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앰― 매앰― 찌르르르―
햇살이 베일 듯이 따가워 나그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지척에 마을이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선 초가집의 둥근 지붕산을 바라보며 나그네는 흐르는 땀을 훔쳤다. 긴 길을 혼자서 걸어온 듯 신은 해어졌고 옷은 너절해진 채였다.
매앰― 맴― 매앰―
“매미가 소란하군.”
나그네가 말했다. 낄낄대며 나그네는 마을을 향해 비척비척, 느린 걸음을 걸었다. 매미소리가 거셌다. 귀청이 떨어질 듯이 억세도록 매암매암 울어제끼는 통에 두통을 앓아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나그네는 어느새 저만치 멀찍이 까지 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그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
매미 소리가 순식간에 멎었다.
선음蟬吟
: 매미울음
여름의 햇살은 유독 따갑다.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들의 수다는 그보다도 더 따갑고, 그 왁자한 목소리 가운데서 웃는 순이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순이는 김 대감 댁의 일하는 아이로 몸종이라 하기에는 곱상한 얼굴 생김과 흰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잘 빚어낸 도자기마냥 매끄러운 살결에 샐샐 웃음 치는 눈초리는 온 동네 총각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 애, 순이야. 강 건너 박 도령이 너를 마음에 둔 모양이던걸. 어머나, 순이는 그 댁 돌쇠에게 마음이 있던 것 아니니? 아이 참, 놀리지들 마셔요. 소란스런 대화 안에서 웃는 순이는 유독 햇살 같았다.
수다소리만치 매미 울음도 높아졌다. 흰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순이는 빨랫감을 들고 일어섰다. 저는 먼저 돌아가 보겠어요. 사근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돌아선 순이가 큼지막한 밤나무 아래를 스칠 적이었다.
“어?”
매미 울음이 멎었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온 집안 식솔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고 마치 초상이라도 치룬 양 침울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골이 왕왕 울릴 정도로 시끄럽고, 또한 서러운 울음에 돌쇠는 속이 타들어갔다.
대문을 두드리는 문소리가 들렸다. 꽤나 호쾌하게도 이리 오너라, 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쇠는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로 툴툴대며 대문을 열었고, 대문 밖에는 추레한 차림의 선비가 서 있었다. 틀어 올린 상투는 거의 풀어지기 직전이었고 갓은 찌그러졌으며 흰 도포는 얼룩지고 너절하게 낡아 있었다. 해진 짚신은 차라리 돌쇠의 그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
“무슨 일이쇼?”
돌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노골적으로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선비는 어설프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바람에 갓이 비뚤어졌지만 선비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이 보였다.
“지나가는 과객이오. 요란한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여쭈려고…….”
요란한 울음소리. 하하, 원 참. 남의 집 일에 오지랖도 넓수다. 돌쇠가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선비는, 나그네는 뻔뻔스레 자리를 지켰다. 마치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겠다는 듯이. 돌쇠가 힐끗, 집 안쪽을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래도 나그네가 쉬이 자리를 떠나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쇼.”
속닥속닥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나그네는 허허, 웃었다. 마을에 들어서서부터 울음소리가 요란한데 나 하나 함구한다 한들 그 누가 모를까. 그러나 그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았네, 꼭 함구하겠네, 하였다. 약조하셔야 하오. 낮은 목소리로 다시금 엄포를 놓은 돌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실은 일하는 아이 중 하나가 아주 기묘한 병에 걸렸지 뭐요.”
기묘한 ‘병’. 그 단어에 나그네의 눈빛이 순간 빛나는 듯 했다. 그러나 돌쇠는 알아채지 못한 듯, 미간을 좁히며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을 연신 힐끗댈 뿐이었다.
“그 기묘한 병이라는 것이, 대체 무어이기에?”
