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돌잔치를 치른 지도 벌써 한 달. 아실리는 이제 안정적으로 걸을 수도, 펜으로 무언가를 적을 수도 있는 13개월 차 아기였다.
삐끗. 움켜잡았던 펜이 멋대로 빠져나가 바닥을 그었다. 정정한다. 아실리는 펜을 잡고 휘두를 수 있는 멋진 아기였다. 아실리는 뭐라도 써보고 싶었지만 그릴 수 있는 건 가로줄뿐이었다.
“아실리, 엄마랑―”
“오빠 왔다!”
오, 엔토니, 뛰지 말렴, 넘어질라. 네! 빨리 걸어 들어가는 엔토니를 보며 다이애나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는 아실리의 방에 들어서며 ‘오빠 왔다!’라고 말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그 뒤 아실리가 환하게 반겨주면, 사랑스런 동생의 든든한 오빠라는 사실이 확인받는 것 같아 기뻤다. 오늘도 어김없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아실리를 엔토니가 꼬옥 안았다. 신기할 정도로 작고 놀라운 정도로 소중한 존재였다. 가족, 특히 아껴주고 지켜주어야 할 동생이었다. 하루빨리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야 할 제일 이유이기도 했다.
지니어스 모자의 도움에 힘입어, 한참 아실리의 글씨 연습에 시간을 쏟았다. 다이애나는 일취월장하는 딸아이의 그림 실력에 칭찬을 연발했지만 아실리는 지나치게 띄어 준다고 여겨 겸연쩍어했고, 엔토니는 저얼대 그런 게 아니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연습 중, 다이애나가 모크니 제국어로 아실리의 이름을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Эшлі. 엔토니도 지지 않고 다이애나의 필체 곁에 아실리의 이름을 남겼다. 놀랍게도 엔토니는 자신의 이름보다 아실리의 것을 유려하게 잘 썼다.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설렘에 못 이겨 닳도록 아실리의 이름을 쓰곤 했던 나날이 빚어낸 유려함이었다.
*
“으!”
아실리가 포크질을 잠시 멈추고 토마토를 흘겼다. 아기는 식기 사용도 꾸준히 신경 써야 했다! 어제 간식으로 나온 망고는 잘 찍히더니 요놈의 토마토는 자꾸만 이리저리 도망갔다. 가까스로 찍은 몇몇도 포크가 얕게 들어갔는지 곧잘 빠져나왔다.
아, 토마토여……. 심지어 유모는 다른 사람의 부름으로 잠시 나간 탓에 이곳에는 아실리와 엔토니뿐이었다. 그리고 엔토니는 아까부터 아실리가 헛포크질을 할 때마다 아닌 척 입꼬리를 부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엔토니는 문득 깨달았다. 아실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거뜬하게 도와주는 오빠? 제일로 근사했다.
“아실리, 오빠가 도와줄까?” 큼큼. 멋든 헛기침을 뱉으며 엔토니가 넌지시 물었다.
“어떠케?”
“아실리는 힘이 약해서 포크로 집기가 어렵잖아. 그런데 손에 강화마법을 걸면 힘이 세질 거야!”
강화마법을? 마법은 상당히 까다로운 학문이었다. 아무리 좋아하고 열심히 공부했다지만 시전마저도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을 요한다는 걸,
“강화마법은 별로 어렵지 않아서 괜찮아, 기본적인 거거든.”
이렇게 쉽게 말한다. 나아가 들떠서 강화마법에 대하여 설명하려는 엔토니를 급히 막고, 일부러 크게 그를 칭찬했다. 표정이 밝아진 엔토니가 공식을 상기하는 듯 잠깐 골똘하더니 휴우, 심호흡했다. 막상 아실리에게 마법을 시전하려 하니 긴장됐다.
“아실리, 할게.”
“웅!”
아실리가 엔토니에게로 양손을 내밀었다. 아, 잠시만. 엔토니가 시험 차 자신의 손에 강화마법을 작용해보고 숟가락이 가뿐히 휘어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심한 듯 웃었다.
“Палічыце, палічыце!”
끝인가? 블루투스 백작인가, 예전에 황실마법사를 보았을 때는 재빠르게 주문이 지나가 도리어 현실감이 덜했는데, 오빠가 제게 직접 마법을 써주니 묘하게 생경했다. 새삼 전생과 이곳이 명백히 다르다는 게 인식됐다.
“네가 힘이 많이 약하니까 일부러 강하게 걸었어. 한 번 먹어봐!”
이전과의 차이점이 별달리 느껴지진 않았지만 신기했다. 아실리가 엔토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포크를 집어 토마토를 찍었다. 쨍━!
“…….”
“…….”
포크가 토마토를 넘어 접시까지 찍어버렸다는 게 패착이었다. 분명 어린이용으로 특별 제작된 강화 접시라고 들었는데 어린이의 포크질로 가볍게 깨지다니, 이건 제작사 잘못이었다. 헛똑똑이 지니어스 남매들이 아연하게 혹은 얼떨떨하게 접시를 가만 보다, 엔토니가 우선 아실리를 멀리 두고 잔해를 정리했다.
“너는 가만히 있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치울게. 혹시 접시가 깨지면서 조각이 튀진 않았지?”
