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이 턱까지 차고, 심장이 조여와 기면은 더이상 달릴 수 없었다. 무엇에서부터 이렇게 도망을 쳤는지 기면 스스로 알 수 없었다. 발이 멈춘 곳엔 많은 이들이 우글거렸고, 아이들은 없었다. 기면은 그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세 명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을 건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저....”
한명의 남자가 돌아봤다. 첫 번째 피해자다.
“아!...”
기면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했다. 그 소리에 첫 번째 피해자와 함께 있던 두 명의 남자도 기면을 돌아봤다. 두 번째 피해자와 세 번째 피해자다.
“당신들이 어떻게....”
기면을 바라보던 피해자를 포함한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빛이 갑자기 돌변했다. 먹이감을 만난 이리떼처럼 그들은 기면에게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달려드는 그들에게 놀라 기면은 자신의 초인적인 힘을 끌어내서 달음박질쳤다. 아까와는 다르게 다리가 매우 무거웠다. 숨은 쉴 수 없었고 다리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한참을 달렸음에도 그들을 따돌리기 쉽지 않았다. 겨우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도망을 치던 기면은 철조망 앞에 멈춰 섰다. 철조망 안에 알 수 없는 그림자 무리가 우글거렸다. 철조망 안도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곳에 갇혀버린 기면은 자신을 따라오던 이들을 돌아봤다. 자신의 몸을 수색했지만 그 어떤 무기도 없었다.
‘꿈이야, 이건 꿈이야.’
스스로 되뇌어도 잠은 쉽사리 깨지 않았다. 그들은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철조망을 타고 올라갈 수 밖에 없었지만 저 안도 무엇이 그를 집어삼킬지 알 수 없었다. 땀줄기가 그의 머리통에서 흘러 목줄기를 타고 척추 아래로 흘러내렸다. 피부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이 악몽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무엇에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기면은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 결심한 듯 철조망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리떼들이 그에게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었고, 기면은 그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철조망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리떼들의 으르렁거림과 기면의 살고자 하는 거친 숨소리, 철조망의 거친 흔들림은 고요한 검은 그림자를 조금씩 움직이게 만들었다.
기면은 마지막까지 그의 다리에 매달린 짐승 같은 놈을 발로 걷어차고 철조망의 꼭대기를 넘어갔다. 그러자 그림자로만 보였던 검은 정체가 그를 향해 요상한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점점 모습을 드러낸 검은 정체는 상처투성이의 어린아이들이었다. 고통이 깊숙이 자리한 것 같은 아이들은 초점 잃은 눈으로 기면을 바라봤다. 그것이 기면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것도 잠시, 그들 뒤에 있던 거대한 검은 형체가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아이들의 모습이 살인귀로 변하며 삽시간에 기면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의 상황에 기면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들에게 잠식됐다.
눈을 뜨자 작은 창문을 통해 휘영청 밝은 달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어두운 하늘 속에 보인 달의 모습은 꿈 안의 상황과 잘 어울리는 달이었다.
악몽은 기면에게 익숙했다. 친구를 잃은 그 순간부터 평온한 꿈을 꿔본 적이 없었다.
벌써 10년도 다 되어가는 세월인데 그의 심장은 늘 이렇게 요동을 쳤다. 그의 뇌는 익숙해졌지만 심장은 왜 아직도 힘들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면은 온몸에 느껴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가 괜찮아진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자신도 괜찮아졌는 지 알 수 없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으로도 집안은 밝았다. 기면은 불빛의 끝에 자리한 냉장고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가 생겼다고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는 냉장고지만 기면은 냉장고 마저도 돌봐줄 시간이 없었다. 마음이 없는 건지 시간이 없는 건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냉장고 안은 며칠 전 사다 놓은 생수뿐이다. 그마저도 이제 절반 밖에 남지 않아 기면이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면 더 이상 냉장고는 받아들일 것이 없었다.
