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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성은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가장 가까운 택시에 올라탔다.
“오모테산도 야스미 미술관 부탁합니다.”
재성은 유창한 일본어로 목적지를 말한 재성은 가방에 있던 태블릿을 꺼내 한국과 일본의 출입국 기록을 삭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는 신발 깔창을 들어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GPS를 꺼내 잠시 고민을 하다 부서뜨렸다.
“관광이십니까? 업무이십니까?”
재성이 업무를 처리하고 태블릿을 가방에 넣는 것을 보고 기사가 물어왔다. 아무래도 남자 혼자 미술관에 가는 게 궁금했던 거 같다.
“좋아하는 작가가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멋지네요.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죠.”
그렇게 대답하고는 스쳐지나가는 일본풍경을 바라보며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을 생각했다.
영재라는 이유로 10여년을 사이버부대원 교육만 받아왔던 재성이 러시아에서 유월을 만나 미국으로 탈출한지도 5년이 흐른 때였다. 그의 나이 스무살이었다. 공부를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탈출하기 전 유월과 약속한 일을 하기 위해 일본에 가야만 했다. 그는 떠나기 전 타고 다니던 차량처분을 위해 미뤄두었던 수리를 먼저 맡겼다. 수리가 진행되는 동안 근처 식당을 찾아 길을 둘러보다 미술관을 발견했다. 이전 같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곳이 이제 떠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조각상과 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을 지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선 재성은 봐도 잘 모르는 미술작품들을 보며 걸었다. 본다기보다는 걷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그였다. 그러던 중 그는 조각상 앞에 서서 그것을 스케치하는 아시아계 여인을 보고 멈춰 섰다. 남들은 아름답다고 말할 미술작품들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가 재성에겐 가장 아름다웠다. 그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폭탄이 마지막 10초를 남기고 카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심장이 터져 완전히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얼마나 바라봤을까 그녀가 스케치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를 옮겼다. 재성은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어 그녀를 뒤따랐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를 더 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코너를 돈 순간 여자는 사라졌다. 재성이 놀라 다급히 주변을 살피며 그녀를 찾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재성이 돌아보자 그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왜 따라 다니죠?
그녀는 아직 서툰 영어로 재성을 쏘아붙였다. 그녀의 특이한 억양과 말투가 일본인인 거 같아 재상은 일본어로 그녀에게 말했다.
- 제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걸 봐 저도 모르게 쫓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재성이 유창한 일본어로 답하자 여자는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 일본분이세요?
- 아니요. 당신이 일본에서 오신 거 같아 일본어로 말했을 뿐입니다.
- 어떻게 제가 일본 사람인 줄 알았죠?
- 경험치로 쌓여 있는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재성의 말에 여자는 소리 내어 웃다가 주변을 살피더니 재성을 이끌고 미술관 뒤 정원으로 갔다. 그녀의 아름다운 그녀와 잘 어울리는 정원이었다.
- 여기 공대생이시군요?
- 네.
- 예술학교만 나와서 공대생은 처음이라 신기해요. 이렇게 말하면 실례인가요? 죄송해요.
- 아니요. 미술을 전공하셨나요?
- 순수미술을 전공했는데, 조각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여기 왔어요.
- 예술대학이라면 시카고가 더 유명할 텐데요.
- 네, 거기 가요. 학교 들어가기 전에 가고 싶었던 미술관 탐방 중이에요. 시작은 여기부터고요.
- 잘 오셨어요.
재성은 운명이라 생각했다. 떠나기 전 차량을 수리해야 했던 것도, 관심 없던 미술관에 발걸음이 향한 것도 그가 떠나기 전날 그녀가 이곳에 온 것 모두가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제가 시카고까지 함께 해도 될까요?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재성은 택시비를 결제하고 차에서 내려 미술관 앞에 섰다. 그녀의 이름이 걸린 미술관 건물을 바라보던 재성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이 아름다운 미술관을 가장 좋아했던 그녀답게 그녀의 첫 전시회장도 아름다운 정원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가두어두었던 그녀를 향한 마음이 폭발해 나왔다. 7년간 가두어둔 마음은 작아지지 않았다는 걸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저 유월에게서 벗어나면 긴 시간 숨어지내야 했기에 앞으로 어떤 이유에서건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위안 삼아 마지막으로 그녀의 작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온 거였다. 그런데 마치 건들면 안 되는 상자의 문틈을 열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마음은 그녀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힘들어졌다. 재성의 눈엔 더이상 그녀의 작품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엔 그녀가 서 있었다. 재성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마치 재성을 기다린 것처럼 그의 등을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