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판타지/SF
추이기담집
작가 : 이은성
작품등록일 : 2022.2.3

추이꾼에 대해 알고 계시오?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떠돌며 기이한 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들을 이르지.
세상에는 사람 이외에도 많은 삶이 사는 법이고, 우리 눈에는 뵈지 않는 삶이 역동하며 제 이야기를 하는 법이라오.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기담 모음집입니다.

rio_siena@naver.com

 
화순 : 꽃과 같은 입술
작성일 : 22-02-03 20:41     조회 : 227     추천 : 0     분량 : 8597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화순華脣

 : 꽃잎, 꽃과 같은 입술

 

 

 

 

 “이 미천한 추이꾼 나부랭이를 예까지 부르신 데에는 분명 그만한 연유가 있는 탓이겠지요.”

 

 추이꾼은 본디 어린아이 베갯머리에서나 들리는 이야기로, 실재하는 것을 믿는 이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리 서신을 보낸 것은…….

 그러니 이레를 꼬박 걸어 예까지 도달한 것인데, 아니나다를까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한 양반댁이라. 그 집을 처음 본 나그네는 허, 하고 기운이 빠진 듯 바람소리를 뱉었다. 하기사 이 정도는 되어야 말을 묻든 사람을 이용하든 추이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안이 얼마나 중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거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을 터였다. 때문에 나그네는 이 기묘한 일에 흥미가 동했다. 그것이 무슨 일이든 사람의 일은 아닌 탓에 추이꾼을 찾았을 터이고, 또 추이꾼 아닌 이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단정짓기가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상당히 묘하고 신기한 일일 것이 분명했다. 자, 얼마나 아리송한 일이기에 사람을 예까지 찾았누. 실상은 잔뜩 신이 나 어린아이처럼 엉덩이를 제자리에 붙이고 있기조차 어려우면서도 나그네는 부러 빼뚜름한 자세로 앉았다. 그것은 일종의 호기이고 허세였다. 거창한 양반 나리께서 예까지 사람을 불렀으니 오기야 왔다만은, 그것이 그리 탐탁치 않은 양 굴었다. 그리 앉은 채로도 나그네는 눈동자를 휘 굴려가며 방을 훑었다.

 방 안은 조용하고 약간의 향내가 났다. 나그네는 그 희미한 향내의 끝물에 어리는 매화의 향을 느꼈다. 그것은 향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아주 옅고도 약한 어떤 흔적같은 것이라 차라리 기분 탓으로 여기는 것이 옳을 정도로 희미한 것이었다.

 사랑채는 아주 조용했다. 공기에 흐르는 그 손 끝에 닿을 듯 말 듯 아찔하게 스치는 꽃내음을 제하고는 특별할 것도 없이 묵직한 공기였다. 잔잔한 침묵이 아슬하게 줄을 타는 듯이 흐르고 있었으나 나그네는 다만, 그저, 노상 그랬듯이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올리며 미소지을 뿐이었다.

 

 “딸애가 사라졌네.”

 

 정승은 말했다. 나그네는 한쪽 눈썹을 빼뚜름하게 치켜올리며 삐딱하게 어르신을 보았다.

 

 “그런 일이라면 추이꾼이 아니라 포졸을 부르시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포졸이 아니고 관원도 아닙니다. 저를 예까지 부르신 데에는 분명히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어르신께서 고작 어린애들 베갯머리 이야기인 추이꾼을 얄팍한 믿음 하나로 예까지 오라가라 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말씨는 배배 꼬인 채였고 삐딱하니 잔뜩 심사가 뒤틀린 나그네는 그것을 부러 감추며 예를 갖추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르신 또한 그것을 그다지 신경쓰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나붓이 앉은 나그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작은 함을 하나 꺼내오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모르는 체 하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자개로 장식을 한 그 붉은 함을 앞에 내어놓는 것만으로도 매화향이 진득하게 허공에 흩어진 탓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꽃이었다. 함을 열 필요도 없이 명백한 것이었다. 나그네는 그 닫힌 함을 보았다.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듯 형형한 눈빛이 어르신의 굳게 얼어붙은 입매와 단단히 닫힌 함 뚜껑을 번갈아 훑었다. 부러 물을 이유도 없는 말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제야 어르신은 원하던 말을 들었다는 양, 입을 떼었다.

