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도 글리터 부자는 꾸준히 지니어스 백작저를 찾았다. 일이 주에 한 번씩 방문하곤 했는데, 그 공백기는 공작이 뼈 빠지게 일하고 황제의 친서를 획득하기 위한 틈이었다.
글리터들은 교모하게 엔토니가 백작저에 없을 때만 찾아왔다. 마법에 미친 엔토니가 마탑에 놀러갈 때 혹은 불려갈 때를 잘 살폈다. 때로는 엔토니를 부르라며 마탑에 은근슬쩍 연락을 넣기도 했다━글리터 공작이기에 가능한 청탁이었다━. 마탑의 입장에서는 마법천재 최강츤데레 깜찍이 막내와의 시간을 마다할 리 없었다. 하여, 마탑은 아닌 척 글리터 공작의 연락을 반기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엔토니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부들부들 분노에 떠는 사람은, 이번 챕터 최대 피해자 알버트 지니어스였다. 매번 황제의 실없는 명을 받고서 너무 어렵다며 징징대는 염병할 놈에게 어거지로 수학을 가르쳐야 하는 그는 무슨 죄란 말인가?
알버트는 글리터 부자가 그의 집에 넘나드는 게 싫었다. 보다 정확히는, 그들이 작고 소중한 딸내미를 넘보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안간힘을 써서 글리터 부자를 막아보려 시도해 봤지만, 공작보다 내가 더 일을 잘할 수 있다고 황제에게 어필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지니어스 백작저에서 공작에게 수학을 가르치라는 종이 쪼가리였다. 엠페라도르━현 모크니 황제의 이름━ 개자식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 젠장할. 이제 알버트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포기? 아니지, 알버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단지 실성하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황제의 친서고 뭐고 송두리째 찢어버리고, 고위 마법사를 고용해 글리터 부자를 세뇌해버려야겠다. 다시는 지니어스 백작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알버트 지니어스의 단단한 이성이 몇 개월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살벌한 와중에도 나랏일은 똑바로 처리하고 있으니, 역시 지니어스인 걸까?
때마침, 엔토니 지니어스가 알버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창 마법에 빠져 있던 엔토니는 글리터들이 자신이 없는 사이를 노려 지니어스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아실리를 끌어안고 노발대발하면서 절대 백작저를 벗어나지 않겠다 다짐했다.
마법의 성지인 마탑이 그를 불러도 결단코 응하지 않았다. 엔토니 지니어스 일생일대 극한의 인내였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글리터 마수들에게서 동생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는 마탑의 실험재료 충원이라는 거대한 유혹도 무릅쓰고 백작저를 장승처럼 지켰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글리터 부자가 방문한 날,
“아실리, 잘 있었어?”
“응! 에드워드도?”
“나야 항상 잘 있지. 저번에 얘기했던 모크니 건국사 논쟁에 관한 괜찮은 책도 찾았어.”
으득. 아실리와 에드워드가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걸 지켜보면서 엔토니가 이를 갈았다. 에드워드 이 자식이 감히 우리 아실리에게 꼬리를 쳐? 지니어스 백작저라는 경기장에서 좋은 책을 들먹이는 건 반칙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아실리라면 역사는 더더욱 반칙이었다! 엔토니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언제 둘이 이렇게나 가까워진 건지 어이가 없었다. 질투도, 화도 났다.
“하, 하하. 오늘은 내 친구도 있네?”
에드워드가 분노의 엔토니를 뒤늦게 발견하곤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여기에 네 친구가 어디 있니?”
엔토니가 부러 에드워드를 따라 하며 삐딱하게 웃었다. 투닥투닥하긴 했어도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에드워드는 이제 그에게서 소중한 여동생을 뺏어가려는 파렴치한으로 전락했다.
글리터와 지니어스는, 옥신각신하며 가볍게 다툰 적은 있어도 으르렁거리며 전쟁한 적은 없는 나름 절친한 사이였다. 케니스 글리터와 알버트 지니어스도, 에드워드 글리터와 엔토니 지니어스도 그러했다. 그런데 제 친구와 동생의 정겨운 모습을 보고━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엔토니가 없는 사이에’ 둘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꼭지가 돌아버린 엔토니 지니어스가 이윽고 전쟁을 선포했다. 에드워드 글리터까지 흔쾌히 선전포고를 받아들이며, 꼬마 글리터와 꼬마 지니어스는 대련장에서 맞붙었다.
