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빠, 나 앞이 안 보여…….”
일순간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엔토니도, 마법사들도 딱딱하게 굳어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마법이, 실패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덜컥 무서워진 아실리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애처로운 두 팔이 불편한 공기를 내둘렀다.
엔토니가 벌벌 떨면서 조심스럽게 아실리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불안해하던 아실리의 얼굴에서 일말 안도가 스쳤다.
“다행이다.”
칠흑 같은 어둠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듯했다. 내가 익히 알던 세상이 더 이상 담기지 않는다는 건, 가벼운 언어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끔찍함이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엔토니가 조금 더 힘을 주어 아실리를 끌어안았고, 아실리는 제 옆에 누군가 있음에 안도했다.
지니어스 남매에게 모여든 시선이 파스쿠지를 향했다가, 마법사들 사이에서 다급히 나다녔다. 캐스팅 도중 실수가 있었나? 그럴 리가, 그랬으면 파스쿠지가 진작 얘기했겠지! 그럼……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우리 다 같이 확인해봤잖아, 완벽했다고! 완벽하지 않았나 보지! 파스쿠지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소리쳤다. 격양된 소리에 아실리가 흠칫 놀라는 걸 보고,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파스쿠지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우선, 하……. 정말 앞이 보이지 않니? 아무것도? 오, 너를 의심하는 건 아니야. 흐릿하게라도 보이지는 않는지, 상태를 확인해야 해서 그래.”
아실리의 상태를 묻고 나서야 파스쿠지는 무슨 말보다 사과가 앞서서야 했음을 인지했다. 충격에 잠깐 집을 나간 인간다움이 뒤늦게 돌아온 것이다.
“이럴 수가,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아실리. 진심으로 사죄할게.”
빈말로도 사과를 받아줄 기분이 나질 않아서, 아실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엔토니가 악을 지르듯 소리쳤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마탑의 마법사들 모두가 함께 검토한 이론이라 할지언정, 혹시 모를 변수를 염두에 두고 주의해야 했다. 아실리가 괜찮다니까, 하고 안일하게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새로운 마법의 작용이 저도 궁금했던지라, 일순 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분명 끝까지 반대해야 함을 알면서도 어정쩡하게 넘어갔지. 그러니까, 이건 결국 모두 내 탓이었다.
애초에 아실리를 마법의 탑에 데려오지 않았어야 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너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어서 경솔하게 일을 저질렀다. 부모님이 부득불 반대할 때 한 번 더 생각해볼걸. 어여쁜 동생에게만은 늘 멋진 오빠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멋있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에 취한 결과가 어떠한가? 너무 모자란 사람이었다, 나는. 다 제 잘못이었다.
“아실리, 아실리, 미안해.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이론적으로 완벽해서……” 엔토니가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그래, 애초에 이론적으로‘만’ 완벽한 마법이었어. 내가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 아니야. 처음부터 마탑에 오는 게 아니었어.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아무리 지니어스의 아이들이 성숙하다 하여도, 엔토니 지니어스가 세계적으로 칭송받는 마탑의 마법사라 하여도 겨우 여덟이 된 어린아이였다. 너무나 밝고 선명한 총명함 탓에 응당 지니는 미숙함이 흐리게 감춰져 있을 뿐이다. 결국 엔토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몇몇 마법사들이 달려와 그를 어르려 했지만, 엔토니는 그들을 거세게 뿌리치고 아실리의 손만 미련하게 잡고 울었다.
듣는 사람이 서럽도록 흐느끼는 소리에 아실리가 급히 그를 달랬다. 자신은 전생의 기억을 통틀어 수십 년을 살았다지만 엔토니는 정말 평범한 ‘아이’였다. 매일 오빠, 오빠, 하고 부르다 보니 그가 성숙한 어른일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다. 정작 어른도 하염없이 미성숙한데 말이다.
아실리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매일같이 보고 자라온 세상을 앞으로 느끼지 못할 거라는 선고는 자체로 지나친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아직 선고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무려 대륙을 통틀어 스물밖에 없다는 마탑의 마법사였다. 그들도 사람이니 실수를 할 수 있었다. 그게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시력 유실의 부작용이겠지. 하지만 그들이 이만한 실수를 만회하지 못할 거라 판단되지 않았다.
