고쳐 앉고 한 논문을 집어 들었다. 청명이 국제우주정거장에 있던 때의 논문이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난생 처음 보는 수식들이 등장했다. 한동안 눈을 깜빡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청명은 몇 분이 지나서야 겨우 제1저자 박성태, 라고 영문으로 쓰인 글자를 손으로 매만졌다. 연구원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가실 거예요?”
청명이 겉옷을 챙겨 입으며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쿵쿵 요동치자 손가락 끝과 귀에서 맥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지구로 돌아와 처음 만난 성태의 흔적이었다. 언젠가 성태가 청명의 실수를 지적했던 순간이 눈앞에 영상처럼 떠올랐다. 그 무렵의 성태는 항상 학과 점퍼를 입고 다녔고, 걱정이란 없는 듯 싱글벙글 웃기만 했었다. 봄날의 눈부신 햇살이 갈색의 머리카락에 부딪혀 노을처럼 타던 그때의 성태를 사랑하게 된 것이야 말로 청명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을 것이다. 청명은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지구를 떠났고 성태를 밀어냈는지 모두 기억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태가 그리웠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든 이기적이게도 그 존재를 추억했다.
청명은 품에 안은 종잇장을 조심히 쓸어내며 생각했다. 내가 성태의 연구를 완성시킨다면 성태가 다시 나를 향해 웃어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이 세상의 형태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청명이 그만 무너져 내린 것처럼. 청명은 가설로서 존재하는 성태의 목소리를 소중히 붙들고서 대답했다.
“… 보고요.”
플루토를 나오자 윤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윤 교수는 요즘 몸은 좀 괜찮아졌냐는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물었다. 약은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 앞으로는 무엇을 할 건지 따위의 질문이었다. 청명은 조사라도 받는 양 번호를 조목조목 들어 응답했다.
“첫째,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둘째, 확정된 투약 기간은 없고요, 나아질 때까지 먹어야겠죠. 셋째, 모 기관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할까 싶네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넷째, 지금 당장 할 일은 없어요. 어디서 보시려고요?”
“호수 앞에 나와 있다. 제자랑 산책 중인데 너도 좀 걷지.”
호수의 수면 위로 드론 두 대가 나란히 날아갔다. 위잉, 잠자리의 날갯소리 같은 것이 기계음에 섞여 털털거리며 울렸다. 드론 동아리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났다. 아마 서로 조종 내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청명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일단 걸음을 옮겼다. 호수 변에 심어진 나무들이 모두 앙상했다.
“… 요즘도 제자 데려다 산책시키세요?”
“간만에 본 제자들만.”
“저도 포함이네요.”
저 너머로 어깨가 비스듬한 중년 남자가 보였다. 청명은 윤 교수를 단번에 알아보고 조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윤 교수의 얼굴이 한 번 활짝 폈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패딩에 파묻히다시피 한 땅딸막한 여자가 윤 교수의 곁에 종종걸음으로 붙어 섰다.
“이쪽은 예청명, 이번에 국제우주정거장 다녀왔다는 그 녀석이다. 청명아, 이쪽은 한정인. 네 연구실 후배인데, 아마 본 적 없지?”
“아마도요.”
정인이 겨울바람에 발갛게 익은 두 뺨을 장갑 낀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청명의 소개를 듣더니 얼굴이 환하게 편 것 같기도 했다. 청명은 약 봉지를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고 손을 먼저 내밀었다. 어차피 처음 보는 사이끼리 공들여 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인은 입매를 어색하게 바짝 당기며 인사를 건넸다. 하얀 벙어리장갑에는 손목 부분에 크리스마스 니트 같은 패턴이 들어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정인입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박사 과정 중이에요.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이게 우주를 다녀온 사람의 손이구나….”
청명은 정인에게 붙잡힌 손을 불편하게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빼냈다.
“네, 안녕하세요.”
“어디서 뵌 것 같다 싶었죠. 요즘 청명 씨에 관한 기사나 칼럼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봐요. 인터뷰도 봤어요.”