 

 “내 딸애일세.”

 

 그것은 꽤, 대답치고는 기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그네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는 양 다만 함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나그네에게 그런 일은 익숙한 일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도통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도 추이꾼으로서 듣자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좀 더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나그네는 보다 정중한 투로 말씨를 고쳤다. 어르신은 그 주름진 손으로 자개함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붉은, 새빨간, 핏물만치 눈이 아린 매화꽃잎이었다. 알알이 영글어 손을 대면 여즉 빨간 꽃물이 배어날 마냥 그리도 눈에 박히는 꽃무리였다.

 

 “그날은 그 애가 시집을 가는 날이었네.”

 

 화려하게 치장한 꽃가마. 매화처럼 고운 연지곤지를 찍어바른 아이는 아비에게 하직을 고하고 가마에 몸을 실었다. 그이가 얼마나 울었던가를 아는 이는 없었다. 축복의 말이 넘쳐흐르는 날이었다. 그이를 제하고는 모두가 잔치를 벌이던 날이었다. 사람들은 신부의 앞날을 축하했고 번듯하고 지체 높은 가문에 딸애를 시집 보낸 정승에게 축하했다. 흔들리며 가마 안에서 신부만이 말이 없었다.

 가는 길은 꼬박 한나절이 넘게 걸렸다.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그 길 가는 내내 가마 안은 조용했다. 아니, 어쩌면 들뜬 이들의 콧노래가 그이의 울음마저 삼켜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하여 신랑의 집 앞에 도착하여 연 가마에 신부는 없었다. 텅 빈 가마 안은 온통 홍매화 뿐이었다. 남은 것은 가마 가득 붉은 꽃송이 뿐이었다.

 

 

 

 

 

 나그네는 그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임을 알았다. 기실 답은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어르신께오서는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상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나그네에게는 지나치게 익숙하고, 또한 이미 언젠가는 들은 적이 있는 이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말 좀 여쭙겠소.”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 대문 밖을 나온 나그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꽃이 되어 사그라든 연화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떠난 이의 말을 들을 방도는 없으니 나그네는 그에게 가장 익숙한 일을 할 뿐이었다. 지나는 이들에게는 응당 풍문이 떠도는 법이다. 마을의 일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야 마땅할 터였다.

 사내는 다소 놀란 얼굴로 나그네를 보았다. 나그네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람들은 으레 낯선 이가 말을 걸면 그리도 놀란 표정을 짓곤 하였다. 나그네에게는 그조차도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저기 정승 댁에 있던 연화라는 아씨에 대해 아는 일이 있소?”

 

 사내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허공을 휘저었다. 그것은 응당 무언가를 알고 있는 이가 하는 행동인지라, 나그네는 잠시 사내를 보다가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그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어찌, 자리가 필요하다면 내 그리 할 터이고 이야기에 대한 대가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지불하겠소. 그러니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겠소?”

 

 그러자 한참 이리저리 사위를 살피던 사내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또 나그네는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아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나그네는 말했다. 우선은 자리를 좀 잡는 편이 좋겠네.

 

 

 

 

 

 “화순이라는 것이 있소.”

 

 꺼내는 이야기는 사람의 것이 아닌 이야기였다. 사람의 것이 아닌 이야기. 기실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더욱 많은 이야기. 혹은 어린아이들의 잠투정을 달래기 위하여 늘어놓는 이야기.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의 이야기.

 

 “꽃의 입술이라 하지, 화순이라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또 그다지 생경할 일도 아니오. 우리, 추이꾼들에게는 말이오.”

 “꽃의, 입술이요.”

 “허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깃들고 연정에 피어나는 꽃이라오.”

 

 마음에 깃들고 연정에 피어나는 꽃. 사내의 눈빛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 목구멍 안에 감추어 둔 말이 어떤 것인지 부러 확인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양, 나그네는 잠시 시선을 떨구어 사내의 흙으로 얼룩진 손을 보았다. 잔뜩 트고 갈라진 손의 흉 사이사이로 단단히 박힌 고된 일은 사내의 신분을 알리는 호패라도 되는 양 하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오.”