사고 회로가 긍정적으로 흘러가자 진짜로 안정되는 듯했다. 완전하진 않아도 시름이 다소 놓였다. 문제는 엔토니였다. 그는 동생이 시력을 잃었다는 데에 끔찍한 죄책감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엔토니는 항상 동생을 생각하고 아껴주는 훌륭한 오빠였고, 그가 자책을 멈추고 그것을 깨달았으면 했다.
“오빠, 나는 괜찮아. 그리고 오빠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지 마. 나는 오빠와 마탑에 구경와서 정말 좋았는걸. 신기한 경험도 하고━”
“대체 뭐가 괜찮아! 신기한 경험? 앞이 보이지 않는 게 어디에서도 하지 못할 귀한 경험이긴 하지! 다들 왜 말이 없어? 마법의 부작용으로 말을 잃기라도 한 거야?”
“오빠!”
“누구는 시력을 잃고 누구는 말을 잃고, 참 재밌는 상황이━”
“엔토니 지니어스!”
동생의 서러운 외침이 오빠의 아우성을 멈추었다. 자기가 과하게 빈정거렸다는 것을, 이것이 아실리에게도 상처가 되었을 거란 사실을 의식한 엔토니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숨을 골랐다. 아실리가 그를 끌어안아 토닥이면서 그의 울음을 함께 삼켜주었다. 패닉에 빠져 있던 마법사들도 하나둘 가까이 모여들어 남매를 안심시켰다.
“정말로 미안해. 너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믿음직스럽지 않겠지만, 약속할게, 분명 다시 시력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할게.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 만에 하나 방법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눈을 뽑아서 줄,” 상황 파악 못하는 마법사 한놈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포박 마법에 묶여 내동댕이쳐졌다. 파스쿠지가 겸연쩍게 대신 사과했다.
“아실리, 내 말 들리니? 나는 음, 파스쿠지야.”
“네, 파스쿠지. 잘 들려요.”
“백 번 천 번 사죄해도 모자라겠지만…… 미안해, 아실리.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맹세할게.”
“참고로, 마법사의 맹세는 영속적이란다.”
아만다가 부러 유쾌하게 말을 붙였다. 아실리도 짐짓 명랑하게 꾸며내며 믿겠다고 했다. 조금은 제정신을 찾은 엔토니만이 믿긴 뭘 믿어, 하고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뒤이어 마법사들이 돌아가며 거듭 사과하는 통에 오히려 정신이 사나워진 아실리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모두 이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런……. 괜히 우리 때문에 괜찮다고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
“맞아, 일부러 괜찮다고 꾸며내지 않아도 돼. 오히려 마구 욕을 하고 때려도 괜찮아.”
애한테 폭력을 권하다니.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으나 과했다. 지금이야 앞이 안 보인다지만 시력을 곧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괜찮았다. 혹시 모를 불안감은 현재 형편에 불가결이었지만, 그것만 빼면 진심으로 괜찮았을뿐더러 손가락질하며 악담을 퍼부을 기분도 아니었다. 그런데 다들 내가 너무 착해서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고 넘겨짚으니. 조금 피곤했다. 이들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어…… 사실 걱정되긴 하는데 음, 괜찮아요! 빈말이 아니라, 아! 오빠의 또 다른 가족을 믿으니까요. 마탑의 마법사 분들이잖아요.”
정확히는 마탑의 명성과 성가를, 즉 이름값을 믿는 거지만 그걸 고상하게 바꿔말하면 윗말이었다.
모질게 욕설을 퍼부어도 모자랄 판에 믿음을 보여준 아실리에 모두가 감격하며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아실리는 엔토니의 엄호를 받으며 한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엔토니는 여전히 화가 잔뜩 오른 상태였다. 소중한 동생이 맹인이 될 위기에 처했으니 응당했다. 그러나 아실리가 어르듯 말해주었던 대로, 시력을 가망 없이 잃었다고 확실시하지 않고 아주 잠깐 그녀의 시야가 캄캄해진 것이라 생각하려 애썼다. 그도 간절히, 그의 또 다른 가족을 믿고 있었다. 믿고 싶었다.