한껏 조심스레 물어오는 나그네의 목소리에 돌쇠의 눈길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더니 또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췌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수다. 나흘 전부터 갑자기 저렇게 숨이 넘어가도록 울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니, 아이는 빼짝 말라만 가고 어르신들도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다오. 이러다 정말 초상이라도 치를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울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기묘한 병. 그러면서 돌쇠는 덧붙였다. 벌써 용하다는 의원이 여럿 다녀갔지만 아무도 순이가 왜 저리 섧게 우는지 짚어낸 이가 없었수다. 정말로 아무런 방도가 없는 것인지. 쓰리게 혀를 차는 돌쇠를 보더니 나그네가 번듯하게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이를 좀 볼 수 있겠소? 은근하게 속살대는 목소리에 돌쇠가 표정을 구겼다.
“그만 돌아가쇼. 순이는 구경거리가 아니오.”
돌쇠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퉁명스레 말했다. 자못 진중한 그 모양새에 나그네는 입가에 걸었던 미소를 지워내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나 또한 그이를 웃음거리로 삼을 생각은 없소. 허나 얘길 듣자하니 짧은 소견으로나마 그이를 진단하자면 그것은 의원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오.”
그제야 일그러진 돌쇠의 표정이 살그머니 풀어졌다. 그것은 내가 아까 말했잖수. 틱틱대는 어투로도 표정에는 은근한 호기심이 서렸다. 나그네는 금방 전보다도 한층 부드러운 얼굴로 번지듯이 미소를 그렸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소,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방도가 없는 병들 또한 많이 보았지. 이것은 비밀인데, 실은 나는 그런 병들을 고치는 의원이라오.”
허! 돌쇠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표정을 구기며 나그네를 돌려세웠다.
“그냥 오지랖 넓은 나그네인줄로만 알았더니, 정신 나간 놈일 줄이야! 썩 꺼지쇼!”
아, 아니.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거짓이 아니오. 다급하게 해명을 늘어놓는 나그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돌쇠는 그를 매몰차게 대문 밖으로 밀쳐냈다. 재수가 없으려니 원! 대문 너머에서 짜증스러운 돌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그네는 굳게 닫힌 대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허, 낮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타박타박 멀어지는 발소리는 여전히 우렁찬 울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순이 말이어요?”
두 눈을 토끼마냥 땡그랗게 뜬 계집아이를 앞에 두고 나그네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는 그 큰 눈망울을 데록데록 굴리며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앗참, 하고는 두 손을 짝 소리가 나도록 마주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게 딱 나흘 전부터였어요. 순이가 저렇게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 것이 말이어요.”
나흘 전? 나그네의 목소리에 아이는 야무지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순이는 닷새 전까지는 아주 멀쩡했어요, 그날두 노상 그랬던 것처럼 시내에서 함께 빨래를 했는걸요.”
똘망한 눈동자에 걱정의 빛이 서렸다. 나그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 이야기를 해주시겠소?’하고 물었다. 정말루 평소와 다를 것두 없었다니깐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말간 얼굴의 계집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양이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가는 듯이 보였다. 나그네는 더 보채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보다 선명하게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배려였다.
“해가 중천에 가장 높이 떴을 때 시냇가에 모이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어요. 햇발이 가장 따가울 적에 물가에서 빨래를 한다는 핑계로 마을 처녀며 아낙들이 모두 모여 물장난을 하곤 하거든요.”
사내애들은 원한다면 언제고 웃통을 제끼고 물장구를 칠 수 있지만 말씨며 손짓이며 숨을 내뱉는 것까지도 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는 어린 여인들에게 빨래터는 몇 안 되는 여흥이었을 터였다. 묵혀온 하루 내지 이틀만치의 수다거리를 풀어놓으며 찬 물에 빨랫감을 담가놓으면 곱디고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단박에 식었으리라.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날이었어요. 빨래를 하면서 평소와 같은 수다를 떨었지요. 순이는 곱상하니 일하는 아이답잖게 어느 양반 댁 아씨마냥 우아한 데가 있었어요. 그래서 젊은 새댁들도 순이를 굉장히 예뻐라 했고, 온 마을 총각들은 물론이고 건넛마을에서도 순이를 마음에 품은 사내들이 많았지요. 우리는 그런 순이를 곧잘 놀리곤 했어요. 순이는 같은 댁에서 일하는 돌쇠를 좋아하는 눈치였거든요.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했어요. 그러다가 순이가 먼저 돌아가겠다며 자리를 떴고…….