 

 그 모습은 퍽이나 아름답지. 하얗게 분을 바른 여인의 새빨간 입술 사이로 하늘하늘 흩어져 떨어지는 꽃잎의 모양이란.

 허나 알고나서도 그것이 그리 아름다울까.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으로도 모자라 곪고 썩어가다가 결국은 그것이 마음에 핀 꽃의 거름이 되어 그리 화하는 것을. 나그네는 사내의 얼굴을 바로보았다. 번듯하게 잘 생긴 사내는 그러나 천한 백정이었다. 여인이 사내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찌나 깊던지 여인은 흔들리는 꽃가마 안에서 그리도 방울방울 붉은 꽃잎을 토해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하나, 하나, 하늘하늘 유려하게 선을 그리며 흩어질 뿐이오. 허나 차츰 꽃잎은 늘어만 가고…….”

 

 나중에는 입술 밖으로 토해져 나오는 것이 꽃송이가 되지. 점차 목구멍 안으로 빼곡하게 차오르던 꽃송이는 제 땅이 되는 여인의 가슴에 깊게 뿌리를 박고, 점차 여인의 숨통을 막고, 그러다가 실연에 앓기 시작한 그 여린 사람의 온 몸을 잠식하게 된다네.

 연화 또한 그리하였다. 보지 않아도 그럴 것이 분명하였다. 가마 안에서 쿨럭쿨럭 매화꽃을 토해내며 곱게 바른 분이 다 지워지도록 하염없이 울었을 터였다. 나그네는 보지 않아도 그 풍경이 눈에 선한 듯 하였다. 이미 수없이 많은 추이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꽃잎들이 이미 그들의 추이록에 기록되고 기록되어 선명해진 존재였다.

 

 “허면 아씨는…….”

 “꽃이 된 이는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오. 이쪽.”

 

 나그네는 허공에 손으로 선 하나를 그었다.

 

 “…에서 저쪽으로.”

 

 손이 선 너머를 가리켰다. 사내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으나 나그네는 본디 그런 것을 마음에 두는 인사는 아니었다. 다만 느리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사내를 보는 것이었다. 느리고도 잔잔한, 달리 무어라 할 것도 없는 동작에도 사내는 무언가를 전해들은 양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곳은 전혀 다른 것들이 사는 곳이라오.”

 “추이꾼들에게는 그것이 전부 보이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우리도 그저 한낱 사람인 것을.”

 

 다만, 그러한 세계조차도 존재한다고 믿으면 그만치 더 보이는 법일세. 나그네는 말했다. 사내는 다시금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이로군요.”

 “그런 점에서는 황천과 다를 바가 없지.”

 

 사내의 입술이 닫혔다가, 벌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이려는 입매를, 나그네는 빤히 보면서도 보채는 법이 없었다. 어차피 그 입으로 말하게 되리라는 양 나그네는 다만 사내가 스스로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굴었다.

 

 “아씨는 제 정인이었습니다.”

 

 사내가 꺼낸 이야기는 기실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미 다 가늠했던 이야기, 짐작했던 이야기. 부러 듣지 않는대도 앞이 빤한 이야기. 그러나 나그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이 추이꾼의 일이었다.

 

 “아씨와는 몇 해 전인가 장에서 만났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장돌뱅이들을 따라 정처 없는 걸음을 걷는 떠돌이였고 아씨는 그때도 참으로 곱고, 또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소년과 어린 소녀가 만나는 일은 옷깃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선인들도 그리 말하지를 않았던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영영 말 섞을 일조차 없을 줄로만 알았던 두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처음에는 호기심이 그 다음에는 정이 되고, 신분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아이들이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서 서로를 사내로, 여인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일이었다.