금세 바닥을 드러낸 물병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기면은 이내 싱크대에 던져 놓았다. 그리곤 단내나는 입을 잠재우기 위해 침대 옆 작은 서랍장 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담배마저 없었다. 담배갑도 싱크대에 던져 놓은 기면은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손에 있지도 않은 담배를 피는 시늉을 하며 달 아래서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렸다. 한 개의 메시지와 다량의 부재중 전화. 방해금지 모드로 해놓지는 않지만, 잠에 한 번 빠지면 너무 깊게 잠들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그였기에 이런 일은 익숙했다.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순간 다시 벨이 울렸다. 상중이다. 그의 다급함이 화면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기면은 잠시 주저하다 전화를 받았다. 그의 입에서 말을 떼기도 전에 상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5분 후 도착입니다.”
“응.”
기면은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고 전화기를 끊었다. 새벽 4시 30분. 또 한명의 VIP가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앞서 세 사건들도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그들이 VIP고 독살당했다는 것 밖에는 공통된 범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방에 굴러다니던 외투 아무거나 챙겨 금세 밖으로 나온 기면은 낡은 아파트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스포츠카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나마 달빛에 물든 벚꽃만이 상중의 스포츠카와 잘 어울렸다. 차가 기면에게 다가올수록 요란한 음악소리가 상중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냈다. 차가 거칠게 기면 앞에 서고, 날개가 펼쳐지 듯 문이 열리는 걸 보면서도 기면은 아무 감흥 없이 차에 올랐다.
“선배는 역시 감성이 없어.”
“무슨 말이야.”
기면은 여전히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안전벨트를 찼다.
“보통 내 차 보면 ‘우와~ 완전 멋있다~’ 이게 기본 반응인데 말이죠.”
“멋있다. 엉따 틀어줘. 잠 좀 자게.”
“안돼요. 일부러 안 켜고 왔어요. 브리핑 들어야죠”
“그럼 해.”
“선방일보 조사장이 살해당했어요. 집엔 아무도 없었고요. 신고자는 아들 조부사장인데, 저는 이놈이 범인 같아요.”
“네 생각 빼고.”
“직감이에요. 형사의 직감. 그 자식이 엄마도 죽인 게 분명하다니까요.”
“자살로 종결된 사건은 얘기는 하지 말고.”
“조사장 방 안에서 죽었데요. 너무 잔인하게 죽어서 도저히 방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사지를 절단해 놓고 도망간 걸까요? 선배는 사지 절단된 사체 본 적 있어요? 전 상상만 해도 으... 벌써부터 토할 거 같아요.”
언제 잠이 들었는 지 기면은 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기면이 익숙한 듯 시끄럽던 음악을 끄고 시트 온열 버튼을 눌렀다.
“이따 일어나셔야 합니다.”
처음으로 고요해진 상중의 차는 부유동을 향해 달렸다.
*
어떻게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지 각종 언론사 기자들이 사건현장 앞에 바글거렸다. 죽은 자의 유명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난리도 아니군.”
언제 일어났는지 기면이 창밖 풍경을 보며 감탄했다.
“언제 깨셨습니까?”
“안 잤어. 밀고 들어가자. 이런 차 저 집 주인도 탈 법한 차니까.”
“하하. 그래서 제가 이 차를 끌고 나왔죠.”
실은 아니었다. 자다가 급하게 나오느라 경찰서까지 가서 미처 차를 바꿔탈 생각을 못했던 거 뿐이었다. 기면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보다 차고를 보고 싶어서 더 현장 안으로 차를 끌고 들어가고 싶었다. 분명 곽과장은 소리를 치겠지만 말이다.
“이 새끼들은 왜 안 오는 거야!?”
박형사에게 건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역시나 곽과장의 가장 먼저 들렸다. 잠시 후, 박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십니까, 팀장님?”
“차고 문 좀 열어줄래?”
“차를 이리로 끌고 들어오시려고요?”
“강형사가 너무 좋은 차를 끌고 와서 여기 대는 게 맞는 거 같아.”