귀청이 따갑도록 매미가 울었다.
“유독 매미가 소란하구려.”
“예에, 요 근래는 유난히 소란했어요. 그날두…….”
그러자 나그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미. 그래, 매미. 마치 실성이라도 한 사람처럼 매미, 매미, 하고 계속 중얼대던 나그네는 허리를 꾸벅 숙여 고맙소, 하고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나그네는 낡은 책자를 떠올렸다. 언제고 항시 제 짐에 챙겨두고는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바삐 서두르던 걸음은 어느새 달음박질이 되었고 그렇게 뜀박질을 하며 주막으로 향한 그는 황급하게 제 짐을 풀어헤쳤다. 누런 표지의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낡은 세월을 그대로 새겨놓은 모양을 한 서책이었다.
서책을 넘기는 나그네의 손이 바빴다. 잠귀, 연가귀, 스쳐가는 온갖 귀鬼의 이름을 지나 나그네의 손이 멈췄다.
“찾았다.”
선음귀. 또렷하게 새겨진 이름 세 자에 나그네가 느른한 미소를 걸었다. 고막이 울리도록 매암대며 울어제끼는 매미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음귀. 그래, 선음귀였어.
나그네의 시선이 멈춘 활자 위로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온갖 기기묘묘한 것들의 이름자가 빼곡하게 들어박힌 서책 안에서 선음귀, 세 글자만이 매암매암 울어 젖히는 듯 했다. 매미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선음 속에 나그네의 얼굴은 자못 진중했다.
선음귀. 쏟아지는 매미소리가 일제히 멎는 순간, 매미는 그 침묵의 시간 동안 몸을 떠나 구천을 돌다가 다시금 제 몸으로 돌아가는 짧은 여행을 한다. 이때 구천을 떠도는 매미의 혼을 선음귀라 한다. 선음귀는 대개 사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매미 울음이 일제히 멎는 그 순간, 매미와 눈을 맞추게 된다면 선음귀는 그 눈에 빨려들어 구천 대신 사람의 몸에 깃들게 된다. 선음귀가 깃든 사람은 매미와 같이 이레를 소리 내어 울다가 진이 빠져 죽고 만다.
죽고 만다. 나그네의 시선 끝이 얼어붙었다. 아직도 귓가에는 순이인지 꽃님이인지 하는 어린 계집아이의 울음소리가 생생했다. 그저 기분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밀려오는 매미소리 사이로 그 어린 것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골이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오늘로 사흘 이랬나, 나흘 이랬나. 나그네는 이마를 짚었다. 하여간에 확실한 것은 저대로 두었다가는 정말로 초상을 치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저 보지 못한 체 하고 넘기고자 한다면 그리 해도 되건만, 이미 그 울음소리의 주인을 알아버리고 그이가 머잖아 죽을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르는 체 하고 무시하기에는 가슴 한 켠이 묵직하게 켕겨왔다.
나그네는 묵직한 몸을 일으켰다. 그 으리으리한 기와집의 주인양반 입장에서도 일하는 계집아이가 연유도 모른 채 울다 죽어버리는 것을 원치는 않으리라. 그러고 보면 그 댁 양반도 퍽이나 관대한 이였다. 고작 몸종 계집애였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거들랑 내치면 그만이었다. 일도 하질 못하고 밤낮없이 울기만 하는 그 어린 것을 여즉 쫓아내질 않은 것을 보자면, 그이를 설득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나그네는 걸음을 떼었다. 그 매미 같은 계집애의 울음을 그치도록 해야 했다. 왕왕 울어대던 매미가 다시금, 일제히 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어린 것의 울음도 멈췄다.