마법사들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토론과 실험을 반복할 때, 엔토니는 아실리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쉬지 않고 그녀를 웃겨 주었다. 아실리도 정확히 엔토니와 같은 생각으로 그가 초조해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이끌어갔으니, 과연 우애 좋은 남매다웠다.
본래 엔토니도 동료들과 함께 대책을 고안하려 했다. 한시라도 빨리 동생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작은 온기가 그를 막았다. 아실리는 계속 괜찮다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이렇듯 불안감이 나직하게 드러났다. 엔토니는 울 듯이 얼굴을 찡그리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가다듬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오, 마법사들의 대책 회의는 나름대로 순항을 타고 있었다. 마법의 부작용이 발생한 까닭은 다름 아닌 대상자의 어린 나이였다. 다시 말해, 아실 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한창 크는 중인 아이에게, 심지어 예민한 신체 부위인 눈에 마법을 걸었으니 몸이 놀란 것이다.
“몸이 깜짝 놀란 것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긴 할 텐데…….”
“언제 돌아올지 어떻게 알고?”
“그러니까 그게 문제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네. 몸이 적응하는 시간을 앞당기는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신경 안정제 없냐? 어떤 마법사가 지나가듯 던진 물음에 고뇌하던 파스쿠지가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경악하며 또는 경탄하며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느냐 흥겹게 면박 주었다.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가 졸지에 구박받은 마법사는 말해도 뭐라 하냐며 꿍얼거리다가 파스쿠지에게 진득한 포옹을 공격받았다.
“아, 신경 안정제 없는데? 저번에 다 썼나 보다. 새로 만들까?”
“당연한 걸 왜 물어. 음, 이 정도 인력이면 15분?”
“충분히 가능하지.”
신경 안정제는 결코 손바닥 뒤집듯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약물이 아니었다. 변수의 작용이 무궁무진해 실패의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눈 부릅뜨고 열다섯 시간을 꼬박 부어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약물을 너끈하다 매기는 태도가 멋졌다. 또는 재수 없었다.
어쨌건 문제의 실타래를 따라 마법사들은 신경 안정제 제작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십 분가량 흘렀을 때, 무척 북적거리는 마법사 무리가 지니어스 남매에게로 다가왔다. 너만 아니었으면 제때 만들 수 있었네, 내가 아니라 누구누구씨 탓이네, ……. 온통 책임 전가로 분잡했다.
부작용의 원인이나 신경 안정제의 기대 효과 등을 설명한 뒤 파스쿠지가 아실리에게 신경 안정제를 건넸다. 아실리가 한입에 약물을 꿀꺽 삼키고, 곧바로 엔토니가 초콜릿을 대령했다. 안정제를 마셨다고 즉시 효과가 나타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엔토니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올망졸망 모여서 반응을 기다렸다.
“오빠.”
“응? 왜, 아실리?”
“나 초콜릿 하나만 더 주면 안 돼?”
“…….”
“오빠?”
응답 없는 엔토니를, 아실리가 의아해하며 다시금 불렀다. 어? 어, 알겠어. 애써 대답하는 목소리에 언뜻 물기가 서렸다. 언제나 내 눈을 곧게 마주쳐주던 아실리였는데. 그에게서 조금은 빗겨나 허공을 배회하는 눈동자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없었다. 초콜릿 포장지 소리가 유독 크게 바스락거렸다.
기다리다 제풀에 지친 마법사들이 하나둘 다른 방법을 찾으려 자리를 뜨고, 아실리와 엔토니는 또다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둘의 남동생, 아서 지니어스에 관한 일화였다. 아서가 수개월 아기일 적 사흘 내리 울다가 기어이 황궁마법사━블루투스 백작━을 통해 『언어의 본질』을 얻어낸 사건을 별별 칭찬으로 풀어내던 중, 아실리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아실리? ……괜찮아?”