“웅, 안 다쳐써.”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야. 내가 음, 네 힘이 그렇게 셀 줄은 몰랐네.” 엔토니가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면서 아실리의 마법을 풀어주었다. “조금 강하게 적용한다는 게 무리했나 봐. 놀라게 해서 미안해. 금방 치울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어디선가 작은 바구니를 꺼내와 부양 마법을 이용해 깨진 조각들을 옮겼다. 그리고 다소 불안정한 청결 마법을 통해 테이블의 뚜렷한 얼룩들만 우선 지웠다.━아실리는 다섯 살 오빠의 능숙한 생활마법 사용에 감탄했다━.
“이거 유모나 다른 시종들에게 말하고 올게. 심심해도 잠시만 기다려줘, 금방 올게!”
속히 나서는 엔토니와 침대 옆의 설렁줄을 번갈아 보며 아실리가 생각했다. 처음부터 시종을 불러 부탁했으면 되지 않나? 아무리 마법을 썼다지만 위험한 유리 조각을 손수 정리한 게 의아했다.
아실리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 사이, 다른 이에게 말하고 온다던 엔토니는 세밀히 복도를 살피며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시종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자 잽싸게 코너를 돌아 몸을 숨겼다. 아무도 모르게 사건을 은폐할 속셈이었다.
“휴우……. 아, 정말. 우리 아실리는 똑똑하고 멋있는 걸로 모자라 힘도 세고 말이야. 내 동생이지만 대단하다니까?”
엔토니가 아실리에게 적절한 강화마법 공식을 머릿속으로 수정해가며 정원으로 향했다. 우선 수풀 속에 숨겨두고 아실리랑 놀고 난 뒤에 몰래 땅에 묻어야겠다. 아니다, 기왕에 소멸마법을 시도해봐? 너무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이미 몰래 덮은 사건사고가 수두룩해 자칫 수면 위로 오르면 큰일이었다. 게다가 소멸마법은 위험부담이 커서 우리 집이 아니라 다른 데서 실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들키진 않겠지?’
엔토니가 흘끗 바구니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요즘 부쩍 한숨이 늘었다━그렇다면 지니어스 부부의 한숨은 얼마나 늘었을까?━. 용감함과 무모함은 한 끗 차이라더니, 오늘도 씩씩한 악동이었다.
*
3개월 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실리는 인제 겨우 포크에 벌벌 떨지 않았다. 수저 사용도 거뜬했고, 아직 지렁이 같은 모양이지만 글씨 쓰기도 익숙해졌다.
‘Эшлі’
아실리가 넓은 종이 위에 제 이름을 적고 뿌듯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 차례로 다이애나, 알버트, 엔토니의 이름도 적어 나갔다. 부모님 이름 사이에는 센스 있게 하트도 그렸다.
‘Эшлі. Дыяна ∞ Альберт Энтані.’
어쩐지 하트보다는 일그러진 쌍동그라미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도록 하자.
요람에 누워서 매양 잠이나 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척척 글자를 쓰고 있다니. 넓어진 행동반경이 감격스러웠다. 아실리가 종이를 넘겨 뒷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아실리 지니어스’를 한글과 영어로 써본 것이다. 평생을 말하던 언어들이었는데 어느 틈에 낯설어진 격차가 서먹했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가족들의 이름까지 예전 언어를 빌려와 나타내보았다. 그제야 굵다란 격차가 조금 메꿔진 듯했다.
그 뒤로도 방바닥에 널찍한 종이들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던, 아니 글자 연습에 매진하던 아실리는 언제부턴가 꾸벅꾸벅 졸다가 그대로 스르륵 엎어져 낮잠에 빠졌다.
“아실리! 아빠 왔― 어? 아이고, 우리 딸 자는구나.”
알버트가 방바닥에 벌러덩 누워 자고 있는 아실리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어떡해, 우리 딸! 팔다리를 사방으로 뻗치고 포동포동한 볼 한쪽이 꾸욱 눌린 채로 잠든 아이의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침대로 옮기기 위해 살며시 아실리를 안아 들었을 때, 어떤 종이 하나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아실리의 볼에 깔려 가려졌던 종이였다. 조심히 아실리를 옮겨두고 돌아온 알버트가 그림 같은 글자들을 확인했다.
“아실리, 다…이애나.”
아하, 가족들 이름을 쓴 거로군? 이어서 알버트, 엔토니까지. 나아가, 그와 아내 이름 사이에 그려진 기이한 문양은 알고 보니 하트였다. 너무나 작아서 평생 하나하나 보듬어주어야 할 것만 같던 아이가 가족들 이름을 삐뚤삐뚤 써놓은 것을 보니, 예쁘게 글씨를 써보겠다고 낑낑거렸을 광경에 귀엽기도, 어딘가 뭉클하기도 했다.
“음?”
우연찮게 종이 뒷면을 넘긴 알버트가 일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곳에는 영어들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메드라여, 맙소사……. 웬만해서 당황하는 일이 없는 그가 표정을 굳히고 재차 확인했다.
“이건, 아니, 이럴 수가. 고대어가 왜…….”
알버트가 침음을 흘리며 들고 있던 종이를 품에 숨겼다. 그리고 다른 고대어의 흔적이 없는지 꼼꼼히 둘러본 후, 아실리의 이마에 짧게 키스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가뜩이나 최근 마법의 탑에서 엔토니를 데려가겠다며 기승을 부리는데, 아실리의 재능이 알려진다면 현자의 탑이나 고대의 탑까지 극성일 게 분명했다. 아무리 지니어스 가 아이들이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명석하다 할지언정, 아직 제게는 어리고 조그마한 자식들이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원한다면 모르겠지만…… 오, 글쎄. 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알버트의 과분한 욕심일지도 모르나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 함께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저만의 기량을 떨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게, 꼭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만 같아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