계십니까, 하는 소리에 대문이 열렸다. 젊은 안주인은 멀끔하게 도포를 걸친 사내를 보았다. 말간 얼굴은 앳되었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안주인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뉘신지요?”
“말씀 좀 여쭈려 왔습니다.”
말씀이라.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대는 그녀를 보고 사내는 말을 이었다.
“저는 한양으로 가는 과객인데, 혹시 이 고을의 주막이 어디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저 골목 끝으로 저자가 이어져있습니다. 저자까지 나가면 금방 보일겝니다.”
이것 참, 감사합니다. 사내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듯 하더니 몸을 멈추고 고개를 틀었다.
“헌데, 지나가다가 듣자니 이 댁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 울음소리는 무엇입니까?”
묻자마자 안주인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근심이 서린 얼굴로 저 안쪽을 휘 둘러보던 안주인은 이마를 짚었다.
“그게 실은…….”
일하는 아이 하나가 몹쓸 병에 걸렸답니다. 목소리에서 짙게 배어나는 걱정에 사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 참 지독한 병인가봅니다, 저리도 섧게 우는 것을 보자면. 나그네의 말에 안주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달리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연유도 없이 울기만 하니.”
“아니, 연유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사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병에 걸려서 우는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응당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파서 우는 것일 텐데 어찌 연유가 없다고 하십니까.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물어도 대답을 않고, 의원을 불러다 진맥을 해도 모두가 이상이 없다고 하니 되레 그것이 이상할 밖에요. 아픈 데도 없고 맥이 짚이는 것도 아니니 그저 연유 없이 우는 것이 아니라면 무어겠습니까. 처음에는 저 애가 일이 하기 싫어 꾀를 부리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헌데 실신을 하도록 울어 젖히고 눈을 뜨면 또 목이 쉬도록 우는 것이 어찌 꾀를 부린다 볼 수 있겠습니까. 나날이 야위어가는 아이를 두고 그리 생각해서는 아니 되지요.
걱정이 담뿍 배어나는 안주인의 음성에 사내가 온화한 미소를 걸었다.
“한양에 가기 위해 긴 여로를 떠난 중에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주인의 표정에 의문이 스쳤다. 사내는 아주 중한 이야기를 하는 듯이 음성을 낮추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아주 진중하게 사근대며 세 음절을 뱉었다.
“선음귀.”
그러자 안주인이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내는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로 느른하게 웃었다. 안주인의 얼굴이 당혹감에 붉게 물들더니 곧 성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귀요? 지금 저 애가 귀신이라도 씌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썩 저리 꺼지십시오! 재수가 없으려니 원!”
쾅, 큰 소리를 내며 대문이 닫혔다. 사내는 그 자리에 황망한 얼굴로 섰다. 쉬이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질 못했다. 사내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이야기도 들어주질 않을 줄이야.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나그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다시금 와앙, 하는 울음소리가 대문 안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귓구멍이 아리도록 왕왕대고 엉엉대는 소음이 끊이지 않고 파도를 치며 그저 마냥 밀려들고, 밀려들고, 밀려들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아니 되리라. 이미 그 어린 계집의 울음소리는 쉴 대로 쉬어 제대로 소리가 나지를 않는 듯이 들렸다. 그렇게 앞으로 사흘이 흐르면 저대로 숨이 멎을 것이다. 나날이 비쩍 말라가는 야윈 몸은 움직이지 않게 될 것이고, 간헐적으로 뱉어내던 밭은 숨은 그렇게 다시는 허공에 흩어지지 않게 되리라. 알고 있기에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목숨이 다할 것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외면할 정도로 매정한 성정이 되지를 못했다.
나그네는 굳게 닫힌 대문을 두드렸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저 이가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할 수는. 어린 것의 울음소리에 두드리는 문소리가 묻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안주인이 문을 열리 말라 엄포를 놓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사내가 한참 문을 두드려도 헐겁게 흔들리는 문소리 말고는 나서는 이가 없었다. 사내는 입술을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