엔토니가 불안감, 미약한 기대감이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아실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엔토니의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언가, 흐릿한 빛이 아른거렸다. 착각인가 싶다가도 빛을 좇으려 집중했다. 빛이란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을 그려주는 존재였는데, 그것을 간절하게 쫓아가고 있다는 게 서글펐다. 희미하게 너울거리는 빛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면서도, 눈을 힘껏 감았다가 더디게 떴다. 여전히 흐린 듯하지만 어쩌면 선명한 등불이 보였다. 눈을 감았다 뜨는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모든 게 점차 밝아졌다. 거의 다, 거의 다 보였다.
“아실리, 무슨 일이야. 걱정돼. 아무 말이라도 해줘.”
그리고 마침내, 아실리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오빠를 볼 수 있었다. 아실리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엔토니를 끌어안았다. 아, 아실리?
“오빠, 나 보여!”
엔토니가 어정쩡하게 팔을 들어 올리곤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실리가 기쁨에 겨워 품 안에서 도리도리 머리를 비볐다. 아실리의 목소리를 듣고 마법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그제야 엔토니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동생을 마주 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고마워, 아실리.”
아실리가 엔토니를 툭 치며 고맙긴 뭘 고맙냐며 귀엽게 타박할 때, 마법사 일동이 그녀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두세 시간 동안 영영 앞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한 것은, 겨우 실수라고 경솔하게 일컬을 수 없는 잘못이다. 결과적으로는 좋게 해결되었다지만 이 일이 어린 아실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을까 걱정스러웠다.
아실리가, 심지어 엔토니도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 얼떨떨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마법사, 특히 마탑의 사람들은 자부심이 하늘을 찔러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경우가 드물다 못해 전무했다. 당초 사과도 똑바로 안 했다. 그런 군상이 허리를 굽히고 정성껏 사과하다니.
“이제 잘 보이니까 괜찮아요!”
“어떻게……. 고마워. 고마워, 정말. 그런 안 좋은 경험하게 해서 미안해.”
“아이, 이제 사과는 그만!”
문제없이(?) 마무리되었겠다, 지금껏 안절부절못하며 수없이 사과를 건넸던 이들한테 더 이상 면박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뒤끝 있는 사람도 아니었을 뿐더러━시력을 잃을 위험에 처했던 자는 더 화내어도 정당했다! 아실리는 스스로에게 박한 기질이 있었다, 아마도.━ 오히려 괜찮다고 말하는 게 그들에게 마음의 짐을 얹히는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빚 지우기였다. 아실리는 뒤끝이 없었지만 모든 걸 다 포용하고 사랑하는 성자는 아니었다. 무려 마탑의 마법사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덧붙여, 오색빛깔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감도는 세상을 살아본다는 건 도저히 무르고 싶지 않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법은 성공이에요! 축하해요, 파스쿠지.”
“응?”
아실리의 넓은 아량에 감격스러워하던 파스쿠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실리는 마치 60초 뒤를 암시하고 이어지는 광고처럼 잔뜩 뜸을 들이다가, 엔토니의 보챔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분들 마나가 다 보여요.”
“보여?!”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서 신체가 마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패한 줄 알았는데…….”
오, 역시 어딜 가나 설명하길 좋아하는 이들은 꼭 있었다. 입에 시동을 거는 못난이는 적당히 무시하고, 제각기 아실리의 무사와 마법의 성공을 누렸다. 와중 배가된 경사로 잔뜩 들뜬 엔토니는 아실리에게 제 마나의 묘사를 보챘다. 우와, 아실리! 내 마나는 어때?
아실리는 엔토니부터 시작해 마법사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제게 보이는 모양들을 묘사했다. 엔토니 오빠는 별빛처럼 반짝거리는 은색 실타래 같고, 파스쿠지의 마나는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 같고, 음, 아만다는 왠지 불길이 사납게 저를 잡아먹을 것 같아요.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 마나의 빛깔이 각자의 머리 색과 비슷했다. 마나가 주변을 감싸며 일렁이는 모양은 꼭 당사자의 성격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엔토니의 긍정을 시작으로 기쁨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군데군데 작지만 화려한 불꽃들이 터졌다. 어느 쪽에서는 의문의 물보라가 잠시 일기도 했다. 마법의 탑다운 호화스러운 세리머니에 아실리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모두! 덕분에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마법사들이 보는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군요!”