엔토니와 에드워드의 대련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꼬맹이들은 평소 마법이 강하냐 검술이 강하냐를 두고 논박을 펼쳤다. 당연히 엔토니가 마법파, 에드워드가 검술파였다. 주로 공작저에서 만나 놀았던 꼬맹이들은, 그곳 대련장에서 마법과 검술의 승패를 가리기 위해 장난삼아 겨뤄보곤 했다. 지금까지의 누적 대련 결과로는 두 분야가 엇비슷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엔토니의 마음가짐이 천지 차이로 달랐다. 장난삼아? 아니, 엔토니는 진지했다. 아실리에게 힘내라며 응원받고 있는 저 자식을 날려버리지 않고서야 편히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엔토니는 아실리가 첫째로 그를 격려한 뒤에야 에드워드에게 옮겨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혹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냥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었거나.
마나는 주인의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많이 탔다. 엔토니는 무의식중 손끝에 모이려는 마나를 아실리가 볼 새라 급히 헤집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긴다.’
엔토니가 굳은 다짐을 되새기고 있을 제, 에드워드는 잔뜩 비장한 친구를 보고 피식 웃었다. 지극한 동생 사랑을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과했다. 그래, 인정한다. 엔토니가 없는 때만을 노려 그의 동생과 친해진 건 내가 생각해도 괘씸했다. 친구가 속상할 만도 했다. 그러나 엔토니가 있었다면 에드워드는 아실리에게 단 한마디도 붙여보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대련 같지만 명백히 엄숙한 분위기가 장내를 흘렀다. 에드워드는 진지한 엔토니와 기대 반 불안 반 아실리를 번갈아 보다가 목검을 고쳐 잡았다. 마나의 동요를 헤아려 감정을 곧잘 다스리는 엔토니가 잔뜩 흥분한 모습은 흔치 않아 조금 즐기려던 것뿐인데 심했나 싶었다. 그래도 기왕 대련까지 이르게 된 거, 아실리도 보고 있는데 무를 수는 없었다.
“너는 검을 쓰고, 나는 마법을 쓴다. 어떤 수든 상관없이 먼저 상대의 등을 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알겠냐?”
경기룰을 설명하는 것치곤 묘하게 시비조였다. 에드워드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시원하게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웃음에 빠직 인상을 찌푸리는 엔토니가 귀여웠다. 제 친구는 앙칼진 고양이 같은 매력이 있었다.
“시작!”
한 기사가 붉은 깃발을 곧게 위로 쳐들었다. 선빵 필승, 에드워드가 엔토니를 향해 달려가고, 엔토니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마법 주문을 외웠다. 목검이 강직하게 내려치는 궤적, 어슴푸레 빛나는 은빛 실드,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덩이들이 장내를 메웠다. 아실리는 감탄을 뱉으며 둘의 대련을 지켜봤다. 상대의 등만 터치하면 되는 간단한 승부였지만 누구도 먼저 등을 내보이지 않아 막상막하였다.
그러던 중 굉장히 낯익은 형태로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마나를 보지 못했을 적 아실리가 수도 없이 당했던 슬라이드 마법이었다. 마법에 걸린 이상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제발, 슬라이드!”
“젠장.”
허둥지둥 중심을 잡아보려 애쓰다가 결국 에드워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퍽! 엔토니가 틈을 놓치지 않고 에드워드의 등을 터치… 오, 후려쳤다. 등을 내려치는 손에는 약간의 강화마법이 걸려 있었다.
에드워드가 꼼짝없이 고부라져 쓰러지는 동시에,
“에, 엔토니 지니어스 승리!”
심판을 보던 기사가 대련의 끝을 알렸다. 그의 눈동자가 지니어스 도련님의 손과 글리터 공자의 등을 혼란스럽게 방황했다. 퍽, 아니 콰득이었나? 어떤 소리였든 어딘가 박살난 건 확실했다. 기사는 당장이라도 의원을 불러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하하, 내가 이겼네, 에-디?”