정인은 청명에 비해 지나치게 열정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침착한 면이 있었다. 격앙된 목소리가 꾸욱 눌러 담은 듯 잠잠해진 것은 물론 행동 역시 순식간에 잦아들면서 평정을 되찾는 것이 보였다. 피부 아래에서 기대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가도 눈빛은 불이 붙은 얼음 마냥 고요하게 탔다. 감정적인 듯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청명이 달갑잖은 얼굴로 정인을 응시했다. 진짜 학자들은 보통 저런 얼굴을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정인이 숨죽인 채 말을 이었다.
“좀 이따 메일 주소나 교환해요, 이것도 인연인데. 같은 전공 한 사람끼리 연락망 정도는 구축하자고요. 컨퍼런스에서 만나거나 하면 아는 척도 하고요.”
“그야 뭐.”
청명이 목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렸다. 호숫가로 오리 몇 마리가 파득거리며 헤엄쳐 갔다. 봄철, 학교 후문의 도로부터 호숫가에 이르기까지 벚꽃이 만개할 무렵에는 성태와 바람을 쐴 겸 늘 자전거를 타곤 했다. 춘분을 갓 지나가는 계절의 한가운데는 해가 충분히 길지 않아 초저녁마저 어둑어둑했다. 그렇게 해가 넘어가고 나면 찾아오는 봄밤은 계절이 무색하게 서늘했다. 노랗게 선명한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서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콧잔등이며 입술을 맞부딪칠 참이면 언제나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사이렌처럼 꽥, 하며 요란하게 내지르는 오리 울음. 그러고 나면 오리들은 호수에 일렁이는 가로등 불빛을 유유히 헤엄쳐 나갔다. 성태는 그럴 때마다 그저 별 말 없이 멋쩍어하며 김빠진 미소를 떠올렸었다.
“어딜 그렇게 보냐?”
윤 교수가 청명의 어깨에 팔을 털썩 얹으며 물었다. 청명은 황급히 옛 기억에서 빠져나와 얼이 빠진 듯 살짝 멍한 얼굴로 윤 교수를 돌아보았다. 청명이 미간을 구겼다가 날숨보다 한발 늦게 대답을 뱉었다.
“오리가…. 간만에 보니까 더 늘어난 것 같아서요.”
“많이 생기긴 했지. 개체수 유지는커녕 증식만 돕는 것 같아. 인도에선 도로에 소가 앉아도 치우질 못한다잖아, 여기서 오리들 취급이 딱 그래.”
“그래도 쟤들 나름 귀엽지 않아요, 저기 엄마 오리 뒤에 새끼들 따라다니는 거 보면 디즈니 만화가 따로 없던데요.”
어느새 핸드폰을 켠 정인은 저 먼 치에서 헤엄치는 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오리에 관해 줄곧 투덜대던 윤 교수조차 정인의 곁에 붙어 서서 브이 자를 그렸다. 청명은 걷던 걸음을 마저 옮겨 두 사람보다 한 여섯 걸음을 앞섰다. 하얗게 엉기는 숨 사이로 꽃 피던 벚나무들의 헐벗은 윤곽이 드러났다. 전선 위로 드물게 까치가 날았다. 봄이 아득히 멀다.
“저 가요.”
잠자코 서 있던 청명이 나지막하게 엄포를 놓자 그제야 두 사람이 펄쩍 놀라며 달려왔다. 아무래도 윤 교수는 밥 약속을 건 모양이었다. 교수님, 맛있는 거 사주신다면서요. 안 그래도 이 앞에 고깃집 가려고 했다. 더 맛있는 거 사주셔야죠, 그, 늘 가던 거기로 가시겠단 얘기 아니에요. 거기 맛집이야. 청명은 투닥대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다가 묘한 얼굴로 미소했다. 다른 데로 가요, 저 거기서 맥주 잘못 삼킨 기억이 있어서.
물론 윤 교수는 정인의 반발과 청명의 말에도 꿋꿋이 코웃음을 치며 행선지를 공고했다. 언제나 내 회식 자리는 그 집이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