“아, 미친 새끼!”
“나한테 하는 소리야?”
“아닙니다! 바로 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기면이 전화를 하는 동안 기자 무리를 뚫고 현장 앞까지 도착한 상중의 차는 기면이 전화를 끊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야 차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과장님 화 많이 나셨죠?”
“이어폰 끼고 들어가게?”
“어휴~ 제가 어린 애입니까? 이제 다 컸습니다. 하하하하”
상중이 또 너스레를 떨자, 기면도 피식 거렸다. 처음 수사과에 들어왔을 때 경찰학교 출신이라고 하기에는 락커에 더 가까운 복장을 하고 나타나 다들 기암했었다. 현장에서도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뭔가 불안할 때면 락음악을 크게 듣는 등 놀러 온 건지 일을 하러 온 건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다니던 그는 어느새 형사다운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애 하나 키운 보람이 상중을 보면 느껴져 기면은 자주 그를 보며 피식 거렸다.
“늦었어요, 선배.”
“응.”
상중의 재촉에도 기면은 차고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고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탈출한 흔적도 급하게 차를 몰고 나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없어요, 어서 가요.”
상중은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오히려 기면을 끌고 집안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랐다. 기면은 상중이 미는 대도 계단 하나하나 벽에 붙은 그림 하나하나를 다 둘러보느라 밀어도 잘 올라가지 않았다. 곽과장에게 혼날 생각에 마음이 다급한 상중에 마음은 전혀 전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실로 향하는 문 앞에 다다르자 곽과장의 으르렁 소리가 기면의 귀를 강하게 때렸다. 그 순간 꿈에서 봤던 살인귀의 모습이 떠올라 기면은 오싹함을 느꼈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기면에게 상중이 물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쳐서.”
“드디어 과장님의 분노를 느끼신 겁니까. 그러니 빨리 가야 한다니까요.”
상중은 멈춰선 기면은 더 힘차게 밀어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곽과장의 고함이 기면과 상중에게 몰아쳐왔다.
“이 새끼들! 이제 오면 어떻게 해! 그리고 차를 끌고 현장 안으로 들어와?”
“차고 안으로 범인이 들어왔을지도 몰라서 살펴보느라고요. 근데 몰래 들어온 흔적이 없네요. 박형사 출입문 쪽엔 그런 흔적이 있었나?”
기면이 슬쩍 말을 돌리자 박형사는 곽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기면에게 답을 했다.
“아니요. 바깥 출입구부터 현장 안방까지 들어서는 문에는 몰래 들어온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피해자와 아는 사이겠네요.”
기면의 빠른 추리에도 곽과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뻔한 소리 할래?! 오자마자 죄송하다고 하지 못할망정 뭐?”
“그래도 최대한 빠른 차로 빠르게 모시고 온 겁니다.”
“네! 연락하고 30분도 안 돼서 왔습니다. 팀장님 집에서 여기까지”
열심히 쉴드(shield)를 치느라 후배들은 정신이 없는데, 기면은 천하태평이었다. 곽과장은 그런 기면의 태도가 더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하면 기면에게 화가 났다기보다 쉬쉬하며 출동한 사건을 어떻게 알고 기자들이 형사들보다 먼저 현장 앞에 진을 치고 있어서였다. 알만했다. 언론사 회장이 죽었으니 당연히 경찰보다 여러 언론사에 사건을 알렸게 뻔했다.
“거지 같은 새끼들.”
곽과장의 혼잣말 같은 욕이 기면은 누군가를 향했는지 알고 있어, 곧장 과학수사요원들이 들락거리는 방 안으로 향했다. 이미 집안 가득 철분 냄새가 진동해 예상은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이었다. 기면은 형사 생활 처음으로 현장에서 눈을 돌렸다. 놓칠지 모를 정신을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왜 그러세요?”
상중이 기면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방안의 현장을 들여보려는 순간, 박형사가 비명을 질렀다.