정당하게 승리가 판명된 건 맞지만 왜인지 비열한 악당이 대련장에 난입한 듯했다. 고뇌하는 기사도, 놀란 아실리도, 고통스러운 에드워드도 엔토니가 하하하 웃어대는 걸 멍하니 들었다. 승리를 만끽하는 호탕한 웃음이 문제인 걸까? 아니면 평상시 입에 담지도 않던 친구의 애칭을 정성껏 부름이 문제인 걸까? 화끈한 고통을 삼켜내며 에드워드는 애당초 글러먹은 친구의 인성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실리, 봤지? 이 오빠가 이겼━”
“괜찮아, 에드워드? 오라버니가 강화마법을 걸은 것 같은데… 뼈가 부러진 건 아니겠지? 혹시 모르니 의원에게 가보자.”
다급히 뛰어온 아실리가 끙끙대는 에드워드를 살폈다. 의기양양 오빠미를 뽐내려던 엔토니가 뒷전으로 밀렸다.
‘이긴 사람은 난데, 왜 쟤만 챙기는 거야!’
엔토니는 억울했다. 양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감정이었다. 등이 터지는 소리가 좀 컸어야지. 그 소리를 들었다면 누구든 승리자를 축하하기보다도 맞은 자를 걱정할 터였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엔토니는 억울했다. 그래도 과거 친했던 인연을 생각해서 강화마법을 약하게 시전했는데, 마음 약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윽, 괜찮아.”
에드워드가 몸을 일으키려다 이내 주저앉았다. 아실리가 걱정스럽게 그를 챙기면서, 엔토니에게 강화마법의 남용에 대하여 오목조목 질타했다.
‘내가 이겼는데. ……내가 이겼는데!’
그리고 충격받은 엔토니는 속으로 분을 삭이다 못해 터덜터덜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나 빼고 둘이 잘 놀라지 뭐. 삐친 와중에도 내심 에드워드가 신경 쓰이는지 뒤돌아 그의 기색을 살피는 듯하다가, 자존심이 상해 고개를 휙 돌려 나섰다. 나 빼고 둘이 잘 놀라지 뭐!
토라진 엔토니를 뒤로 하고, 대련장에는 쓰라린 아픔과 걱정의 기색, 그리고 모든 걸 능가하는 창피함이 자리 잡았다. 횡설수설 염려하는 아실리에게 에드워드는 고개를 숙이고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처음에는 아파서라지만 통증에 적응하고 나니 처량한 민망함만 남아 섰다.
“에드워드. 에드워드?”
“…….”
혹시 우나? 단단히 잘못 짚었지만 아실리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강화마법의 위력을 보고 들은 사람도 놀랐는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다가, 무한의 칭찬으로 고통을 상쇄하는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에드워드, 혹시 다음번에 검술 또 보여줄 수 있어? 오늘 에드워드가 검 쓰는 모습 정말 멋졌어!”
아실리가 들뜬 목소리를 흉내내며 텐션을 높였다. 허공을 가르는 검날이 빛나는 것 같았고, 대련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가 심금을 울렸으며, 엔토니의 마법을 피하는 현란한 움직임에 넉을 놓았다는 대단한 극찬이었다. 사람에 따라 우롱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 놀라운 언사였다. 참고로 에드워드는 대련 중 목검을 사용했고, 혼자 진지한 엔토니를 즐겼으며, 결국 마지막 마법을 피하지 못해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아실리는 과장된 칭찬을 못했다. 거짓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티가 나는 몰랑이였다.
그것마저도 그가 아는 누군가와 닮아서.
에드워드는 고개를 숙이고 아실리의 힘겨운 노력을 들으며 허하게 웃었다. 쪼끄마한 애가 가쁘게 말을 꾸미는 게 귀여웠고, 그 속에서 덧그려지는 기억이 그리웠고, 각인 같은 절망이 옥죄려는 게 기껍다가도, 다시 돌아와 삐질삐질 제 기분을 맞추려 고군분투하는 몰랑이가 귀여웠다. 제일 기막히고 한심한 감정은, 꾸며낸 말인 걸 알면서도 멋있다 하니 마냥 좋은 기분이었다.
‘미쳤구나, 에드워드 글리터…….’
민망함이 한껏 몰려와 침몰할 것 같아, 에드워드는 애써 아실리를 말렸다.
와중에 칭찬의 효과를 철썩같이 믿고 그다음 찬사를 늘어놓으려는 눈치 없음까지 꼭 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