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무엇을요?”
“그렇게 하면 우리 아실리가 울 거라는 사실을요.”
다이애나는 며칠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조심스레 울어달라고 권유하는 알버트를 보며 순간 그가 미친 줄 알았더랬다. 그토록 딸을 가지고 싶어 하더니만 문제가 생기니 이이가 정신을 놓았나 싶었다.
“선대 기록장을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적혀 있어요. 아이가 울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울지 않는 상황이요.”
오, 메드라여━메드라는 모크니 제국의 주신이었다━. 지니어스 가문은 신앙에 냉소적인 경향이 강했지만 다이애나는 이 순간 신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갓난아기가 울 필요를 느끼지 못해 그러지 않는다니!
“그럴 때는 아이에게 울 이유를 알려주면 된다고 기록장에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했던 것인데… 혹시 이상했나요?”
알버트가 약간 긴장한 듯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사실 그는 선대가 남긴 기록장을 수십 번 읽고, 딸아이가 태어나 울지 않았을 시를 대비해 아무도 모르게 거울을 보며 거듭 연습했다. 대사도, 말투도, 표정도 다양하게 바꿔가며 되풀이했다. 이 모든 게 딸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다.
지니어스 가문에서는 여자아이가 희귀했다. 몇 대에 한 번씩 태어날까 말까 할 정도로 딸을 볼 확률이 아주 낮았다. 그래서 알버트는 태어나서 남매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고, 고모라는 말도 해본 적이 없었으며, 고모할머니라는 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뿐이랴 온 가계도를 면밀히 살펴봐도 혼인으로 맺어진 게 아닌 이상 여성은 찾기 힘들었다.
이를 알면서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면서도 알버트는 늘상 딸이 가지고 싶었다. ‘아빠!’하고 자신을 부르고, ‘아빠가 하늘만큼 땅만큼 보고 싶었어요!’하고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며, ‘저는 나중에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예요!’하고 자신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그런 딸을 가지고 싶었다━그래, 알버트는 망상이 과했다━.
그래서 그렇게 연습했다. 근 몇 달간 자자했던, 지니어스 백작이 황궁 재무과 집무실에서 작은 서책 하나를 조각낼 듯 살기를 흩뿌린다는 소문도 실상 딸아이에게 최고의 첫인상을 남기고 싶은 아버지의 부단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아니요. 정말 멋졌어요. 역시 내 남편이에요.”
다이애나가 알버트의 옅은 초조함을 눈치채고 부러 싱긋 웃었다. 알버트가 다이애나의 이마에 짧게 키스를 남기며 덩달아 웃었다.
귀엽기는. 다이애나는 기특한 남편을 계속 북돋웠다. 분명 혼자 전전긍긍하며 고심했겠지. 고민한 보람이 있다며 만족스러워하는 게 뻔히 보였다.
*
이제 다솜이 아닌 아실리는 요람에 누워서 찬찬히 상황을 정리했다.
‘대한민국의 이다솜은 죽었다.’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다솜이 아실리로 다시 태어난 거라는 확신.
‘지니어스 백작가의 딸, 아실리. 가족관계는 아버지 알버트 지니어스, 그리고 어머니 다이애나 지니어스, 마지막으로 오빠 엔토니 지니어스.’
지금까지 엔토니 지니어스만 실제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엔토니 석 자를 하도 많이 들어서 이미 아는 사이인 듯 내적 친밀감이 높았다. 방을 오가는 시녀들이 그를 꼭 언급하곤 했기 때문이다. 오묘하게 닮은 듯 안 닮았다, 천재 남매다, 하는 수군덕거림이었다.
똑똑. 한창 아실리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앙증맞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갓난아기는 당연하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실리는 허공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다소 답답함을 느꼈다.
“들어갈게.”
아실리의 오빠, 엔토니 지니어스가 슬쩍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올해 네 살이 된 엔토니는 최근 마법을 써보겠다고 설치다가 방 하나를 날려먹고는 (방에서) 외출금지를 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얼마 전 태어났다는 여동생을 너무나도 보고 싶어 과감히 방 안에서의 가출을 강행했다.
아버지께서 화를 내실 테지만 용감한 엔토니는 무섭지 않았다. 그가 마법에 꽂힌 이래 아버지의 성화는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여동생이 저더러 왜 이렇게 늦게 보러 왔냐고 토라질까 무서웠다.
딸아이에 집착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 모르는 새에 여동생을 간절히 바라온 엔토니였다. 그 여동생이 실제로 생겼는데 보러 가지도 못하게 막은 아버지가 너무한 거였다.
에드워드라는 못된 친구 녀석은 ‘너에게 여동생은 헛된 꿈이야.’라며 자신을 비웃었더랬다. 하지만 보라지! 헛된 꿈은 무슨. 엔토니는 에드워드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차주고 싶었다.
엔토니는 짤막한 다리로 똑 부러지게 걸어서 아실리의 요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에 가로막혔다.
“……어떡하지?”
신장이 겨우 100cm가 넘는 엔토니에게 아실리의 요람은 너무 높았다. 현실이 가혹했다. 우리 동생 만나볼 생각으로 여기까지 몰래 힘들게 걸어왔는데, 이대로 속절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엔토니는 요람 앞에서 얼마간 고민하다 결연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엔토니가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방 한구석의 책장으로 향하며, 책을 계단처럼 쌓아 그것을 밟고 올라가 아실리를 보겠다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고정되지 않은 데다 좁은 책들을 토대로 오른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성화에도 굴하지 않는 용감한━혹은 굉장히 무모한━ 엔토니 지니어스였다!
그리고 해결책 책장 앞에 당도했을 때, 엔토니는 다시 한 번 절망했다.
세상에. 책장이 너무 높았다.
*
물거품이 되어버린 계획을 붙들고 침울해하던 엔토니는 우연찮게 아실리를 살피러 들어온 유모를 맞닥뜨리고 하얗게 질렸다. 그가 새로운 마법을 연습하다 방을 폭파시켜서 근신 처분을 받은 건 백작가 사람들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엔토니는 자신이 몰래 방을 빠져나온 이야기가 아버지 귀에 들어갔다간 귀중한 마법서들이 어떤 꼴을 당할지 알았다. 진정으로 용감한 자는 소중한 것을 위해 물러나고 숙일 줄도 알아야 했다.
엔토니는 사정사정하여 탈출 사실의 유포를 막았다. 더하여 겸사겸사 유모의 도움을 받아 고대하던 여동생과 대면했다.
여동생과의 첫 만남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