“야, 너는 보면 안 돼!”
박형사의 비명보다 먼저 현장을 봐버린 상중은 마치 혼이 나간 듯 초점을 잃고 고개를 돌렸다. 토하기 일보 직전이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든, 뭐든 사고를 칠 거 같은 표정을 하고 박형사를 바라보는 상중. 그는 곧장 그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고 갔다.
“잠시 자리 비우겠습니다.”
박형사와 상중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곽과장은 혀를 끌끌 찼다.
“대체 언제 클 건지....”
“과장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면 인간이냐? 참는 거지.”
“어떻게 참습니까?”
“너도 잠들 거 같냐?”
“견딜 수 있습니다.”
“견뎌라. 저것들 나갔으니까.”
“네.”
곽과장과 방안으로 들어선 기면은 놀라움을 넘어서는 사체의 모습에 힘겨웠다. 목은 침대 밖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척수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었다. 공포영화처럼 목이 떨어져 날아간 것보다 더 끔찍했다. 침대는 이미 몸에서 흐르는 피로 전체가 붉게 변해 있었고, 천장과 벽도 사방에 튄 피로 얼룩이 남아 있었다. 벽에 남은 흔적이 얼마나 그를 잔인하게 죽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피가.... 이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니 이 상태겠지.”
“증거는요?”
“하나 남았지!”
곽과장이 없다고 대답을 하려는 찰나 밖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과학수사과 한과장이 작은 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작은 지퍼백에 증거물1을 기면에게 넘겼다. 검은 종이인지 나무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매우 작은 형태로 2,3조각 있었다.
“이게 뭡니까?”
“담뱃잎”
“담뱃잎이요?”
“파이프에 들어가는 담뱃잎.”
“조회장이 피었을 수도 있잖아요?”
“시가 밖에 안 핀다고 확인했어. 조부사장이 파이프 담배를 피는 데 같은 성분이 아닌 것도 확인했고.”
“범인 거 군요?”
“응.”
범인에 대한 첫 번째 흔적이 나와 기면과 곽과장은 뭔가 물꼬가 트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전과 너무 다르게 잔인했다. 독살해 주긴 이전 사건도 독극물이 몸에 들어가는 순간 고통을 털끝 하나하나까지 다 느끼며 서서히 죽어간다 들었으나, 이것과는 다른 잔인함이었다. 생각에 잠긴 기면의 마음을 눈치 챈 한과장이 먼저 답했다.
“같은 놈이야.”
“증거가 남았습니까?”
기면의 질문에 한과장은 바닥에 있지만 몸통과 연결된 머리로 다가가 그의 오른쪽 귀 아래 총경동맥 위치에 남은 주사바늘을 가리켰다. 이전 사체들이랑 동일한 위치에 주삿바늘 같이 보이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목 부위 살이 너무 너덜너덜 찢어져서 정확한 위치라고 확신하기 어려운데, 가서 복원해 보면 확실해질 거야. 약을 투여한 거라면 시트가 흡수한 피에서 뭔가 나오겠지. 지금 보이는 상황에서 같은 범인이라는 증거는 이전 사체들과 동일한 위치로 보이는 곳에 주삿바늘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는 거야.”
“사람 살이 이렇게 찢어지기도 합니까?”
“고기를 찢어보면 알겠지만 보통은 결대로 찢어야 잘 찢어지거든. 근데 결대로 찢어진 게 아니고 엄청난 힘으로 잡아당겨 뜯은 거지. 여기서 엄청나다는 건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거야. 척수가 뽑혀 늘어난 거로 봐서는 몸은 바닥에 누른 채 머리만 위로 잡아 뽑은 거 같아. 어깨와 얼굴을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한과장의 말에 사체를 살펴본 기면은 얼굴에 남아 있는 둥근 모양과 어깨의 길쭉한 발모양 같은 걸 확인했다. 하지만 충격이 감과 동시에 과다 출혈이 발생해 자국은 거의 희미할 정도였다. 기면은 손과 발을 대보며 크기를 간음했다. 그도 꽤 큰 손과 발을 가진 남자였지만 그보다 더 큰 것 같이 느껴졌다. 정확한 증거들은 아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범인에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뚫고 겨우 박형사의 낡은 차에 몸을 실어 인근 편의점으로 자리로 옮긴 박형사와 상중.