 

 “저는 장돌뱅이를 그만두고 이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습니다. 아씨와, 연화와 이어지리라는 기대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하루라도, 한 번이라도 얼굴을 스치고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더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연화도 저도 알고 있었어요. 이어질 수가 없는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는 마음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러나 다만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정인의 음성을 듣고자 하였다. 그저 달기만 한 밀회는 아니었으나 애끓는 마음을 전하기에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아씨는 언젠가 손을 잡고 그냥 도망가버리자, 짓궂은 말을 속삭인 일도 있었으나 사내는 그저 남몰래 두 손을 잡을 수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러니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연화가 시집을 가버린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화는 활짝 피어 만개한 꽃이었고, 사방에 진동하는 달큰한 꽃향기에 취해 달겨드는 것은 벌나비 뿐만이 아니었다. 사내는 자신이 그 벌나비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저리도록 알고 있었다. 밤이면 꽃봉오리를 다물고 가만히 잠이 든 꽃잎 위를 비껴가는 달빛의 편린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바라는 것은 없었다. 다만 드리운 눈꺼풀 위를 엿볼 수만이라도 있다면. 거기서 더 욕심을 낼 마음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도망이라도 칠 것을.”

 

 사내는 자책했다. 차라리 그 흰 손을 붙들고 아무도 모를 곳으로 영영 도망이라도 치고 말 것을.

 

 “후회해도 늦었소. 아시잖소.”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져버린 꽃은 다시 피는 법이 없듯이.

 

 

 

 

 

 “그러니 자네 말은 연화가 돌아올 방도는 없다는 뜻이로군.”

 “입때껏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이물을 보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화순에 대한 이야기는 추이꾼들에게는 닳을대로 닳아빠져 주안상에도 오르지 못 할 정도로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허나 어르신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음성은 차분했고 이전보다 더욱 정중했다. 그 음성에서 느껴지는 무게감만으로도 어르신은 나그네가 꺼낼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짐작했다.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터였다. 하기사, 사라진 사람이 돌아올 길이 없다는 데에서 이미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듯 하였으나 그놈의 체통이 무어라고, 어르신은 다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긴 한숨을 뱉을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자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지만 양반이고 천민이고 할 것 없이 평등하게 품은 것이다. 본디 이물은 신분을 가리는 법이 없다. 아니, 그것을 이물이라고 해도 좋을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미 누구 하나 빼놓을 데 없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그것은 통상, 그저 마음 속에서 자랄 뿐입니다. 가슴 속에서. 이 가슴, 아주 깊고도 깊은 곳에서. 하여 사람들은 제 몸 속에 나무가 뿌리를 뻗은 것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그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 애닳는 연심을 입술 밖으로 뱉어내지 못하고, 절절 타는 마음을 그저 그 안에 끓이기만 하는 사람들은 뱉어내지 못한 말이, 단어가, 문장이 꽃이 되어 핀다. 그제야 그것을 비로소 이물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나무는 모든 이가 가진 것이지만 그 나무에서 꽃이 피는 일은 모든 이에게 찾아오는 일은 아니다.

 

 “하여 저희는 그것을 화순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연화가…….”

 “화순이 된 것입니다.”

 

 어르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야, 내 아이야, 네 무엇을 말하지 못하고 그토록 절절 끓는 말들을 가슴 속에 삼키고 있었느냐. 그러나 차마 어르신은 그러한 말조차 입술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다만 붉은 눈을 하고 나그네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그네가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바라는 양 그러했다. 추이꾼이라는 저 이는 무언가를 알고 있겠지. 말을 묻고 물어 예까지 불러온 이이니 그 정도는 해주겠지. 그조차도 할 수 없다면 그를 예까지 부를 이유는 없었다. 어르신은 그리 바라는 듯 하였다. 나그네는 그런 어르신을 곧게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런지는 지나치게 명확한 것이었으나 그렇기에 도리어 말하기 어려운 문장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정인이 있다 들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채근하려 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르신은 그 말이 자신을 힐난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다만 괴로웠다. 그리도 그 애를 마음에 품었던 줄은 알지 못했다. 만일 이렇게 될 줄로만 알았더라면, 그 고운 아이가 제 아비를 걱정시킬까 닳는 마음에도 차마 아무 말 못하고 꽃으로 화할 줄로만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화야, 남들의 눈이 다 무어더냐. 벼슬이 무어고 체면이 무어더냐. 네가 내 곁에 없는데, 네가 영영 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고야 말았는데. 연화야, 그런데 사람들의 이목이 다 무어란 말이냐.