“아니야, 아니야. 내가 훨씬 더 고맙지. 고맙고, 고맙고, 미안해. 부작용 없다고 장담했으면서 무섭게 만들어서 미━ 억!”
엔토니의 발차기에 파스쿠지가 다리를 부여잡았다. 이제 사과는 됐다며 심술부리는 엔토니가 귀엽기보다는 무척이나 괘씸했다. 이 쪼꼬만 게! 멍이 들 게 분명한 정강이가 알싸했다. 정강이를 움켜쥔 파스쿠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린 고통 탓인지, 그간의 불안감 탓인지, 혹은 극심한 안도 탓일지도 몰랐다.
“엔토니, 이 자식…… 오늘만 봐준다.” 그의 죄가 큰바, 파스쿠지는 변변치 못하게 꿍얼거렸다.
마법사들의 사과와 감사를 오조 오억 번 정도 더 받은 후에야, 아실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마법사들의 아우성이 며칠이 지나도 귓가에 아른거렸다. 빚을 지우면 나중에 요긴하겠다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나 격한 반응은 생각지 못했는데. 적당히 화를 냈어야 했나?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지니어스 남매의 마탑 방문기가 끝났다.
아니, 끝난 줄 알았다. 일시적인 마법인 줄 알았던 ‘피핑 아웃peeping out’━최종적인 보완 후에 파스쿠지가 골몰히 붙인 마법의 명칭이었다. 듣기론 고고학자들에게까지 부탁했다던데. 고대어는 왠지 모르겠지만 멋있어 보이기 때문에 마법의 명명은 고대어로 하는 게 요즘 트렌드였다.━이 하루, 이틀을 넘어 일주일, 거의 한 달이 지나서도 지속되며 문제가 발생했다.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지니어스 남매는 또다시 몰래 마법의 탑에 찾아갔다. 골자는 아실리 신체의 뛰어난 적응력이었는데, 한창 자랄 시기인 몸과 새로운 마법이 완전히 융합하여 적응한 것이다. 파스쿠지는 지니어스면 신체의 동화 능력도 지니어스하냐며 별 같잖은 개그를 선보이다 아만다에게 맞았다.
엔토니는 이 신기로운 적응이 동생에게 해를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지만, 아실리는 아주아주 만족해했다. 그녀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나를 볼 수 있었다! 이런 걸 세간에서는 사기캐라고 불렀고, 그녀의 기분은 개이득이었다.
더하여, 아실리는 더 이상 엔토니의 슬라이드 마법에 당하지 않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어떤 종류이든 마법의 실현 과정에서는 마나가 요동치기 마련이니, 눈치채고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반대로 엔토니는 무척 슬퍼했다. 아실리와 마탑에 방문한 이래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 지니어스 부부는 호락호락한 부모가 아닌지라, 결국 마탑의 방문 사실이 발각되어 지니어스 꼬맹이들은 호되게 혼이 났다. 이번에 다녀온 것만이 아니라 저번 것도, 아실리가 마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어쩌다 보니 그 과정에서 있던 일 전부. 현 재상 알버트 지니어스와 전직 외교 사절 다이애나 지니어스가 합심한 앞에서는 모든 거짓말이 우스워졌다. 이를 진작 깨달은 아실리는 순순히 취조에 응했지만,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엔토니는 곱절로 야단맞았다.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린 뒤 둘은 근신 처분을 받고, 심지어 엔토니는 마탑 방문 금지는 물론 아끼는 마법 서책들을 모조리 빼앗겼다. 펄펄 날뛰며 반발할 줄 알았던 엔토니는 의외로 깨끗이 순응했다. 오히려 알버트가 아들의 조용함에 당황하다가, 엔토니가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분을 거두었다. 단단히 이르고 알맞게 타이르는 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