편의점 바깥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서도 상중은 메스꺼운 속을 끌어안고 있었다. 잠시후, 박형사가 편의점에서 에너지음료를 사와 그에게 건냈다.
“마셔. 좀 나을 거야.”
“토할 거 같은 데 이런 게 어떻게 들어갑니다.”
음료를 받을 생각도 없이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은 상중에게 박형사는 음료 뚜껑까지 열어 그의 손에 쥐어주고 머리를 끌어올렸다.
“먹어. 효과 있으니까.”
상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속을 부여잡고 음료를 마셨다. 그런 상중을 한심하게 보며 박형사도 한모금 이온음료를 마셨다. 상중 앞에서는 센 척 했지만 실은 박형사도 현장에서 수십번 헛구역질을 했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도 그랬고, 사체의 모습도 그랬다. 형사생활 8년만에 이런 현장은 처음이었다.
“효과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이온음료를 마시고 조금 괜찮아졌는지 병을 살펴보며 상중이 말했다.
“그럼 내가 허튼소리 하든?”
“허튼소리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그냥... 못 미덥다?”
“그게 그 소리지, 새끼야!”
“과장님이랑 다니더니 입이 더 거칠어지셨네요?”
상중이 박형사를 놀리기 시작했다. 상중은 늘 박형사에게 그랬다. 마치 동기와 같이 대하는 태도. 박형사는 그게 매우 불만이라 더 상중을 나무랐지만, 상중의 귓등에도 그 소리는 박히지 않았다.
“너 때문이잖아! 제대로 안 할래? 매 사건현장 올 때마다 이런 식이면 수사과에서 빠져”
“제일 顔(かお: 체면)가 서는 과인데 어떻게 빠집니까.”
“그럼 구역질은 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오래 참은 거예요. 주차하면서부터 진동하는 피 냄새에 토할 거 같았는데 구역질은 안 했어요. 근데, 우와.... 방문 앞에 가니까.. 우와.... 대체 피를 얼마나 흘린 거예요?”
“사체 못 봤어?”
“네. 가까이 가자마자 선배가 끌고 나왔잖아요.”
“넌 안 보는 게 나아.”
“왜요? 이전보다 심각해요?”
“이전엔 심각한 게 아니었지. 독극물이 들어가서 피 토하고 죽은 거니까.”
“다시 속이 메스꺼워요.”
상중은 이온음료를 다시 들이켰다. 그런 상중에게 박형사가 전봇대 옆에 있는 하수구를 가리켰다. 상중은 고개를 돌려 박형사가 가리키는 하수구를 봤다.
“안 토해요.”
“가. 내 얘기 듣자마자 토할 거 같으니까.”
“에이~ 안 그래요. 나를 뭘로 보고. 말해요.”
박형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상중을 봤지만, 상중은 계속 괜찮다고 말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미심쩍었지만 박형사는 사건 내용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대가리가 뽑혔어.”
“뽑혀요? 힘으로 뽑은 거처럼 피부조직이랑 근육조직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어.”
“머리가 뽑혀요? 머리가? 뽑혀?”
상중의 혼잣말에 불안함을 느낀 박형사는 그를 피해 멀찍이 도망갔다. 하지만 상중은 그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계속 “머리가 뽑혀”만 반복해서 말하다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지더니 묵혀두었던 구토를 밖으로 발사했다. 분사된 상중의 내용물은 결국 박형사의 옷에 흔적을 남겼다.
“아! 미친새끼!!!!!”
박형사가 성질을 내며 상중에게 화를 내는 동안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한 기자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적어 내용을 전송했다.