 늦은 후회로 땅을 쳤다. 억장이 무너져도 이미 흘러간 물은 되돌아오는 법이 없고 떨어진 꽃이 다시 피는 법은 없었다.

 

 “연화야…….”

 

 연화야. 내 딸아.

 

 “연화야, 나는…….”

 

 나는 네가 나의 꽃인줄로만 알았다. 내 품 안에서 피어 내 품에서 만개하였으니 나는 네가 나의 것인줄로만 알았다. 내게만 곱고 내게만 아름다울 줄로만 그리도 철썩같이 믿었다.

 그러나 피어난 꽃이 어찌 한 사람에게만 아름답던가. 꽃의 모습은 감추어도 천지에 만개하는 화향花香은 또 어찌 감출 수가 있겠는가. 향긋한 꽃내음에 취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눈 멀어 날아드는 것은 벌나비 뿐만이 아닌 것을. 언제고 그렇게 제 품에 가둬둘 수만은 없었던 것을.

 그런데도 나는 네가 나의 꽃인줄로만 알았다. 내가 꺾으면 꺾일 것이요, 내가 감추면 감출 수 있는 것으로만 알았다. 기실은 그렇지를 않은 것을. 너는 꽃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마음 깊은 곳에 아비가 아닌 다른 이를 들이고 어느새 아비조차 알 수 없는 그리도 눈부신 여인이 되었거늘.

 

 “어찌 부모라 하여 한 사람의 삶을 오롯이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나그네는 그리 말했다.

 

 “이미 떨어진 꽃은 다시 피어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미 꽃이 되어버린 여인은, 다시 여인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어르신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고개를 푹 수구리고 꺽꺽대며 터져나오는 눈물을 삼키는 모양은 어쩌면 측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그네는 그저 더 보고싶지 않다는 양, 눈을 감았다. 이런 일은 익숙했다. 사람들은 꽃이 지고 난 뒤에야 꽃이 그리 아름다운 줄을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참으로 부질없는 짓을. 다 지난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연화야.”

 

 나는 네가 정녕 나의 꽃인줄로만 알았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0 망향귀 : 돌아가지 못 한 곳 2022 / 2 / 23 229 0 12247   
19 염매 : 금지된 것 2022 / 2 / 23 237 0 8212   
18 청람 : 간절히 바라는 사람 2022 / 2 / 23 256 0 3937   
17 여식귀 : 머릿속에 둥지를 튼 2022 / 2 / 23 225 0 6582   
16 연가귀 : 텅 빈 둥지 2022 / 2 / 17 229 0 7489   
15 채홍 : 오색의 다리 2022 / 2 / 17 215 0 8480   
14 우인 : 빗물이 서리는 숨결 2022 / 2 / 17 224 0 9053   
13 호접 : 마음을 전하는 나비 2022 / 2 / 17 235 0 4182   
12 편우 : 햇살 조각 2022 / 2 / 11 229 0 9089   
11 호설 : 눈 산의 주인 2022 / 2 / 11 218 0 5305   
10 호설 : 눈 산의 주인 2022 / 2 / 11 248 0 6740   
9 울음뱉기 : 노을 질 무렵 2022 / 2 / 11 231 0 10805   
8 귀촌 : 도깨비마을 2022 / 2 / 6 243 0 12677   
7 선음 : 매미울음 2022 / 2 / 5 230 0 10026   
6 선음 : 매미울음 2022 / 2 / 5 226 0 7786   
5 교인 : 바다의 아이 2022 / 2 / 4 225 0 8793   
4 교인 : 바다의 아이 2022 / 2 / 4 237 0 7760   
3 화순 : 꽃과 같은 입술 2022 / 2 / 3 228 0 8597   
2 조운 : 시드는 구름 2022 / 2 / 3 248 0 14788   
1 조운 : 시드는 구름 2022 / 2 / 3 385 1 5381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